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유배의 섬 흑산도

1. <자산어보(玆山魚譜)> 남긴 정약전

겨울 초입의 바다는 사나웠다. 한낮에도 시커먼 낯빛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고, 한바탕 갑작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당장이라도 섬을 삼킬 듯 거침없이 달려들었다가 허연 거품을 무트로 토해놓고 물러나곤 했다. 밤은 또 어떠한가. 파도는 앙가슴 깊은 곳에서 오금이 저릴 정도로 큰 소리로 울다 털썩, 맥없이 주저앉았고, 위잉~잉,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바람은 한참이나 살품을 맴돌다 눈두덩 위에 서릿발을 세워 토끼잠마저 청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섬은, 섬은…단말마였다. 손암(巽庵, 정약전 丁若銓)에게 보이는 것은 ‘절망’이라는 그늘과, 그 길지 않은 끝에 놓인 ‘죽음’ 뿐이었다.

더욱이 사철 푸르다 못해 검게 보여 이름지어진 흑산(黑山)은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여 눈물마저 멈추게 할 정도로 끔찍한 칠흑이 됐다가, 칼잠 끝에 스스로 놀라 꿈을 깨게 하는 천길 만 길 낭떠러지가 되기도 했다.

손암은 진저리를 쳤다. 스스로 순교의 길을 택한 아우 정약종(1760~1801)의 죽음을 받아들일 여유는 고사하고, 마포나루에서 헤어진 가족들, 나주 율정(栗亭)마을 주막까지 동행했다가 유배지 강진으로 떠난 아우 다산(정약용, 1762~1836)을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은 고개를 젓는 만큼 되레 확신이 되어 갈 뿐이었다.

손암은 그리움으로 몸부림쳤다. 처절하게 외로울수록 그리운 것은 오직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리움 끝에서 무릎을 꺾으려 할 때마다 힘을 지탱해준 것 역시 사람이었다. 손암에게는 가끔 배편으로 전해지는 아우 다산의 편지가 있었고, 현지 주민들의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스스로를 낮춤으로써 더 커진 이방인

유배 초기 우이도에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던 손암은 아들이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은 데다 우이도의 사정마저 나빠지자 1807년 흑산도로 자리를 옮겼다. 흑산도는 우이도에서 40㎞나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손암은 유배지 주민과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다른 양반과는 달랐다. 그는 양반 신분으로서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대신 어부들이나 일반 주민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내는 것을 즐겼다. 스스로를 더욱 낮춤으로써 커보였고, 커 보이는 만큼 현지인들에게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손암은 시간이 지나면서 저술활동과 후학 지도로 하루가 짧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 켠은 늘 공허했다. 흑산도의 삶에 익숙해져가는 만큼 알 수 없는 서글픔도 켜켜이 쌓여가는 것을 느꼈다. 바위에 구멍뚫린 구문여(구멍바위)처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으로 인해 저절로 눈물이 흐르기도 했다. 손암은 이 슬픔의 근원에 아우 다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다산이 다산초당 옆 천일각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형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손암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천 번 만 번 아우의 모습을 그렸다. 그나마 다산과의 편지 교류가 둘 사이를 잇는 유일한 끈이었다.

1814년(순조 14년) 여름, 다산은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며 ‘흑산도로 찾아와 형을 만나겠다’는 사연을 전해왔다. 마음이 급해진 손암은 아우가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찾아올 수 있는 우이도로 되돌아가기 위해 배를 타려 했다. 하지만 손암은 쉽게 마을을 떠날 수 없었다. 인품과 학식 면에서 크게 존경을 받고 있는 그를 주민들이 보내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손암은 은밀히 우이도 사람에게 배를 가지고 오게 하여 안개 낀 밤을 타 그곳으로 떠났다. 이튿날 아침, 손암이 떠난 것을 알아챈 흑산도 사람들은 배를 급히 몰아 뒤쫓아 와서 그를 다시 흑산도로 데리고 갔다. 막막해진 손암은 이곳에서 한참을 더 머물며 아우와의 슬픈 이별 과정을 주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한 후에야 겨우 우이도로 다시 갈 수 있었다.

우리나라 대표적 해양백과사전 탄생

어느 날 아침이었던가. 바닷가를 거닐며 적당히 눈이 부시게 푸른 햇빛을 즐기던 손암은 잡아 온 고기들을 분류하고 있는 어부들의 굵은 팔뚝에 시선이 갔다. 만선의 깃발이 펄럭이는 배에서 고된 노동을 즐기는 그들의 표정은 환하게 밝았고, 손과 발은 촌각이라도 아끼려는 듯 빠르게 움직였다. 가끔 제법 큰 물고기들이 한바탕 몸부림이라도 칠라 치면 어부들의 팔은 녀석들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휘청거렸고, 굵고 파란 힘줄은 날이 섰다.

