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나무와 함께 해온 역사이다. 특히 문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문자의 기록을 비롯 모든 생활 도구의 제작에 나무를 활용하는 등 인류의 진화는 나무와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왔다.

마을의 수호신격이었던 고목은 마을 사람들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고단한 여정과 성패를 똑똑하게 지켜봐왔다. 또 간난신고의 고단한 삶 속에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해야했던 우리 민초들에게 나무는 양식이 되기도 했다.

인류 문명 흥망과 성쇠에는 나무가 함께 하고 있었다. 나무가 없는 대지, 숲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끔찍하다. 문명사회의 가장 원초적인 요건은 나무와 물이라 할 수 있다. 나무는 우리 인간에게 많은 교훈을 주면서 역사, 문화, 예술, 생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나무는 곧 인문학이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 소나무

한국사람 두 명 중 한 명은 소나무를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꼽았고 그 다음이 은행나무였다. 소나무가 지구상에 나타난 것은 6,500만 년 전 신생대이다. 현재 전 세계에서 약 100여 종이

자라고 있다. 1만 년 전부터 우리 강토에서도 살기 시작한 소나무는 독특하고도 강인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숱한 역사의 질곡을 살아오면서 끈질긴 생명력을 길러온 한국인들의 민족성과 유사해 친근하다.

줄기가 붉은 나무는 ‘적송(赤松)’, 여인의 자태처럼 부드러운 것은 ‘여송(女松)’, 육지에서 자란다 하여 ‘육송(陸松)’이라고도 한다. 곰솔은 보통 해안을 따라 자라는데 바닷가에서 자라는 소나무라는 뜻으로 ‘해송(海松)’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소나무는 소금기가 많은 바람을 맞으면 살기 힘들지만, 곰솔은 바닷가에서 잘 자란다.

소나무를 ‘양반 나무’라고 한다. 3대가 한데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씨가 날아가 버리고 마른 듯 매달려 있는 솔방울은 할아버지, 생생한 초록 솔방울은 아버지, 그리고 막 수분을 하려고 암꽃에 내려앉은 송홧가루는 손자. 이렇게 한 나무에서 3대가 어우러져 살고 있는 것이다.

벼슬도 받고 세금까지 내는 소나무

소나무는 우리말로 ‘솔’이라고도 하는데 ‘솔’은 ‘위(上)에 있는, 높고(高), 으뜸(元)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나무 중에서 우두머리라는 뜻으로 ‘수리’라고 부르다가 오늘날 이름인 솔로 변해온 것으로 보인다.

중국 진시황이 행차 중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으나 소나무 덕에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자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 이 소나무에게 공작의 벼슬을 주어 ‘목공(木公)’, 즉 ‘나무의 공작’라 불렀고, 이 두 글자가 합해져서 ‘송(松)’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법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있는 천연기념물 ‘정이품송’은 600년 된 소나무로 속리산의 상징이다. 1464년 세조가 신병 치료를 위해 이곳에 왔을 때 소나무 밑을 지나게 되었다. 세조는 자신이 타고 있던 연이 소나무 가지에 걸릴 것을 염려하여 “연이 걸린다!”고 소리치자, 소나무는 신기하게도 늘어졌던 가지를 들어 올려 왕의 연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세조는 이 기특한 소나무에게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

경북 예천군 수령 600여년이 된 ‘석송령’이란 소나무가 있다. 식물인데도 사람처럼 토지를 소유하고 세금을 내는 등 세계에서 유사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명물이다. 1920년 후손 없이 살던 이수목이란 사람이 자신의 토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마을 주민들은 600여년 된 이 소나무를 ‘석평 마을에 사는 영험한 소나무’란 뜻에서 ‘석송령’이라 이름 짓고, 이씨의 토지를 ‘석송령’ 명의로 등기했다고 한다.

예천군 토지 대장에 등록번호 ‘3750-00248’로 1927년 8월 10일 등재된 석송령은 감천 천향리(일명 석평마을) 416 외 4필지(3,937㎡)의 보유자로 주민들이 대신 매년 종합토지세를 내고 있다. 2008년 44,250원, 2009년 47,650원 등을 납세했다.

인간의 지조 소나무가 말해준다

소나무는 사철나무로 변하지 않은데서 지조와 절개, 충절을 상징한다. 고산 윤선도의 「오우가」 중에 소나무를 노래한 시이다.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는가/구천(九泉)의 뿌리 곧을 줄을 그로써 아노라

<논어>에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글이 나온다. 추사 김정희의 작품 <세한도>는 이 글귀에서 유래한 이야기가 전한다. 속언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 죽으면 찾아오는 사람 하나도 없다.”고 했던가. 조선 후기 최고의 귀족 신분이자 문화예술의 상징적인 인물로 추앙 받던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양을 가자 찾아온 사람은 제자 이상적과 소치 허련, 초의 선사 등 몇몇에 불과했다.

