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구 동호동(東湖洞) ‘남동마을’은 청송 심씨들의 공동체다. 그 마을 입구에 만취정(晩翠亭)이 있다. ‘만취(晩翠)’는 한겨울에도 푸르름이 변하지 않는 소나무의 푸르름을 말한다. 절개와 지조를 이르는 말이다.

정자 주변에는 수령 100년이 넘은 소나무와 고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단풍, 은행, 동백, 수양버드나무, 단풍나무, 사철나무 등이 정자를 에워싸고 정자의 풍경을 돋을새김하고 있다. 정자 앞에는 연못도 있고, 우물터도 있다. 봄 한나절 이 조용한 정자에 누워있으면 그 적막함이 속기를 씻어낸다. 눈을 감으면 맑은 햇빛의 피부가 눈꺼풀에 앉는다.

정면 3칸 측면 1칸에 앞뒤로 퇴를 이어 달아낸 팔작지붕 기와 건물이다. 건물 밖으로는 원통형 기둥을, 건물 중앙의 방 모서리에는 네모기둥을 둘러 세워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반듯하다)의 우주 구성의 원리를 담았다고 해설해볼 수도 있다.

이 정자의 주인은 한말의 만취정(晩翠) 심원표(沈遠杓·1853~1939)다. 학업에 전념하고 덕행을 닦았다고 한다. 나이 이십 이전에 문간공 노사기를 찾아가 그의 문하에서 위인의 도를 배웠고 신축년에는 문충공 송병선으로부터 배웠다. 조정에서 선공감역의 벼슬을 제수했으나 나가지 않고 자연 경관을 즐겼다. 조선 전기에 그의 선조 심선도 예조참의를 비롯한 육조의 요직을 맡았으나 처사를 자처하며 산수를 즐기는 야인으로 만족해 ‘망세정(忘世亭)’으로 불렸다.

선비는 한말 의병장인 김준, 전수용, 심수택 등을 도왔고, 일제의 은사금을 거절했다. 의병장을 도운 혐의로 장성 및 광주의 헌병소에 구인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시대에 낙담한 채 1913년 만취정을 지었다.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과 석촌(石邨) 윤용구(尹用九)가 쓴 만취정(晩翠亭) 현판이 걸려 있다. 한말의 학자들인 송사 기우만,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석음 박노술 등의 시문도 편액으로 걸려 있다. 심원표가 지은 원시는 정자를 조성할 때의 그윽한 정취를 읊고 있다.

금성 북쪽 유거에 한 집을 세우니/소나무의 높은 절개 남은 빛이 푸르구나/운림에 있으니 나의 취미 이루었고/산실(山室)에 술을 빚어 손님 잔에 올리니/땅에 푸른 그늘 숲길이 그윽하고

하늘에 닿은 울창함이 사시사철 푸르네/만취라는 이름으로 편액을 내거니/예쁜 꽃들과 이른 햇빛 반기네

정자 옆으로 남동영각(南洞影堂)이 있다. 남동사(南洞祠)는 만취 심원표와 그의 아들로 시서(詩書)에 능하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남석(南石) 심종대(沈鐘大, 1882~1959), 부친과 마찬가지로 시문(詩文)에 재능이 많았던 손자 계봉(桂峯) 심한구(沈翰求, 1898∼1974)의 영정을 봉안한 곳으로 1946년 봄에 건립했다.

또 그 옆으로 동호사(東湖祠)가 있다. 1946년 고려말 공신인 장안공 심덕부를 비롯하여 사부 심징, 망세정 심선, 묵헌 심례, 삼암 심광헌, 심용 등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우이다. 매년 2월 25일 제향을 올린다.

청송 심씨 집성촌에서 난 인물들이 이렇게 소나무처럼 푸른 절개로 무성한 푸르름을 자랑하듯 남아 있는 곳. 그러나 이제는 이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의 관리가 소홀해지고 있다.

소나무의 푸르름은 정자가 세워진 100년 동안 푸르지만 그때의 주인도 그 명성도 이젠 사위고 말았다. 그러나 그 선비의 푸르렀던 이야기는 대대로 유전하리라. 그러니 인생은 짧고 문화유산은 길다.

대동문화 82호 [2014 5,6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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