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로 가는 막차’라는 1993년에 그려진 한희원 서양화가의 그림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검은 밤이 어둑한 들판을 물들인 속에 하늘은 별빛과 달빛으로 일렁이고, 조그마한 인가들에 막 켜진 등불들이 그리움처럼 깜박이며 스쳐 지나간다. 기차는 연이은 등불을 켜고 밤 풍경 속을 내달린다. 평화와 그리움과 설렘을 담은 추억의 기차마을이 먼데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런 그림의 화제로 김민정(55･여) 시조시인의 시가 어울리리라. 기차로는 갈 수 없는 땅 해남에서 ‘철도 시인’으로 알려진 시인을 만났다. “저는 철길 옆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철길 옆에서 시를 배웠어요. 그리고 철도 관련 시를 쓰고 앞으로도 철도로 여행 다니며 철도와 숙명을 같이 하며 살고 싶어요.”

삶과 시를 견인한 철도와 기차 곁에서

김민정 시조시인은 강원도 도계읍 심포리 철도 건널목이 태어난 곳이고 고향이다. 태백, 삼척, 정선 등 태백 탄전 지대는 철도가 생명선이다. 이곳 탄가루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면서 자란 소녀였다. 부친도 철도 공무원을 했고, 열차로 부상을 입어 건널목 간수로 근무하다가 정년을 맞았다. 소녀는 기적소리를 들으며, 철길 곁에서 문학에의 꿈을 키웠다.

시인으로 등단한 뒤 우현(宇玄) 김민정(金珉廷)은 철도 관련 시와 시조를 썼다. 시조시인으로 등단을 했는데, 기차처럼 매듭이 잘 지어진 시조였다. ‘영동선의 긴 봄날’, ‘추천역’, ‘도계역’ 등 철도 관련 시를 100편 이상 발표해 시화들을 폐선이 된 역들에 출판기념식 겸 시화전을 했다.

2009년 경의선 복선 전철이 개통될 때는 축시도 써서 발표했고, 지난 5월 4일에는 평화열차(서울역~도라산역) 개통 때는 이를 기념하는 시도 발표했다. 한국 철도공사로부터 ‘철도시인’이라는 ‘하나뿐인’,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받았다. 지난 4월에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태백 추전역에 시비가 세워졌다.

사람이 그립거든 기차를 타자

‘철도청 전속 시인’(?)이 되었다. “저는 철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인연을 가진 사람인 것 같아요. 1988년 부친의 묘소에서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많이 사무쳐서 ‘영동선의 긴 봄날’이라는 시를 20년 만에 시를 드디어 완성할 정도였어요.”

6남매의 막내였던 그는 서울에 사는 오빠 덕분에 중고등학교는 서울로 유학을 가서 ‘촌티 가득한’ 도시소녀로 지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공부 욕심이 생겨 26살에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1981년에는 《여성중앙》에서 시조 독자란을 만들어 널리 시조를 보급하는 운동을 했는데, 여기에 낸 작품이 독자란 맨 앞에 실리며 시조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경북 문경의 정석주 시인으로부터 ≪나래시조≫ 동인 활동을 권유 받아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전공으로 교직을 택했고 1985년 꿈에 그리던 시인으로 등단했다. 아름다운 ‘완도 보길도 예송리’ 해변을 노래한 시였다. 《시조문학》 창간 25주년 기념 지상백일장에서 장원에 뽑혀 등단하면서 문학소녀의 꿈이 이뤄졌다.

돌 구르는 밤의 저쪽/퍼덕이는 검은 비늘//등솔기며 머릿결에/청청히 내린 별빛

저마다 아픈 보석으로/이 한 밤을 대낀다.//낙지회 한 접시에/먼 바다가 살아오고

맥주 한 잔이면/적막도 넘치느니//물새는 벼랑에 자고/어화등(漁火燈)이 떨고 있다. -예송리 해변에서-중에서

그 해 가을엔 결혼도 하였다. 생계가 급한 상황에서 문학에 한눈을 팔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문학 활동을 잠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등단 13년 만에 시조집을 한 권 묶게 되었고, 또 그것이 계기가 되어 주로 서울의 모임인 ‘씨얼’ 동인에 가입하게 되었다.

시조를 조금씩 쓰는 한 편 다니고 싶었던 대학원 공부도 하고 싶어, 석사, 박사 과정을 하게 되었다. 또 <영동선의 긴 봄날>이란 시조집과 <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라는 수필집 때문에 시조문학진흥회와 대전역, 제천역, 청주역, 천안 아산역, 태백역 등의 철도역에서 시화 전시회와 작가 사인회 등을 하게 되었다.