추사 김정희는 이상적이 한양에서 바다 건너 제주도까지 수차례 찾아오자, 그 변함없는 의리와 지조의 뜻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담아 ‘세한도’라는 그림으로 그려 선물했다. 그림 속에서 유배의 고통과 권세만을 좇는 세상인심을 읽을 수 있다.

옛 어른들도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척박한 곳에 뿌리내려 모진 고생 속에 제대로 자라지 못한 못난 소나무는 산을 지키면서 씨를 뿌려 자손을 번성케 하고 온갖 재해에도 산이 훼손되지 않도록 산을 보호하는 지킴이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같은 소나무지만 비바람을 덜 받아 곧고 왕성하게 자란 소나무는 사람들이 재목으로 쓰기 위해 베어 버린다. 곧은 나무가 먼저 베인다는 ‘직목선벌(直木先伐)’이다.

장수 상징하는, 학자의 나무 은행나무

‘화석나무’라 불리는 은행나무는 오랜 옛날 공룡이 살던 시대부터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단한 생명력의 장수목이다. 은행나무의 한자 ‘은행(銀杏)’은 ‘열매가 살구를 닮았지만 흰빛이 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에서는 잎이 오리발을 닮아 ‘압각수(鴨脚樹)’, 할아버지가 심은 은행나무 열매를 손자 대에 가서야 얻는다고 하여 ‘공손수(公孫樹)’라고도 한다. 은행나무가 처음 열매를 맺기까지 대략 20년이 걸린다.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는 불교와 유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때문에 유교와 관련 있는 건축물인 종묘, 서원과 향교, 성균관 선비들의 고택 등에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다.

또 공자가 ‘행단(杏亶)’에서 제자들에게 강론했다고 해서 은행나무를 ‘학자수’라고도 한다. 이 ‘행단’이 ‘은행’인지 ‘살구나무’ 인지는 논란이 분분하다. 우리나라는 대체적으로 행단을 은행나무로 보고 있다. 또 은행나무는 ‘장수’를 뜻하기도 하고 많은 열매를 열려 ‘풍요’와 ‘다산’을 뜻하기도 했을 것이다.

은행나무는 지금으로부터 1억 3천만 년 전의 전성기 때에는 은행종 외에 2~3종이 더 있었다고 한다. ‘기백만년 동안 은행나무 위에는 해가 질 날이 없었다.’라는 말이 있다. 오래 가고, 강건하고, 저항력이 강하며, 토지의 선택성이 적고, 생장이 빠르며, 추위에 잘 견딘다. 가을이 되면 은행잎은 노란색으로 변하여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은행나무는 암, 수가 다른 나무이기 때문에 수나무에서는 수꽃이, 암나무에서는 암꽃이 핀다. 암나무만으로는 결실이 되지 않지만, 가까이 수나무가 없어도 결실하는 예가 있다. 꽃가루가 멀리 날아가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로 천년 목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그 자태가 사천왕처럼 당당하게 버티고 있는 천왕목(天王木)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생명의 숭고함과 경외감을 갖게 한다. 조선 세종 때 당상직첩(堂上職牒) 벼슬을 하사 받은 용문사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로 나이는 대략 1,100살 정도로 추정되고 둘레 14미터, 높이는 62미터에 이른다.

최고령 나무답게 이야기도 많다. 신라의 원효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하면서 심었다는 설, 의상대사의 지팡이를 꼽아놓은 것이 자랐다는 설, 신라의 마지막 왕자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풀길 없어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세속을 잊고자 지팡이마저 버린 것이 자랐다는 설도 있다.

의사를 높여서 ‘행림(杏林)’이라 하고, ‘행림계(杏林界)’는 의사들의 세계를 말한다. 본래 행림이란 ‘살구나무 숲’ 또는 ‘은행나무 숲’이다. 옛 중국의 <신선전>에 의하면 ‘동봉’이란 착한 명의가 있었는데, 그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치료비를 한 푼도 받지 않고 치료비 대신 집 뒤뜰에 은행나무나 살구나무를 심도록 했다. 중환자에게는 5그루를 가벼운 환자에게는 1그루를 심도록 했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집 뒷산이 온통 은행나무로 가득하게 됐다. 동봉은 이 열매를 팔아 곡식으로 바꿔 빈민 구제에 나섰다. 날이 갈수록 곡식은 늘어났고, 이렇게 하기를 수십 년, 마침내 동봉은 신선이 되어 승천을 했다. 이때부터 훌륭한 의사를 ‘행림’이라 하였다.