그 때였다. 손암은 어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을 쓰던 물고기 한 마리가 ‘아차’ 하는 사이 작은 포말을 일으키며 검은 바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 한 발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녀석이 바다로 떨어질 때 무엇인가 반짝였다고 느낀 것은 심해를 매끄럽게 유영하기 위한 비늘의 발광이었을까. 손암은 검은 바다 속에 감춰진 비릿한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둥둥 가슴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먼 데서 담배를 피우던 마을 노인이 화들짝 놀라 뛰어왔지만 그는 바다 속에 꿈틀거리고 있을 생명들에 대한 호기심을 놓지 못했다. 그는 바다가 전하는 이야기를, 바다가 품고 있는 세계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해양백과사전인 <자산어보(玆山魚譜)>가 태어나는 계기였다. (김만선 <유배> 중)

황사영 백서사건 계기 흑산도로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이 흑산도로 유배된 것은 1801년(순조 1년), 그의 나이 43세 때였다. 손암은 정조 14년(1790년) 증광문과에 응시, 병과로 급제하고 이후 전적․병조좌랑의 관직을 역임했다. 그는 남인계의 학자로 서학에 뜻을 두어 천주교에 입교한 후 벼슬에서 물러나 선교 활동에만 힘썼으나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면서 자신은 완도 신지도로, 동생 정약용은 포항 인근의 장기현으로 유배길에 오르게 됐다.

신유박해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자 형 정약현의 사위 황사영은 탄압의 실태와 그 대책을 적은 편지를 북경에 있던 프랑스 주교에게 보냈다. 이 편지에서 황사영은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프랑스 함대를 파견해 조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러나 이 백서(帛書)가 탄로 나면서 황사영은 처형당했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이배(移配)된다.

제주도, 거제도와 함께 조선의 3대 유배지로 일컬어지는 흑산도. 손암은 <자산어보> 서문에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집안 사람들의 편지에는 흑산을 번번이 자산이라 쓰고 있었다. 자(玆)는 흑(黑)자와 같다.’(<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 18쪽, 1998 신안군 발간)라며 유배지 흑산에 대한 두려움을 적었다.

조선시대에는 현 우이도가 소흑산도라 불리면서 흑산도와 같은 권역이었다. 이로 인해 유배인들이 두 섬을 오가며 생활하는 것이 허용됐다고 한다. 손암은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며 무려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유배인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한다.

2. 정약전이 만난 사람들

손암이 <자산어보>를 집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현지인들이었다. 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현장에서 일일이 어부들이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보면서 확인해야 했고, 무엇보다 그 지역 토박이들에게 물고기의 습성이나 생태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손암은 마을 사람들과 술을 함께 마시는 등 스스럼 없이 어울려 지냈으며, 때때로 어부들을 따라 고깃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손암은 실제로 “섬 사람 말에 의하면 ‘이 물고기는 건륭경오(乾隆庚午, 1750년)에 성어기를 맞이했으나…그런데 병인년 이후에는 매년 줄어들어 최근에는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그 이치를 알 수가 없다”(鱗類-碧紋魚:고등어, <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 35쪽, 1998 신안군 발간)처럼 책의 여러 곳에서 현지인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자산어보> 완성에 도움 준 장창대

손암이 현지인 가운데 비중있게 직접 거론한 이는 장창대(張昌大)라는 인물이다. 손암은 <자산어보> 서문에 장창대에 대해 직접 언급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즉 창대(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 두문불출하고 손을 거절하면서까지 열심히 고서를 탐독하고 있었다. 다만 집안이 가난하여 책이 많지 못하였으므로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건만 보고 듣는 것은 넓지가 못했다. 하나 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조(草島)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분을 맞아 함께 묵으면서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 이리하여 조사한 자료를 차례로 엮었다….’(<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 18쪽, 1998 신안군 발간)

손암은 장창대라는 인물이 한 이야기를 신중히 받아들여 <자산어보>에 ‘昌大曰…’이라는 표현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동아시아 해양세계 기록 담은 <표해시말>

손암이 만난 사람 중 눈길을 끄는 사람은 문순득(1777~1847)이다.

