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사정이 없어 벌써 닭이 꼬꾜 닭아, 닭아 닭아 우지 마라. 반야진관(半夜秦關)의 맹상군이 아니로구나. 네가 울면 날이 새고, 날이 새면 나 죽는다. 나죽기를 설찮으나 의지 없는 우리 부친을 어이 잊고 가잔 말이냐.“ - <심청가> 중-

닭이 울면 심청이 눈 먼 아비를 두고 공양미 3백석에 팔려가게 생겼으니, 단장(斷腸)의 애끓음이 오죽했을까. 우리는 소리꾼의 진양조를 따라 심청의 기막힌 심사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사람과 역사의 한복판에서 신명을 얻은 ‘소리’

우리는 ‘소리’를 즐긴다. 때로는 폭발하고 때로는 애절하며, 천지개벽 바위를 뚫고, 소름이 오소소 끼치도록 오감을 파고드는 소리꾼의 성음. 그 호쾌한 노랫가락(唱)과 신들린 연기(발림), 구성진 사설에 빠져들어 그만 세상 밖 근심과 시름을 까맣게 잊고 마는 것이다.

“머리 위에 푸른 버들은 올을 따라서 흔들. 발밑에 나는 티끌은 바람을 쫓아서 일어나고, 해당화 그늘속의 이리가고 저리 갈제 그 때의 도련님 살펴보시더니, 마음이 으쓱 머리끝이 쭛빗 어안이 벙벙 흉중이 답답. 들숨날숨 꼼짝 못허고 눈을 번히 뜨고 방자를 부르는디,” -<춘향가> 중-

버드나무 흐드러지고 해당화 휘영한 광한루에서 춘향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사뿐히 그네를 타는 장면, 그 춘향을 보고 한눈에 홀딱 반해버린 몽룡의 심중이 이보다 더 펄펄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앞뒤 재지도 못하고 방자를 찾는 몽룡의 다급함은 두 청춘남녀의 뜨거운 러브 스토리를 예고하는 최고의 복선이 될 법하다.

소리꾼들에게 보내는 오마주(hommage)

전라도에도 일찍이 아주 특별한 ‘소리’가 있었다.

기름진 서남부 평야를 쩌렁쩌렁 호령하고, 동부산악 촌부들의 고단한 심사를 보듬으며, 사람과 역사의 한 복판에 늠름히 서서 스스로 신명을 얻은 소리. 전라도 개땅쇠들과 그 아낙들의 시름을 씻겨주고,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사는 건 제자리라며 잔뜩 부아가 돋은 촌부들을 눙치며 위로해 주던 게 바로 ‘소리’였다.

전라도의 ‘판소리’는 독보적인 위상과 전통을 간직한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전라도 땅 구석구석에는 한 시대를 풍미하던 소리꾼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고, 그들의 삶과 예술혼은 그들이 노래했던 사설보다 더 기구하고 극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찌감치 “명창 나기가 정승 나기보다 더 어렵다”고 할 만큼 명창에게는 최고의 권위와 명예가 부여되었지만, 그 ‘명창’이라는 영광을 얻기까지 소리꾼이 감내해야 할 고통과 시련도 컸다.

세상 속에서 ‘예인’이라는 이름을 얻고 일가를 이루기까지, 한 사람이 예술의 가장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오마주(hommage)는 당위를 갖는다.

전주세계소리축제 13년의 역사는 바로 그 ‘오마주의 발자취’였다. 전주세계소리축제를 세상에 존재하게 만들었던 모태는 ‘판소리’였다. 그것은 판소리가 고루한 전통이나 일부 애호가들의 장르가 아닌, 사람들 속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장고한 시간을 이어갈 최고의 예술적 자산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이 판소리의 공연 양식과 내용(다섯바탕)을 다양하게 변용하면서 판소리의 대중성과 세계화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2003년 판소리가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소리 축제의 발전 가능성은 더욱더 힘을 받게 되었다.

소리축제가 판소리를 담아내는 그릇이라면, 판소리는 소리 축제의 정체성을 떠받치는 불가분의 관계, 말하자면 최상의 파트너로 성장하게 된 셈이다.

