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쉽게 길을 열지 않았다. 는개인 듯, 박무인 듯, 흐릿했던 시야는 화순 너릿재를 넘어서면서부터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아득해졌다. 희부옇게 잡히던 동살도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가 헤살부리듯 잠시 고개를 내밀뿐이었다. 관성에 따라 적정한 속도를 내던 평소와 다르게 수차례 제동기를 밟고 핸들을 조작하고서야 한 걸음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막연하게 어떤 기척을 느낀 이후부터 차는 무엇엔가 이끌리듯 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낮게 엎드려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는 그 자리에 묵연히 있었던 것일까. 한 번 품에 안은 그는 자신의 속살을 거리낌 없이 내보였다.

어느새 하늘은 투명한 햇살을 내비치고 있었고 안개는 산 중턱에서 시나브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문림의향(文林義鄕)의 고장 장흥이다. 장흥은 한국 문학의 산실. 가사문학의 효시 관서별곡을 지은 기봉 백광홍(1522~1556)에서부터 존재 위백규(1727~1798), 이청준(1939~2008), 한승원, 송기숙, 이승우 등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문인들을 배출했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안양면 율산마을에 위치한 해산토굴(海山土窟). 바다의 삶을 감동과 시흥으로 표현한 한승원 작가의 집필실이다. 작가는 자신의 호 ‘해산’에 거처를 낮춰 부르는 ‘토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약되지 않은 방문이 작가의 창작을 방해할 수 있으니 발소리를 낮추는 것은 기본 예절.

해산토굴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 여닫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자신을 키운 것은 9할이 바다였다’고 할 정도로 창작을 위한 상상력의 원천이 됐던 대상이기도 하다.

여닫이 바다를 찾으면 해변을 따라 ‘한승원 문학 산책로’가 600m 가량 조성돼 있다. 이곳에는 시비 30개가 20m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데, 작가가 바다에서 퍼올린 삶과 희망의 노래가 담겨 있다.

여닫이 바다를 지나서 천관문학관으로 간다. 장흥 출신 문인 84점의 자료와 작품이 전시돼 있는 곳이다. 전시실에서는 시화전 등 각종 전시행사가 잇따라 열리고, 2전시실에는 지역 출신 문인들을 소개하는 공간으로 꾸며졌다.

‘소설을 쓰려면 모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데 가장 육화되기 쉬운 친밀한 세계는 어머니, 고향이라 한다. 어머니는 <눈길>, 어머니의 확대판인 고향은 <서편제>로 형상화했다’(이청준)

‘왜 사느냐와 어떻게 살 것인가의 균형이 맞아야 한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간다. 바다는 조화의 극치이다. 우리 삶도 그래야 한다. 소설 또한 그러한 조화의 극치여야 한다’(한승원)

작가의 작품세계 등을 읽다보면 오랫동안 되새길 수 있는 소설 한 편을 읽고 난 듯 머리가 맑아진다.

문학관에서 지역민들이 쌓은 돌탑 460여 개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국내 최초의 문학공원인 천관산 문학공원이 보인다.

공원 탑산사 주차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지난 2001년 8월 8일 조성된 문탑(文塔)이다. 높이 15m, 폭 9m의 석탑으로 국내 유명 문인 39명의 작품과 육필 원고, 연보를 캡슐로 제작해 보관하고 있다. 문탑 아래 위치한 문학공원에는 문탑에 보관된 문인들의 육필 원고 중 대표작품 54개를 선정, 천관산의 자연석에 새겨 넣은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하늘과 땅이 아득하여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제일 먼저 보고 싶은 것의 하나가 이청준씨 소설이오.’(김윤식 문학평론가)

회진면 진목마을에는 한국문학의 거목인 이청준 작가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작가가 유년기를 보내며 문학적 자양분을 키웠던 곳으로, 장흥군이 지난 2004년 매입해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생가 내에는 작가가 생전에 사용했던 필기구와 생활도구,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작가가 생가에 대해 갖는 애틋함은 1977년 탈고한 <눈길>에서 집을 판 어머니가 고개를 떨구고 눈길을 걸으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여기서 멀지 않은 산저마을 바닷가에는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화한 ‘천년학' 세트장이 있다. 고즈넉한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세트장은 건물만 남아 있지만 영화를 본 사람에게는 눈이 먼 송화와 동호의 애틋한 만남을 되살려보는 계기가 된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세트장 앞으로 넓게 펼쳐진 선학동 관음봉의 산자락이다. 관음봉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 마리 학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는 듯한 모습인데 현장을 찾은 날은 안개로 인해 흐릿한 형체만 보여 아쉬움을 남겼다.

지난 2008년 7월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이청준 작가의 묘소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회진면 진목리 갯나들에 위치한 묘역 앞에는 ‘이청준 문학자리’가 꾸며졌는데 작가의 2주기인 2010년에 동료 문인과 지인, 독자들의 성금으로 조성됐다.

“자네들 내가 간 뒤라도 혹시 다른 자리 알아보지 말고, 내가 살던 집 옆, 저어기 바다가 멀리 바라보이는 이 자리를 영원히 묵을 곳으로 잡아주게나.…아사람들이 먹고 살라고 애쓰는디, 나 때문에 폐가 될까 두렵네.”

문학자리에는 작가가 생전에 직접 그렸다는 ‘장흥문학지도’가 새겨져 있다. 천관산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영화 <축제> 촬영지가 있고, 노력항 인근에는 한승원 작가의 생가도 보인다. 소설가 송기숙 작가, 이대흠 시인의 생가도 보인다.

이밖에 600년간 장흥 위씨가 살아온 집성촌 방촌마을과 방촌유물전시관, 가사문학의 효시인 백광홍 선생을 비롯한 팔문장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808년 창건된 기양사, 우리나라에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정착된 천년고찰 보림사 등도 들러볼만하다.

한우와 버섯, 키조개가 어우러진 삼합과 매생이탕, 바지락회, 석화(굴)구이 등 장흥의 대표 음식은 굳이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놓칠 수 없는 먹거리다.

대동문화 86호 [2015 1,2월호]

김만선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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