문순득은 우이도에 살던 평범한 상인이었다. 그는 우이도가 지닌 지리적 특성을 활용해 보다 먼 흑산도권에서 홍어와 같은 현지 특산품을 구입해 영산포 등 영산강 내륙을 오가며 팔던 일종의 중개무역을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25살 때인 1801년 12월에 흑산도 근해에서 홍어를 사가지고 돌아오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를 경험하게 됐다. 표류 후 처음 도착한 곳은 일본이었고 이후 중국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또 풍랑을 만나 필리핀에 도착했다. 그는 또다시 중국 지역의 마카오로 이동했고, 중국 베이징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가 1805년 1월 8일 우이도로 귀향하기까지는 무려 3년 2개월이 소요됐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문순득을 반긴 이는 유배 중이었던 손암이었다. 손암은 문순득에게 ‘개국 이래 처음’으로 먼 나라를 떠돌다 왔다는 뜻으로 ‘천초(天初)’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글을 몰랐던 문순득의 체험담을 듣고 <표해시말(漂海始末)>이라는 기록을 남겨두었다. <표해시말>은 이후 다산의 제자 이강회를 통해 <유암총서(柳菴叢書)>라는 문집에 실리게 된다.

<표해시말>은 관리가 아닌 일반 백성의 눈으로 당시 동아시아 각국의 문물과 언어, 선박 제조 기술 등을 상세하게 적은 최초의 기록이다. 19세기 서남해 도서 해양문화 특징을 살필 수 있는 동시에 표류를 통해 습득한 동아시아 해양세계에 대한 인식이 담겨져 있는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 진리선착장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문순득 동상이다. 커다란 노를 한 손에 들고 먼 바다를 응시하는 모습이 바다를 건너는 모든 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듯 하다. 진리마을에는 문순득의 생가(전남도 문화재 자료 제275호)가 남아있는데 안내문에는 <표해시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 있어 도움을 준다.

평생의 벗이자 정신적 지주 ‘다산’손암이 만난 사람 중 절대적으로 의지한 이는 역시 아우 다산이었다.

손암과 다산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생을 신뢰하는 벗이자 정신적 지주로 서로를 믿고 의지했다. 비록 직접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손암은 다산의 편지를 통해 유배지에서 겪은 슬픔과 고통을 학문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이는 다산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도 두 사람은 학문을 논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바 있었다. 차례로 벼슬에 나아가 함께 관리 생활을 하며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의 켜를 쌓은 것도 여러 차례였다.

형제의 돈독한 정은 유배지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다산은 육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형을 염려해 개고기를 먹을 것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내고, <자산어보>를 저술할 무렵에는 그림보다 글로 쓰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형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우이도로 갔다가 흑산도 사람들에 의해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는 사연을 들은 다산은 “요즘 세상에 그 고을 수령이 서울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고을에 올 때는 백성들이 모두 길을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말은 들었거니와 귀양살이 하는 사람이 다른 섬으로 옮겨가려하자 본도(本島)의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정약용 ‘다산시문집’ 제21권)며 형의 덕망이 큼을 언급하기도 했다.

3. 우이도와 흑산도에 남은 정약전 발자취

손암은 15년동안 유배 생활을 보내다 1816년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손암은 유배기간 동안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갔기 때문에 두 섬에 발자취가 일부 남아있다.

우이도는 돈목해수욕장을 사이에 두고 돌출한 도리산과 소래산이 소의 귀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진리는 전체 넓이 10.7㎢, 해안선 길이 21㎞에 이르는 우이도에서 가장 큰 마을이자 행정 중심지다. 옛날에 흑산진 산하 수군이 주둔하던 우이보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흔적 없는 적거지와 서당터

진리마을은 손암이 유배생활을 하다 숨진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포구에서 진리마을로 들어가는 길 왼편에는 우리나라 선창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는 '진리 옛 선창'(전남도 기념물 243호)이 있다. 길이 63.3m, 폭 1.6m, 높이 2~3m의 규모로 선창을 둘러싼 방파제는 조선 숙종 때 축조됐다고 한다. 선창 한복판에는 계주석(벼리목)을 세워 배를 묶어둘 수 있도록 했다.

마을 입구의 이정표에는 ‘손암 정약전 적거지 600m, 문순득 생가 155m’라는 글이 보인다. 손암의 적거지와 문순득 생가의 거리가 멀지 않았던 만큼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자주 만나 표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표류기에 호기심을 느낀 손암은 밤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문순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글을 써내려갔을 지도 모른다.진리마을에서 돈목마을로 넘어가는 산길 초입 ‘서당골’이라는 곳에서는 서당을 열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는 ‘손암 정약전 유배 적거지’와 ‘정약전 서당터’라는 알림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고 서면 손암의 당시 생활모습이나 열정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그려진다.

