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광주에 없다. 고향 구례에도 없다. 중국 흑룡강성에 산다. 그래서 일흔을 넘기고도 여전히 청년미술가처럼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는 그의 작품은 보는 것이 아닌, 읽기란 더더욱 어렵다. 자주 올 수도 없으니 필자 역시 딱 한번 만난 것이 전부다. 올 7월엔 그가 70년만에 고향에서 전시를 열었는데 그때 그의 딸을 만났을 뿐이다. 정작 그보다는 딸을 더 많이 본 셈이다.

구례출신 재중 교포화가 이건의 화백(흑룡강성 가목사대학 미술학원 객좌교수)에 관한 이야기다. 올해 일흔 다섯에 접어든 노 화백은 붓을 놓고 쉴 수도 있으련만 여전히 청년화가로 고향을 그리워하며 붓을 놀린다. 고립되고 단절된 공간과 마음, 그리고 정신을 달래는 치유제와 같을 것이다.

지역에서 지역만 보고 살다보니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이건의라고 하는 화가를 알게 된 것이 지난해 1월이었으니까 그를 인식한 지 채 2년도 안된다. 어느 날 백발이 성성한 화가 한 분과 갑작스럽게 대면하게 되고, 몇 줄의 글로 그를 포장해냈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그때 그는 회사로 찾아온 걸로 기억한다.

말끔하면서도 체구가 작은 이 노신사가 이건의 화백이었다. 2012년부터 1년여동안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난해 고향에 올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제게 그렇게 왔다. 그래서 그의 젊은 시간들과 대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그의 삶을 통해 그의 삶 전부를 유추해내야 한다. 여기서는 고집스럽게 삶과 그림을 지치지 않고 밀당해왔을 그의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둘째딸 이연옥씨에 따르면 실제 그는 가목사대학과 화실, 집을 오갈 뿐이라고 한다. 그는 결코 미술에의 열정을 거둬들이지 않을 듯 싶다.

이건의라고 하는 노화가를 만나려는 것은 예술의 출발이 어디일까를 규명해보기 위한 무모한 시도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본다.

우리들 삶에서 방부처리가 되지 않고 날 것 그대로 꿈틀대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고향이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 삐쩍 야위어가는 감성의 가장 위태로운 자리에 놓여있는 그 그리움이 그의 화폭을 뒤덮고 있다는 이야기다.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그는 갈수록 흐릿해져가는 고향 가족들을 매일 머릿속에 그려넣으면서 이주민으로서 타향살이를 꾸려 왔을 것이다. 그 세밀하게 그려넣었던 기억 속 가족을 다시 펼쳐들 듯 그의 화면은 굉장히 세밀하다. 이를 ‘추지법’ 혹은 ‘타인법’이라고 부른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것이 흐릿해져가고, 흐릿해질까봐 모든 삶이 늘 선명해지기를 기도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사는 곳은 눈이 많이 오고 영하 40도까지 내려갈 정도로 춥다. 하필이면 눈으로 인해 대지의 윤곽들이 스스로 선명한 선을 지우고 있는 밤에도 그는 화폭에 삶이 쓰러지지 말라고 세밀한 선을 세우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부적과도 같은 그림들을 구경할 수 있었던 호사를 누린 것은 행운이다. 올 7월19일부터 8월17일까지 광주시립미술관 상록전시관에서 수채화를 포함한 90여점의 작품이 관객들을 만났었다.

그때 여러 작품이 발길을 붙잡았다. 이중 ‘금강산 만물상 가을’(2014년 作)은 그를 모두 응축해 보여줬다.

한결같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기암절벽들이 마치 하늘의 종기를 떠뜨리기라도 하는 듯 서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작 자신의 전시에는 방문 승인이 나지 않아 오지 못해 대단히 아쉬웠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했으니 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형벌과 같은 것이다.

맞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것이.

하지만 그 작품을 말하는 것은 그다. 그가 ‘금강산 만물상 가을’에 대해 말할 때 가장 자연스럽다. 포장하지 않고 맨살 그대로 말이다.

또 다른 작품 하나. 토지(1997년 作). 토지하면 평평한 들판을 먼저 떠올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평평한 토지가 아니다. 언덕지고 구불구불한 논두렁이 있는 들판이다. 마치 논두렁이 언덕들을 떠받들고 있는 듯한 형국하다.

흑룡강성으로 추정되는 외딴 곳의 집 한 채, 그리고 소를 끌고 가는 농부가 등장한다. 산세가 가파르다 보니 산으로 오르던 산길이 헉헉 숨이 막혔는지 산 속으로 숨는다. 길들은 구불구불 삶이 급하더라도 돌아가라고 타이른다.

산들은 고집스럽지 않다는 느낌이다. 다시 숨은 길을 끄집어 당기면 스르르 미끄러져 나올 듯하다.

이런 작품 스타일에 대해 중국국가화원 루위순 상무부국장은 “화폭에는 생기가 충만하며 소박해보이나 장중한 느낌의 아름답고 새로운 화풍을 만들었다”고 평했다 한다.

이 세밀한 기법이 산수들에 생기를 불어넣는 이 화백만의 자산인 셈이다.

앞서 말했듯 그는 이국의 설움이나 쓸쓸함, 외로움, 그리움의 종기들을 붓으로 다스려왔다.

그림이 지난한 삶이 됐고, 삶이 그림이 된 셈이다.

여기다 그는 민족을 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5세때 구례를 떠나 한국 전쟁 직후 평안남도 남포시에 2년간 거주하며 조선국적을 취득했다. 그 국적을 버리지 않았다. 중국에 귀화하지 않고 오로지 몸은 중국땅에 있지만 조선사람으로 살았다. 그가 전시에 오지 못한 이유도 조선국적이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올 수도, 못 올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하필 전시 땐 정권의 입맛이 까다로웠던 때로 기억한다. 허가를 받아야 고향땅을 밟을 수 있으니 그의 그림은 단순하게 그림만이 아니다. 중국에 거주하는 교포들의 이야기이자 분단된 한민족의 슬픈 자화상인 것이다.

그는 노구다. 다시 고국땅을 언제 밟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기적이 일어나거나 권력이 바뀌거나 하면 더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들고 올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청년의 냄새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대동문화 85호 [2014 11,12월호]

고선주 광남일보 문화부장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