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언덕 위 양림교회(기장)가 있는 언덕에서 뛰어놀다 배유지 목사 사택이 있는 양림산을 바라보며 우리들은 그곳이 갈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언뜻 금발의 소녀가 나무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이 보이면 가슴이 뛰었다.

알 수 없는 소문이었지만 그곳에 용감하게 숨어 들어간 아이들이 어디론가 잡혀 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지금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나올 소문이었지만 그 시절 어린 우리들에게는 갈 수 없는 이상향 같은 곳이었다.

우리는 가슴에 불빛을 켜고 집으로 돌아갔다

골목길을 쏘다니다 산거미가 드리워가는 시간 웃교회가 있는 언덕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얼마나 많은 양림의 청년들이 이 언덕 나무 등걸에 앉아 첫사랑 순정에 빠졌던가.

저녁 종소리에 마을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때면 우리들은 불빛들을 하나씩 가슴에 켜고 집으로 향하였다. 지금은 언덕 위 나무들도 다 잘려나가고 언덕 너머 방림동 쪽에 있는 마을은 재개발되어 아파트가 거대한 성벽처럼 교회를 둘러싸고 있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살았던 언덕 아래 우리 집도 없어졌고 친구들과 뛰어놀던 골목길과 집들도 사라졌다. 마을의 집들이 사라지고 있을 때 나는 지상에서 마지막 풍경 속을 정신없이 허우적거리고 다녔다. 친구들과 누이들과 노닐던 그 집들과 거리 하나하나를 잊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집집마다 붙어진 오래된 낡은 창틀을 뜯어와 마을의 풍경을 그렸다.

이 지상의 마지막 풍경인 고향이 사라진다는 것은 영혼의 한 부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양림 웃교회(기장)은 김현승 시인의 부친이신 김창국 목사가 시무했고 시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이 언덕을 오르내렸으리라.

교회 아래쪽에는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소설가 문순태 선생과 TV드라마 작가 조소혜가 담을 사이에 두고 살았다. 문순태 선생은 <징소리>를 발표하였을 때 양림동에 살았는데 징소리는 댐 건설로 인해 고향을 잃은 실향민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지금 선생이 살았던 집도 철거되어 지상에서 사라졌으니 세상살이는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소혜 작가도 양림동에 살며 극작가의 꿈을 키워갔다. 조소혜 작가는 바로 위의 오빠의 친구인 나에게로 와 1년 정도 그림을 배웠다. 그림 소질도 뛰어났고 화실에 올 때는 언제나 시집을 들고 와 문학 이야기를 했다. 가끔씩은 단편소설 같은 내용의 줄거리를 생각해와 들려주었는데 이야기의 전개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사라진 이 지상의 마지막 풍경

양림 웃교회에서 학강초등학교로 가는 골목길 끝에는 항일 운동가이며 중국의 혁명 음악가인 정율성과 유년 시절 김현승 시인의 집이 나란히 있다. 살아있는 당신 정추 선생의 이야기로는 어린 시절 정율성과 수채화가 배동신과 숭일학교 근처에서 놀았던 기억을 떠올려서 들려주었다.

양림동에서 옛적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교회는 양림 아랫교회(예장 통합)이다. 양림 아랫교회 옆에는 오웬 기념관이 있다. 내가 숭일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학교 강당으로 쓰였는데, 그때는 기념관의 가치도 모른 채 이곳을 뛰어다녔다.

오웬기념관은 1909년 폐렴으로 42세 때 돌아가신 오웬 선교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1914년에 지어진 광주의 최초의 공연장이다. 1920년 김필례 음악 발표회, 순정 영화 <쌍옥루>가 상영되어 장안을 눈물바다로 만들었고 수피아 여고의 ‘열세집’이 공연되었고 광주 YMCA가 창설된 역사적인 곳이다. 올해는 100주년을 맞이하는 광주 문화예술 역사의 기념비적인 공간이다.

2013년 ‘굿모닝 양림’ 축제 때 이곳에서 양림의 시인을 기념하는 공연을 열었고 순수가 기획한 ‘양림의 소리를 듣다’에서는 최초의 무성영화 검사와 여선생의 상영이 있었다.

오웬 선교사가 폐렴으로 병이 들었을 때 목포에 있는 포사이드 의사가 치료를 위해 영산강으로 배를 타고 나루로 왔을 때 최흥종 목사가 포사이드 의사를 마중 나갔다.

포사이드 의사가 광주로 오는 길에 나병에 걸려 10년 전 집에 쫓겨나와 쓰러져 있는 환자를 발견하고 나병환자를 말에 태우고 포사이드 의사는 말을 끌고 광주로 왔다. 포사이드가 길에 떨어진 고름이 묻은 나병환자의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했을 때 최흥종 목사는 차마 겁이나 집어주지 못했다.

그리고 최 목사는 집으로 와 진정한 사랑을 깨닫지 못한 자신을 보며 새롭게 태어나 정의와 사랑의 광주 정신의 아버지로서 삶을 살아가겠다고 약속하고 이 다짐을 끝내 실천에 옮긴다.

조아라, 김필례, 김마리아, 남궁혁, 박애순, 윤혈녀 (윤형숙) 이현필 등 양림동은 수많은 선각자들이 활동하였고 그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곳이다.

정의와 이웃에 대한 사랑, 아직 변하지 않은 양림의 정신

양림동 오거리에서 사직공원 아래로 가면 이장우 가옥과 최승효 가옥이 있다.이장우 가옥은 정병호가 지었고 후에 이장우가 사들었다. 이곳은 비운의 천재 음악가 정추와 그의 형 정순채가 어린 시절 자랐던 곳이다. 최승효 가옥은 1921년 독립운동가 최상현이 건립했다. 독립 운동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최승효가 인수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림동 거리를 거닐다보면 근대의 긴 역사와 예술과 양림동에 이름 없이 살아난 사람들의 추억과 함께 걷게 된다. 오래전 마을은 많이들 변해있고 변해갈 것이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집들이 새로 들어서고 새로운 사람들이 마을의 주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양림의 정신이다. 세상에 대한 연민과 사랑 역사에 대한 정의를 실제를 실천하고 예술을 사랑하였던 양림의 정신은 변화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이것을 해야 할 사람이 지금 우리들인 것이다.

에메랄드빛 잔 같은 산자락에/ 대나무를 올곧게 솟아오르고/ 종달새 노래하며 산을 넘는구나/기쁨의 폭포수는 은빛 날개들로부터/접시 속 분지로 굽이쳐 냇물로 흐르는데/나무들은 잎사귀를 그늘 아래 감추는구나/ 밤이면 수천 가옥에 불빛이 아물거리고/생명은 영원한 조수처럼 흐르는구나/비옥한 들판은 부드러운 녹빛 벨벳으로 빛나고/점점이 흰 구름 수놓은 하늘은 깊은 바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구나/일찍이 이처럼 아름다운 곳이 없나니/조선의 빛이여/조선의 자랑이여/광주여

「어느 선교사가 광주를 보며 지은 시」(차종순 박사의 번역)

대동문화 82호 [2014 5,6월호]

한희원 작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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