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들녘이건만, 바쁜 일상에 찌들다보면 그 푸르고 너른 풍경마저도 좀처럼 눈에 담기 힘들다. 공항을 향해 내달리다 극락다리를 끼고 왼쪽으로 슬쩍 접어들면 여물어가는 벼들이 가을바람에 곰지락거리는 서창뜰을 만나게 된다. 극락강과 황룡강이 만나기 직전 화방산이며 금당산, 백마산이 포근히 감싼 채 너른 들을 이룬 곳. 서창은 ‘광주의 서쪽에 들어선 곡식창고’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세금으로 바치던 쌀이나 특산물을 한양땅으로 올려보낼 때, 험한 육로보다는 뱃길을 자주 이용하였다.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이 흘러 수운(水運)이 편리했던 이 곳에도 창고를 만들고 인근에서 거둬들인 세곡(稅穀)들을 저장했던 것이다. 세곡창고가 있는 곳이라 붙여진 이름이긴 하지만, 허연 쌀이 오지게도 쏟아졌던 들녘 자체가 온통 곳간이었으니 서창이라는 이름은 꽤나 잘 들어맞는 셈이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서창 들녘 포구에는 쌀 50섬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고, 1960년대에는 강 자락의 수심이 제법 깊어 나루가 꾸준히 이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쌀을 싣고 드나들던 농선의 모습은 아득하고, 배가 닿았을 큰 물길은 높다랗게 쌓인 제방으로 메워져 잡초들만 무성하다. 다만 서창파출소 건너편에는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농선비(農船碑)가 자그맣게 서있고, 마을 뒤편에 곡식을 수검하던 창고터가 남아있어 조금이나마 옛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서창뜰에는 몇 해 전부터 풍년을 기원하는 만드리 소리가 복원되어 농군들의 걸죽한 가락이 들판을 채우곤 한다. 백중 무렵 마지막 김매기를 하면서 부르던 만드리는 주인과 머슴이 내남없이 어우러져 고단한 농사일을 잠시 잊는 신명의 한 판이었다. 올해도 그 만드리 덕인지 서창들녘은 실하고 맛있게 익어가고 있다.

서창동은 여전히 시골의 정취를 고스란히 풍기고 있지만 변해가는 모습도 적지않다. 허공을 가르는 무시무시한 철로며,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 그리고 듬성듬성 들어선 비닐하우스들…. 쌀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으니 서창사람들은 고추며 무, 배추 같은 작물재배에도 많은 품을 들이고 있다.

잊혀진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서창뜰의 내력을 조금이나마 기억할 수 있는 유래비와 옛 서창터라도 복원된다면 풍요로웠던 옛 정취를 잠시나마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대동문화 31호, 200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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