손암의 숨결 느껴지는 복성재

흑산도는 우이도와 달리 손암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당시에 같은 흑산도로 불리운 섬이었다고 하지만 지금도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는 정기 배편이 없는 것을 감안하면 누구나 쉽게 오갈 수는 없는 거리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일부 유배인들은 거친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기도 했던 시기였다.

흑산도 사리마을은 일명 ‘모래미 마을’로 불리는 곳으로 지난 2012년 유배문화공원을 조성해 유배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사리마을 유적지의 대표적인 장소가 손암이 생활한 복성재(復性齋)다. 복성재는 ‘사람 됨됨이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그가 후학양성을 위해 만든 사촌서당(沙邨書堂)이 자리하고 있다. 복성재가 곧 사촌서당인 셈인데 다산은 손암이 서당을 차렸을 때 ‘사촌서당기’라는 글을 지어서 보내기도 했다. 사촌서당을 마주하노라면 손암의 가르침을 받아 큰 소리로 서책을 외우는 학동들의 해맑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복성재 아래 쪽에 천주교 사리 공소가 있다. 천주교 박해 사건으로 유배를 온 손암의 서당 앞에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우연인 듯, 필연인 듯 묘한 여운을 남긴다. 공소 앞에는 우물이 있다. 손암이 길어 먹은 우물로 추정되는 곳이다. 자연 지식이 해박했던 손암이 판 우물이라서인지 산 중턱에 있음에도 아직껏 마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인근에 조성된 유배 공원에서는 손암의 기념비와 자산어보에 기록된 다양한 어류들을 소개하고 있다. 잠시 지친 발걸음을 쉬어갈 수 있는 손암정(巽庵亭)도 있다.

유배자의 심정을 느껴보고 싶다면 하룻밤 묵어갈 수도 있다. 공원 내에 ‘위리안치’ ‘절도안치’ 등의 이름을 내건 21세기형(?) 유배 숙박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

또 예리마을 흑산항에는 손암을 기념하기 위한 자산문화관이 있다. 손암과 관련된 자료를 한 데 모아 한 눈에 살필 수 있도록 했으며 사촌서당을 축소한 전시물도 포함됐다. 흑산도에서 옛 조상들이 사용하던 도구와 도서관은 2층에 자리잡았다.

4. <자산어보> 속의 홍어

손암이 흑산도에서 거주하던 1814년에 완성한 <자산어보(玆山魚譜)>는 3권 1책으로 구성돼 있다.

<玆山魚譜>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玆’은 ‘자’와 ‘현’ 두 음으로 읽히지만 ‘검다’는 뜻으로 쓸 때는 ‘현’이 맞는 표현으로,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유배지 ‘흑산’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으스스’하여 그것을 달리 표현한 것이기에 당연히 ‘현산’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손암은 책에서 우선 비늘의 유무를 기준으로 인류(鱗類)와 무린류(無鱗類)로 나누고 갑각류인 개류와 기타의 해양동식물을 포괄해 잡류의 4류로 크게 분류했다. 이어 이들의 하위 범주로서 인류에는 20류, 무린류에는 19류, 개류에는 12류, 잡류에는 4류 등 모두 55류를 배속했다. 그리고 이들의 하위 범주로서 다시 비슷한 종끼리 묶어 각각 72종, 43종, 66종, 45종 등 모두 226종으로 세분했다. 이런 체계적인 분류는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을 계승한 것이지만 잡류에서 바다 벌레와 바다나물 등 당시 물고기로 분류되지 않아 거의 언급되지 않던 해양 식물까지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종합적인 해양생물저술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독창성이 두드러진다고 평가된다.

손암은 어류를 비롯한 해양 생물에 대한 소개를 함에 있어 외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정확하게 기술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정보로서 크기, 형태, 색, 그리고 맛에 유의하였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생물의 내부형태와 의학적 효용까지도 관심을 갖고 기술하기도 했다. 이용(利用)과 치병(治病)은 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동기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산어보>에서 홍어는 2권 ‘무린류(無鱗類)’편의 첫 번째에 ‘분어(鱝魚)’로 기술하고 있다. <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1998 신안군 발간)에서 홍어 관련 내용(69~70쪽)을 소개한다.

무린류(無鱗類)’편 첫 번째 ‘분어(鱝魚)’

외모는 연꽃의 잎사귀(荷葉)를 닮았으며 体色(체색)은 검고 붉은색이다. 코는 머리 부분에 있고 입은 코 밑에 있고 머리와 배 사이에는 一字形(直口)으로 생긴 입이 있다. 꼬리는 돼지꼬리를 닮았으며, 꼬리의 중심부에는 날카로운 가시가 있다. 큰 것은 넓이가 6~7자 정도나 되고, 수컷은 암컷보다 작다. 수컷에는 흰 칼 모양으로 생긴 양경(陽莖)이 있으며 양경 밑에는 알주머니가 있다. 두 개의 날개(가슴지느러미)에는 가느다란 가시가 있는데 암놈과 교미를 할 때에는 그 가시를 박고 교미를 한다.