설레는 봄바람이 아롱이며 피어날 때/사람이 그립거든, 그대여 기차를 타라/보고픈 마음 하나로 모든 것 용서하며

금빛햇살 타고 오는 대자연의 향연 속에/빛 부신 날개 펴고 불꽃처럼 비상할 때/믿으며 깨달아가며 가쁜 생을 껴안으며

등불 켜듯 환하게 너를 켜는 유리창 밖/초록빛 어린 왕자 그 숨결이 다가 온다/바람은 낮은 곳으로 휘파람을 불며 가고 -사람이 그립거든-

‘예송리 해변’과 같은 시를 쓰면서 호남과 인연을 맺었다. 고등학교 때 대흥사에 계시던 스님을 뵈러 와서 대흥사의 풍광에 매료되었다. 대흥사는 대흥사 대웅전, 서산대사유물관, 천불전, 대흥사 뒷산의 동백까지 참 매력적인 곳이었다. 거기다가 등단 작품인 ‘예송리 해변에서’는 보길도의 고산 윤선도가 귀양을 살면서 ‘어부사시사’를 지었던 보길도의 예송리 해변에 가보고 나서 쓴 작품이다.

대흥사 부처님께 님의 사랑을 고백하네

남편의 고향이 광주이다. 해남이 고향인 이지엽 교수, 광주 최일환 시인, 해남 용진호 시인 등과도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대흥사 그 그윽한 골짜기와 동백숲에선/사철 바람이 불어 가끔은 때묻은 머릿결도 씻겨주고/또 가끔은 옷자락 마음자락까지 펄럭여 주기도 했지./손가락 가락에도 묻어나던 물 향기, 구름 향기, 진솔 향기, 말짱한 사랑 향기./청신암 맑은 약수에다 마음을 깔아두고 부처님께 고백을 했네./“허무하고 허무하고 허무하나이다. 피고피고 또 피는 이 마음이나 지고지고 또 지는 님의 마음이.”

천불전 낡은 싸리비엔 한겨울이 쓸리네. -대흥사 부처님께 한 고백-

사랑은 언제든 진다. 그리고 사랑이 떠나버린 그 마음의 마당은 한겨울이다. 그 분분한 어지러움의 마당을 싸리비가 쓸어 가면 남는 것은 고요와 깨끗함이다. 그 소쇄한 세상은 영원히 남는다. 시인의 시세계가 그렇다.

김민정 시인의 시조 작품들은 기찻길과 사막, 그리고 움집, 화석, 유물, 유산 등 과거를 상징하는 다양한 사물들을 통해 과거의 시간을 복원하려는 갈망이 역동적으로 드러난 시를 쓰고 있다.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와 생동감을 독자에게 환기시키는 진정성을 갖고 있다.

곧 제5시조집 <백악기 붉은 기침>이 출간될 예정이다. 성균관대 문학박사, 상지대학교 대학원 강사를 역임했고, 지금은 강일중학교 부장교사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여성시조문학회 회장, 강동문인회 부회장, 한국시조시협 이사, 서울 교원문학회 이사를 맡고 있다. 한국 문인협회, 국제펜 한국본부, 여성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14년 1월부터 국방일보에 ‘가요와 현대시로 본 한국사 100년’을 연재했다. <영동선의 긴 봄날>, <사랑하고 싶던 날>, <지상의 꿈> 등이 있고, 수필집으로 <사람이 그리운 날엔 기차를 타라>가 있다. 공간 시인상, 성균 문학 우수상, 나래시조 문학상, 열린시학상, 철도시인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기차는 근대의 관문에서 출발했다. 봉건의 굴레를 벗겨냈고, 시간과 장소를 인간의 삶 속으로 끌어당겼다. 근대가 철도로 시작되었고, 영동선․호남선․전라선․장항선․경춘선․중앙선․경전선․동해남부선․택백선․경북선 등은 한국인의 삶의 동맥이었다. 눈물과 가난과 상경과 향수가 이 동맥 위로 흘러갔고, 문학도 이 물결을 기록하고 노래했다.

김민정 시조인은 앞으로 국내 철도 문학을 정리해 발표해 보고 싶다. 언젠가 경전선인 전남 보성 득량역에서 이 시인의 시화전이 열릴 지도 모른다.

대동문화 84호 [2014 9,10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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