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동에는 간송 미술관, 최순우 옛집, 선잠단, 길상사, 성락원 등과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에 더해 북정마을 달동네가 있어 서울 문화 답사로 제격이다.

성북동에는 또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 1904~미상) 선생의 옛집이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이태준길 4번지 서울 성북구립 미술관 곁이다. 이 저택은 상허가 1933년에 지어 ‘수연산방(壽硯山房)’이란 당호를 짓고, 1946년까지 살던 집이다. 상허의 대표적인 단편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피는 정원>, 장편 <황진이>, <왕자호동> 등이 집필됐다.

성북동 수연산방에서 수련 향기를 맡다

회색벽돌의 높은 돌담에 일직선으로 솟은 일각대문에 ‘수연산방’이라고 적혀 있고, 마당에 들어서면 정원이 멋스럽다. 마당은 넓지 않지만 오른쪽 한옥은 ‘문향루’와 ‘일관정’ 등의 전각들이 소박하면서도 멋스런 정취를 풍긴다.

이 가옥은 동안 ‘성북동 이태현 가옥’이었던 것을, 납·월북 작가들이 1988년 해금 조치되면서, 후손들이 ‘이태준 가옥’으로 명칭 변경을 요청해 그렇게 정해졌다. 이태준 후손들의 명칭 변경 요구에 의해 1998년 7월 10일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전면부는 정면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서쪽인 왼편으로는 건넌방, 오른편으로는 안방을 두었으며, 안방에서 앞으로 꺾여 나온 곳에 누마루가 조성되었다. 이 누각에 ‘한향루(한향루)’라 새긴 부채 모양의 나무 현판이 걸려있다. 또 대청 대청 전면 처마 아래 왼쪽 칸에는 ‘수연산방(壽硯山房)’, 오른쪽 칸에는 ‘죽간서옥(竹澗書屋)’ 현판이 걸려있다. 왼쪽으로는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고, 감나무·사철나무가 어우러져 있다. 작은 규모의 집이지만 없는 것이 없이 알차게 꾸며졌다.

이태준의 수필 <무서록>, <목수들>에는 이 집을 지은 과정과 터의 내력 등이 묘사되어 있다. “내가 조선집을 지음은 이조 건축의 순박ㆍ중후한 맛을 탐냄에 있음이라. (중략) 그들의 연장 자국은 무디나 미덥고 자연스럽다.”고 했다.

‘순박 중후한 맛을 탐냄’이라는 이 문구 속에 이태준의 생애와 그의 문학 세계가 어쩌면 담겨져 있는 줄도 모른다. ‘동경과 좌절의 미학’, ‘문장과 구성과 묘사의 탐미주의’라는 문학 세계이다.

한국 현대 소설 기법을 이룬 소설가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창하는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개화파 인물이었다. 이태준은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불라디보스크로 이주했다가, 아버지의 죽음으로 귀국하다가 함북 배기미[梨津]에 정착해 한문을 수학했다.

9세 때 어머니의 죽음으로 외할머니를 따라 철원 용담으로 귀향해 친척집을 전전하게 됐다. 사립봉명학교를 졸업하고 객주집 사환, 상점 점원 등으로 일하다가,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고학생이었지만 우수한 성적이었다. 이때 가람 이병기 선생과 정지용, 김영랑, 박종화 등의 문인들을 만났다.

휘문고보 학예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동맹 휴교 주모자로 몰려 4학년 1학기에 퇴학됐다. 일본 조치[上智]대학에 수학하였으며, 《시대일보》에 단편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상지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 신문사나 모교를 방문해서 일자리를 구했지만 취업난에 허덕였다.

26세 대인 1929년 《개벽》사에 입사해 편집에 관여하면서 본격적인 문단 생활이 시작됐다.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었고, 1933년 박태원, 이효석 등과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였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을 통해, 깔끔하고 운치 있는 무장과 짜임새 있는 구성, 선명한 인물 묘사 등으로 한국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했다. 비록 작중 인물들은 일제 시기 회의적이고 패배적인 성격으로 부각되어, 소설의 내용 자체가 허무주의에 물들었다.

상허는 1939년부터《문장(文章)》지의 편집자 겸 소설 추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8·15광복 직전 철원에서 칩거했다가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포섭되어 활약했다. 문화건설중앙협의회, 남조선 민전 등의 조직에서도 활동했다. 1946년 월북했다.