암컷이 낚시바늘을 물고 발버둥 칠 때 수컷이 이에 붙어서 교미를 하게 되면 암수 다 같이 낚시줄에 의해서 끌려 올라오는 예가 있는데, 암컷은 낚시에 걸렸기 때문에 결국 죽고 수컷은 간음 때문에 죽는다고 흔히 말하는 바, 이는 음(淫)을 탐내는 자의 본보기라고도 한다. 암컷은 알은 낳는 구멍(産門) 외에 또 하나이 구멍에 있는데 체내에서는 세 구멍과 통하게 되어 있다. 그 중 가운데 구멍은 장의 양쪽으로 통하면서 태를 형성하고 있다.

태 위에는 알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알이 없어지면 그 자리에서 태(胎)가 형성되어 4~5마리의 새끼를 분만한다(胎生魚). 상어도 홍어와 같이 새끼를 낳는 구멍 외에 속에는 세 개의 구멍이 있다. 어기(漁期)는 동지(冬至) 후부터 시작되나, 맛은 입춘(立春) 전후 때가 가장 좋고, 2~4월에 되면 맛이 떨어진다.

鱠(회 회 :肉腥細切), 灸(구을 구 :怐也), 羹(국 갱), 腊(포 석 :乾肉)이란 말과 같이 회로 먹으나, 구어서 먹으나 국을 끓여 먹거나 또는, 포로도 먹을 수 있다. 나주 가까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은 즐겨 썩힌 홍어를 먹는데 지방에 따라 기호가 다르다. 홍어국은 배에 복결병(腹結病)이 있는 사람에게 효과가 있고, 주기(酒氣)를 없애주는 데도 효과가 있다. 그리고 뱀은 홍어를 기피하기 때문에 홍어의 비린 물을 버린 곳에는 뱀이 가까이 오지 않으며, 뱀에 물린 자리에 홍어의 껍질을 붙이면 잘 낫는다.

正字通(정자통)에 의하면 홍어의 모양은 카다란 연입(荷葉)과 같고 꼬리가 길며 마디가 나와 있어 사람을 찌를 수 있다. 그리고 입은 배 밑에 있고 눈은 머리 위에 있다고 했다. 本草綱目에서는 홍어를 태양어(邰陽魚), 하어(荷魚), 분어(鱝魚), 포비어, 번답어(蕃蹹魚), 또는 석려(石礪)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식감(食鑑)에서는 소양(少陽)이라 했다. 이시진(李時珍)은 홍어의 모양 盤(소반반)과 荷葉을 닮았고, 큰 것은 둘레가 7~8자 되고, 비늘은 없으나 살속에 연한 뼈가 있는데 먹을 수 있다고 했다. 東醫寶鑑(동의보감)에는 홍어(䱋魚)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새끼물고기의 호칭이라 아마 음(音)이 홍(拱)인 점에서 잘못 기록된 것 같다.

공동 유산으로 남기고자 한 <자산어보>

손암은 <자산어보> 서문 마지막에 저술의 동기를 밝히고 있다.

‘후세의 선비가 수윤(修潤)하게 되면 이 책은 치병(治病)․이용(利用)․이치(理致)를 따지는 집안에 있어서는 말할 나위로 없이 물음에 답하는 자료가 되리라. 그리고 또한 시인(詩人)들도 이들에 의해서 이제까지 미치지 못한 점을 알고 부르게 되는 등 널리 활용되기를 바랄 뿐이다.’(<손암 정약전 선생의 자산어보> 18쪽, 1998 신안군 발간)

다산이 ‘학문의 성과를 시대에 알맞게 하라(무적시의, 務適時宜)’고 강조했다면, 손암은 <자산어보> 서문에 ‘(책을) 더욱 갈고 닦아 빛내줄 것’을 당부했다. 자신의 저작을 개인의 창작물이 아닌 공동의 유산으로 남기고자 했던 뜻을 전한 것이다.

손암은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키 큰 자유인이었고, 자신의 지식을 집대성함으로써 더욱 빛이 났다. 주목할만한 점은 지금도 흑산도 주민들은 손암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흑산도는 아직까지 손암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대동문화 85호 [2014 11,12월호]

김만선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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