선비를 상징하는 회화나무 이야기

선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는 무엇일까? 매화도 있고 소나무와 대나무도 있지만 단연 회화나무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과 논산 명재 윤증 고택, 해남의 녹우당 등 고택 등 곳곳에서 회화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콩과에 속한 나무로 중국 주나라 때 조정 뜰에 홰나무 세 그루를 심어 삼정승의 좌석을 표시했다고 해서 ‘삼공(三公)의 나무’라고도 한다.

회화나무는 ‘홰나무’라고도 하며 한자로 ‘괴목(槐木)’이라고도 말한다. 회화나무의 중국식 이름이 ‘괴화(槐花)’인데 ‘괴’의 중국 발음이 ‘홰’ 또는 ‘회’이기 때문에 ‘회화나무’라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대개 회화나무를 가리키는 ‘괴목’과 느티나무를 가리키는 ‘귀목’이 발음이 비슷하여 혼동해 사용하기 십성이다.

회화나무를 뜻하는 괴(槐)자가 나무 목(木)에 귀신 귀(鬼)자가 들어간 것은 회화나무가 사특한 귀신을 쫒는 벽사(辟邪)의 효능이 있다고 믿어온 때문이고, 느티나무를 가리키는 귀(櫷)자가 나무 목(木)과 거북 귀(龜)가 합해져 만들어 진 것은 느티나무가 거북처럼 오래 산다는 장수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마을마다 당산목이나 정자목으로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버티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양기(陽氣)를 상징하는 느티나무를 음(陰)한 기운이 많은 곳에 비보수로 즐겨 심었다. 또 장수의 나무인 느티나무는 생김새나 품새가 넉넉하고 소나무나 은행나무처럼 고고하거나 배타적이지도 않아서 한국인들 정서에 가장 알맞은 나무이기도 하다.

남도 향수의 상징 배롱나무

삼복 폭염을 달래주는 나무는 ‘목백일홍’ 곧 ‘배롱나무’이다. 목백일홍을 순우리말로 배롱나무라고 부르고 별칭으로 ‘자미(紫薇)’라고 부른다. 옛날 문인들은 식영정과 환벽당 앞 천을 ‘자미탄’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이곳에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던 것 같다. ‘백일홍나무’가 소리 나는 대로 ‘배기롱나무’로 바뀌고 다시 ‘배롱나무’로 불리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뜻한 남쪽이 원산지로 남녘에 대한 향수의 상징 같은 배롱나무는 춘삼월 백화쟁발(百花爭發)하는 때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때를 기다리다가 초여름 7월 중순에 피어 세 번 정도 지며 피며 초가을까지 장장 100여 일 동안 붉은 위용을 자랑하는 점에서 대기만성의 인내를 배우게 만든다.

배롱나무는 몸통이 미끄러워 일본 사람들은 ‘사루수베’, 즉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고 말한다. 살살 긁어주면 나뭇가지 끝이 파르르 떤다고 해서 ‘간지럼나무’라고도 하며 벼를 수확할 때까지 꽃이 핀다 하여 ‘쌀밥나무’라고도 한다.

토종 배롱나무는 진한 붉은색 꽃 하나이고 ‘백일백’이라 불리는 흰색, 연분홍, 진분홍 등의 꽃이 피는 배롱나무는 일본산 변종이다. 꽃말은 ‘헤어진 벗을 그리다.’이다.

조선 초 성삼문이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 서로 백일을 바라보니, 너와 더불어 한잔하리라.’ 라고 시로 노래했다. 당나라 양귀비가 배롱나무를 좋아하자 현종 황제는 중서성(中書省)에 온통 배롱나무를 심고 ‘중서성’의 이름도 ‘자미성’으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몸통이 벌거벗은 여인의 나신(裸身)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양반집 안채에는 심지 않았지만 화사함 속에도 청순 정숙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제 몸을 감싼 껍질을 스스로 벗어던진 채 항상 매끈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탓에 청렴을 상징한다 하여 선비들이 기거하는 앞마당에는 심었다. 강릉 오죽헌에는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살아있을 때에 심었던 600여년 된 배롱나무가 있다. 안동 병산서원에도 500여년 된 배롱나무가 선비들의 청렴을 상징하듯 서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800년 된 부산진구 양정동 정씨 묘소 앞에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된 나무이다.