이 해에 <해방전후>로 제1회 해방문학상을 수상했다. 1947년에는 소련 여행기인 <소련 기행>이 출간됐다. 1948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국가학위수여위원회 문학분과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나, 이후 문단 활동은 미약했다.

1956년 소련파의 몰락과 함께 ‘구인회’ 활동의 사상성을 이유로 비판 숙청 당해 함흥, 강원도 등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병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념적 지표 없는 지식인의 선택

상허의 단편 <해방전후(解放前後)>는 해방을 전후해 나타난 이태준의 문학적 변모의 양상이 드러나는 소설이다. 1946년 8월 《문학》에 발표된 이태준의 중편소설이자, 대표적 자전 소설이다.

이태준의 1943～1945년 사이의 삶이 직접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전적 성격이 강한 작품으로, 작가가 광복 전 낙향했던 철원이 배경으로 설정되어 있고, 광복 후 전국문학자대회니, 신탁통치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의 문학인들의 모임이 그대로 서술되고 있다.

소설 속에서는 김직원으로 대표되는 보수적 민주주의 경향과 사회주의편에 서는 현의 입장이 화해를 이루지 못함으로써 해방공간의 혼돈과 대립을 반영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순수열정이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민족적 단결과 통합을 계속 기대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되지 않았음이 드러나고, 조직적이고 의도적 단체의 구성을 강행하려는 공산주의 젊은 문필가들을 오히려 나무라고 민주진영과의 통합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작가의 분명한 태도나 선택이 유보된 전향성을 드러낸다.

이 소설은 해방공간에서 빚어지고 있었던 문필가들 사이의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며, 작가의 지향이 소극적이고 불분명한 채 순수열정만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작가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어느 쪽에서도 쉽게 용납되지 않았으며, 그의 고뇌가 오히려 북한에서는 회색적 태도나 부르주아적 사고로 지탄받아 숙청의 빌미가 되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프로측도 민족주의측도 아니었으면서, 해방 후 누구보다도 먼저 정치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월북으로 이어진 변신을 보였던 상허 이태준. 이태준은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을 때 나타나는 작가적, 시대적 양상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시사점을 준다.

새로운 삶이 문장을 새롭게 한다

이태준의 문장론인 <문장강화(文章講話)>는 지금도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의 필독서이다. 1939년 《문장》지 창간호부터 연재하다가 9회로 그치고 이듬해에 문장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책이다. 글을 쓰는 방법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는데, 문장 작법의 기초, 각종 문장의 작성 요령, 퇴고의 이론과 실제, 문체 등에 대한 설명과 예를 제시하고 있다.

새로운 문장 작법이란 글을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첫째 말을 짓기로 해야 한다. 글짓기가 아니라 말짓기라는 것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글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가 표현하려는 것은 마음이요, 생각이요, 감정이다. 마음과 생각과 감정에 가까운 것은 글보다 말이다.

둘째 자신만의 문장작법이어야 한다. 말은 사회에 속한다.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소유인 단어는 개인적인 것을 표현하기엔 원칙적으로 부적당할 것이다. 그러기에 개인의식의 개인적인 것을 언어를 통해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비관적인 결론을 가진 학자도 있다. 아무튼 현대는 문화 만반에서 개성을 강렬히 요구한다.

셋째 새로운 문장을 위한 작법이어야 한다. 산 사람은 생활 그 자체가 언제든지 새로운 것이다. 고전과 전통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오늘이란 어제보다 새것이요 내일은 다시 오늘보다 새로울 것이기 때문에, 또 생활은 오늘에서 어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서 내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의식적은 아니라도 누구나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자꾸 새것에 부딪쳐감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 임형택 해제 <문장강화> 중에서-

그렇다. 이태준의 문장 작법은 ‘말짓기이고, 개성이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이었다. 그 감성적 새로움에 대한 동경이 또 이태준의 소설 작품이었고, 월북의 판단 기준이었다.

우리는 늘 새로운 삶을 살기 때문에 늘 새로운 삶의 작법을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전통과 고전의 진리들도 새로운 삶의 작법으로 필요한 것인가? 아니면 좌인가, 우인가? 끊임없이 우리는 그 외줄을 타고 산다. 지금도 그렇다.

대동문화 83호 [2014 7,8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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