영국 송라인즈가 뽑은 ‘3년 연속 베스트 축제’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최근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3년 연속 영국의 저명한 월드뮤직 전문지 ‘송라인즈(Songlines)’가 추진해오고 있는 ‘국제 페스티벌 베스트 25’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2011년부터 소리축제를 매년 방문했던 송라인즈의 사이먼 브로튼(Simon Broughton) 편집장은 축제의 이모저모를 참관하면서 특히 전주 한옥 마을에서 열린 판소리 공연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전주세계소리축제에 관한 취재 후기에서 “판소리는 소리꾼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극 속 등장인물을 연기하며 고수가 동행하는 완성된 예술이다.”라며, “필자가 처음 접하고 난 뒤 참을 수 없을 만큼 엄청나게 즐길 수 있었던 예술양식이다.”라고 극찬했다. 또한 “소리축제에서 준비한 친밀한 공연 환경, 판소리 번역 자막, 소리꾼과 관객의 소통 방식 등이 판소리 공연을 즐기기에 충분한 요소들이 갖추어져 있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또 “플라멩코의 고향이 안달루시아(Andalucia-스페인 최남단 지중해에 접한 곡창지대)이듯 판소리의 고향은 전라도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그에게 판소리의 고장인 전주가 플라멩코의 본고장 안달루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비슷한 이미지의 도시로 각인되고 있는 모양이다. 특히 플라멩코는 우리에게 정열적인 춤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스페인의 가장 전통적인 성악 장르가 아니던가. 사이먼 브로튼의 이 이야기는 ‘안달루시아=전주, 플라멩코=판소리’라는 연상에서 이뤄진 듯 보인다.

그의 이야기는 판소리가 월드 뮤직 장르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이는 곧 전주세계소리축제가 걸어온 길이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사실과, 그것이 바로 ‘우리 것의 세계화’라는 명제를 실현하는 가장 빠르고도 바른 길임을 말해주고 있다.

플라멩코 같은 월드 뮤직이 될 수 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전 총감독인 곽병창 우석대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주세계소리축제가 걸어온 길은 우리 소리가 월드뮤직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음악적 독창성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소리에 대한 짧은 해설만으로도 이내 추임새를 따라하며 환호하는 외국인 청중들의 모습에서 월드 뮤직의 한 장르로 커 나갈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전통예술이 본질을 잃지 않고 당대의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축복이자 숙제인 판소리는 그 태생적 발랄함, 창작 과정의 유연함 덕분에 시대가 바뀌어도 낯선 청중들과 충분히 소통할 만한 많은 길을 그 스스로 지니고 있다. 그런 점에서 판소리가 잘 다듬어진 월드뮤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전주세계소리축제 박재천 집행위원장은 소리축제는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는 축제라고 이야기한다. 우선은 대한민국 안에서 가장 전통적인 도시가 전주이고, 소리축제의 핵심 이미지인 판소리, 한국 음악과 가장 절묘하게 조화되는 곳이라는 장점 때문이다. 그리고 판소리는 원형에 가까운 대한민국의 예술적 정수이면서 세계적인 월드뮤직과 교류하고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장르라는 점이 이미 소리축제의 가능성을 웅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세속의 수많은 요구와 ‘축제’라는 태생적 한계, 예컨대 무리한 ‘관광’이나 ‘대중화’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리고 시나브로,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맞물려 전주세계소리축제는 성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판소리의 원형을 보존하는 동시에,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 이를테면 국내외 관람객들이 즐길 수 있는 다양한 감상법이나 판소리의 전달 방법 등 차별화된 기획력과 현대인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새로운 무대 장치, 관객과의 소통 방식 등에서 운영의 묘를 발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우리 판소리가 샹송이나 칸초네, 플라멩코 못지않은, 세계인이 사랑하는 월드 뮤직으로 성장할 그날이 결코 허황한 꿈만은 아닌 것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와 판소리의 미래는 다르지 않다. 그리고 판소리는 대한민국 예술의 자부심이자 우리를 가장 우리답게 해줄 수 있는 전통문화이다. 섣부른 ‘관광 담론’의 틀에 맞춰 축제를 재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푸른 눈의 저널리스트마저 반하게 만든 판소리라면, 소리축제가 고집스럽게 걸어온 이 길이 이미 새로운 미래를 여는 발자취였다고 해고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대동문화 84호 [2014 9,10월호]

김한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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