양평의 사계(四季)하면 나는 늘 헤르만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라>가 떠오른다. 내가 번잡스럽던 신림동 시절을 마감하고 양평으로 둥지를 옮겼던 20년 전 어느 봄날, 만개했던 산벗꽃잎이 함박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고, 나는 그 그늘에 앉아 헤세를 읽었다.

<청춘은 아름다워라>의 주인공 안나가 시골 플랫폼에 내리고, 바람이 그녀 치마 자락을 스치고, 산벗나무꽃도 날리고…. 책갈피 위로 대책 없이 쏟아져 글씨 위에 덮여버리는 벚꽃 이파리를 입으로 후후 불어내면, 안나를 마중 나온 로데가 저만큼 다가서고, 안나를 풀어놓고 떠나는 열차의 기적 소리가 멀어지고, 특유의 봄 향훈이 핑글 돌고, 이번에는 마치 푸대에서 쏟아내듯 한꺼번에 꽃잎이 흩날려 책장을 덮고…. 꽃잎이 아니라 그 모든 것 위로 줄기차게 내리꽂히는 찬란한 햇빛 때문에 동공이 부셔 눈을 감으면, -찌찌, 찌찌리이릿….- 바로 머리 위에서 개똥지빠귀 한 쌍이 헤세의 낭만처럼 천연덕스럽게 울어 쌓는 느린 봄날 오후….

서울은 만원의 땅, 양평은 영하 19도의 땅

서울은 70년대 초에 벌써 만원 사례였다. 인파가 넘쳐 발 딛을 곳이 만만찮았다. 사람들은 담 너머를 기웃거렸다. 경기도 지역이었다. 서울과 근접 지역의 경계가 없어진 것도 그 때였다.

한데. 양평은 달랐다. 기실 엎어지면 코 닿는 곳인데도 불구하고 양평하면 너무나 먼 곳이고, 뭔가 손에 잡히지 않는 문제의 땅이었다. 심지어 남한 땅에서 가장 추운 곳이 어디냐 하면 사람들은 서슴없이 양평이라고 말했다.

하긴 그 해 겨울의 혹한이 매섭기는 했다. 그렇기는 해도 양평 지역 구멍가게에 진열해 놓은 진로 소주병들이 마치 폭죽 튀기듯 펑펑 터진 것은 아니었다. 신문기자가 목격한 그 곳의 소주병이 하필 그 시간에 터졌는데, 그것도 꼭 추위 때문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때 온도계의 눈금이 중간진의 그것과 맞먹는 영하 19도까지 내려갔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기온 측정기를 산자락이 아니고 강가에 꽂았던 탓으로 빚어진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강바람이 휘몰아칠 때는 더러 하강 곡선을 그을 때가 있는데, 그것을 기준 삼다 보니, 사람 살 데가 못되는 혹한의 땅이 양평이 되고 만 것이었다.

실제로 그 무렵 양평은 군부대가 인가보다 많았고, 그리니치 표준 시계와 대한민국 국방부 시계가 다르다고 믿었던 수많은 병사들이 혹독한 훈련이나, 내무반 폭력을 당할 때마다 세월만 가라, 내가 다시 이놈의 땅을 밟나 봐라 이빨 앙다물며 저주하던 곳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양평이 살기 힘겨운 흡사 황야 같은 곳으로 간주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엎친 데 덥친 격으로 서울 시민이 먹고 마시는 식수인 남한강 북한강이 똑같이 양평 땅을 거치게 되어있는데다, 팔당댐을 막게 됨으로 해서 양평이 갑자기 호반의 도시로 둔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었다.

1천만 수도 서울 시민의 식수로 사용하는 거대한 호반에 오줌 싸고, 똥 싸고, 빨래하고 수건으로 때 벗기고, 비누칠하고, 물 끼얹고…. 그렇게 더럽혀서는 안 된다. 농사야 좋지만, 비료 뿌리고 농약을 치다 보면 오염은 당연한 것이고, 그처럼 불결한 물인 줄 뻔히 알면서 어찌 꿀꺽꿀꺽 마실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정서가 팽배했다. 적어도 90년대 정서는 호반 도시로 변한 양평에 더 이상 사람이 모여 살지 않도록 규제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시책이었으며, 가능한 신축 허가를 불허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래 터를 잡고 사는 원주민들도 할 수만 있다면 외지로 내 쫓아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던 터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한강변 환경법’이었다. 마당에 선 나무 한 그루도 허가 받지 않고서는 자를 수 없고, 비가 와서 지붕이 새는데도 망치 들고 함부로 올라 수 없는, 참으로 지랄 같은 규제의 연속이 바로 그 환경법이었다.

한강변 환경법이 양평을 지켜내다

그런 황당한 법이 일사천리로 제정되어 한창 기승을 부리던 1994년 가을, 서양화가 박동인과 내가 말채찍을 말아들고 이랴! 낄낄! 포장마차를 달리게 했던 서부 개척 시대 이주민들처럼 겁도 없이 양평 땅에 살림 도구를 옮겨 놓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무모한 도전이었고, 어설픈 싸움이었다. 군청으로 면 사무소로 허벅지가 닳아 불이 나게 뛰어다녀도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이것은 저래서 안 되고, 저것은 이래서 안 되고, 심지어 서류 제출조차 원천 봉쇄당할 지경이었다.

물이 넘치고, 산수 좋고, 나무 많고, 꽃 많고, 날아다니는 새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고, 하늘은 맑고, 어디를 가나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을 찾다 보니, 그곳이 양평이어서 화실 짖고, 집필실 만들어, 한평생 그림 그리고 글 쓰려고, 비싼 돈 주고 땅 구입하여 들어왔는데, 왜 건축 자체를 못하게 하느냐고 항의도 하고, 더러 삿대질까지 해 보았지만…. 웬 걸! 던진 계란 바위에 박살나는 격이었다.