스님들 또한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절 마당에 즐겨 심었다. 필자는 많은 배롱나무 중에서 강진 백련사 만경루 앞 수백 년 된 배롱나무를 가장 잘생긴 것으로 치고 싶다. 한여름 진한 붉은꽃이 만개했을 때 만경루에 올라 문짝을 젖히고 강진만 바다와 함께 내려다보는 보는 배롱나무꽃의 정취는 환상 그 자체이다.

남도에서 배롱나무꽃의 진수는 담양 명옥헌과 장성 요월정에서 볼 수 있다. 한국 최고의 배롱나무 군락지로 손꼽히는 담양 고서 명옥헌 원림. 정자와 연못, 노송 오솔길과 배롱나무가 어우러지고 붉은 꽃들이 연못에 질펀하게 투영된 정경은 한 폭의 수채화이다.

군자의 품격 간직한 매화와 매화꽃

입춘이 지나자마자 남도 땅 맨 먼저 달려와 아직은 이른 봄소식을 알리는 화신(花信)은 매화이다. 봄의 전령 매화를 ‘춘선(春先)’이라 했다.

모든 생물이 북풍한설에 떨고 있을 때 화사하고 고운 자태를 뽐내는 ‘설중매(雪中梅)’는 불의와 역경에 결코 굽히지 않는 선비 정신의 표상으로 여겨왔다.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향기를 팔지 않듯 선비의 지조를 ‘매일세한 불매향(梅一世寒 不賣香)’에 비유했다. 고매한 선비 정신에 비유돼 시인묵객들의 작품 속에 곧잘 등장하는 ‘설중매’는 한겨울 눈 속에 피는 매화인줄 알고 있으나, 사실 봄에 핀 꽃에 눈이 내렸을 뿐 ‘설중매’는 아니다. ‘한매(寒梅)’라고도 하며, 강소성, 절강성 등 중국 강남 지방에서 자라는 매화를 말하는데, 이 곳 강남은 겨울에도 난대성 식물이 자란지만, 우리나라는 겨울이 길고 추워 겨울에 매화가 꽃을 피우기는 어렵다.

매화는 우리나라 중 남부지방과 제주도에 널리 분포하는데, 2월에서 4월 사이에 흰색과 붉은색, 분홍색의 꽃이 피어 상춘객(賞春客)과 시인묵객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다. 6월경에 맺힌 매실(梅實)은 식용이나 약용으로도 널리 효용되고 있다. 재미난 것은 왕실에서는 임금의 대변을 매화 열매인 ‘매실(梅實)’로, 소변은 ‘매우(梅雨)’ 라고 미화해서 부른다는 것이다.

남도에서 홍매로 유명한 곳은 전남대학교 캠퍼스, 구례 화엄사, 순천 금둔사의 홍매를 들 수 있다. 지허 스님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음력 섣달인 겨울에 피는 매화를 ‘섣달 납(臘)’자를 써서 납월매라 불렀다. 완주 위봉사 홍매와 산청의 단속사 홍매도 유명하지만 역시 섬진강변 하얀 꽃구름이 내려앉은 듯 장관을 이루는 광양 백매(白梅)는 남도 매화의 상징이다.

홍매와 백매로 수놓은 남도 땅

퇴계 선생은 매화를 사랑하여 100여 수의 매화시를 남겼는데, 도산서원 ‘백매화’에 대한 일화가 흥미롭다. 단양 군수 시절 ‘두향(杜香)’이란 기녀가 퇴계 선생을 흠모했으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퇴계가 단양을 떠날 무렵 두향은 희다 못해 푸른 백매화 한 그루를 선물했고 선생도 두향을 못 잊어 서원 뜰에 심어두고 그녀를 그리워했다.

선생은 운명 직전 자신의 초췌한 모습을 매화에게 보이기 싫었던지 방안의 매화 화분을 밖으로 옮기라고 지시한다. 매화는 바로 두향의 분신이었던 샘이다. 생이별을 한 후 서로는 한 번도 만나지를 못했다. 퇴계의 부음을 듣고 4일 동안 걸어서 안동에 달려온 두향은 선생의 상을 치른 후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잃고 남한강에 투신, 선생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지금도 백매화는 대를 이어 두 사람의 애닮은 사연을 향기로만 전하고 있다.

당나라 때 백낙천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한가’에서 둘의 천생연분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연리지 비익조(連理枝 比翼鳥)’에 비유해 찬사했다.

이렇듯 나무에는 인간의 진한 삶의 이야기가 농축되어 있다. 수많은 역사와 인물들의 이야기가 문학, 예술 속에 숨어 있으니 나무는 곧 인문학인 것이다.

대동문화 83호 [2014 7,8월호]

조상열 발행인  ddmh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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