그래, 입술 꼴리는 대로 맘껏 지껄여 봐라, 그들은 목줄기에 지렁이가 기어가게시리 핏대를 올리는 박동인과 나를 마치 울안의 원숭이인 양 힐끔힐끔 바라보기만할 뿐이었다. 어느 개가 짓느냐는 식이었다. 도무지 진척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당하고만 있을 박동인과 내가 아니었다. 우리는 처지가 엇비슷한 또 다른 화가, 또 다른 문사들을 끌어모았다. 한국화가 홍용선, 시인 황명걸, 방송 드라마 작가 이재우, 예술정책 전문가 이철순, 사진작가 아무개, 도예가 아무개….

그렇게 하다 보니 1백 명에 가까웠다. 우리처럼 개척자를 자처하는 뜨내기 총잡이들의 수효가 그렇게 많았던 것이다. 막상 한 자리에 모여 두리번거렸지만, 양평에는 그 흔한 미술협회도 문인협회도 없었다. 예술인 자체가 없었다. 이름 하여 불모지였다. 경기도에서 유일무일한 곳이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만나자 마자 곧바로 의기투합했으므로 곧바로 탄생시킨 것이 ‘양평 예술인 협회’였다. 우리는 즉시 행동 개시했다. 회비를 거두어 사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맑은물 사랑 음악회, 맑은물 사랑 전시회, 맑은물 사랑 강변 걷기, 장애인 수용 시설 돕기 바자회, 맑은물 사랑 연극 공연….

맑은 물과 예술인이 만나다

이른바 맑은 물과 예술인의 만남이었다. 우리가 봐도 여간 신선한 발상이 아니었다. 강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예술인들의 사진이 조중동 일간지에 똑같이 실리고, 지상파 방송으로 소개되고…. 그런 판국이니, 군민들의 참여도 높았고, 그동안 바위에 계란 던지기 식이었던 군 관계자들의 인식도 확! 소리나게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무시무시한 환경법을 위반하기보다, 마치 이른 봄 쩍쩍 금이 가기 시작하는 얼음짱 위를 걷듯 조심조심 규제를 비켜가며 화실과 집필실을 완성했다. 그리고 기왕 나선 김에 예술인 환경 단체인 ‘맑은 물 사랑 실천 협의회’를 정식으로 발족, 당당히 사단법인 허가를 받는 데 성공했고, 지금까지 20여 년을 야외음악회 ‘물전’ 등 각종 환경 예술 교육 행사를 개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터 잡기에 그럭저럭 적응하자 구경하던 동료들이 야, 너희들 제법이네! 그렇게 박수를 쳐주었고, 그 중의 몇몇은 나도 가만 있을 수 없지? 하고 벌떡 벌떡 일어서 준 사람이 서양화가 배동환이었고, 시인 강민, 박문재 등이었다. 여주 땅에 말뚝을 박았다가 양평으로 옮겨 온 화가 신철도 있었다.

우리 그룹과 무관하게 소리 소문 없이 양평에 들어와 자리 잡았던 시인들도 여럿 있었다. 이제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이 그러했고, 최하림 시인이 그러했으며, 번역가이며 소설가였던 이윤기 씨가 그러했고, 지금도 맹렬히 활동 중인 한수산 소설가가 그러했다.

어디 그 뿐인가. 베스트셀러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 씨도 강원도 접경인 양동면으로 입주했고, 소설가 유금호, 드라마 작가 김정수 부부의 별장을 겸한 집필실도 양동면에 만들어졌다.

비단 문인들만이 아니었다. 우리보다 먼저였거나 비슷한 시기에 와서 조용히 자리 잡기에 힘썼던 서양화가 민정기, 김강용, 정채, 백성기, 김성식, 이동표, 류민자, 민병갑, 금동원, 한국화가 송계일, 이상찬, 도예가 윤형경, 조일묵, 조각가 이수찬, 고정수 등도 있었다.

왜 그들은 양평에 들어왔나?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양평의 전성기는 서양화가 송용과 박복규와 시인 안영희가 뒤늦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양평 용문에 둥지를 틀었던 2002년도가 아닌가 싶다.

양평에 유하는 예술인의 수효가 1천명에 육박한다는 소문도 전국의 시군 가운데 예술인의 활동이 가장 빈번한 지자체가 양평이라는 것도 그 무렵 밝혀진 사실이었다.

왜 그랬을까. 양평군이 예술인들에게 특혜를 준 일 없고, 따로 유치 활동을 벌인 일도 없었는데, 왜 양평으로 불나방들처럼 몰려들었을까.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장을 지낸 서양화가 박복규가 말한다.

“서울과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이제 전철까지 개통되었기 때문이죠. 게다가 땅값이 다른 곳에 비해 그닥 비싼 편이 아니거든요.”

시인 안영희도 말한다.

“양평에는 공장도 없고, 대학도 없고, 골프장도 없잖아요. 아마 전국에서 유일한 곳이 양평이 아닌가 싶어요. 그때는 무지막지했지만, 그래도 자연 그대로 지켜 준 환경법 규제 덕분인 거 같아요.”

이 자리를 빌어 특별히 감사해야 할 사람이 있다. 그 무렵 우리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 주고, 환경을 그대로 지키는 데 예술 문화가 대안이라고 일찍이 주창해준 민병채 군수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우리들은 양평에 와서, 양평의 예술인들과 어울리고, 양평의 내일까지를 지키며 사는 즐거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즐거움을 누구라서 쉬 말해주겠는가?

대동문화 82호 [2014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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