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의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가난을 좋아할 리 없다. 육이오 전쟁 기간 잠시 피난해온 서정주 시인이 무등산을 보며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모두에게 벗어나야할 굴레와 같다.

인류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한 역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절대빈곤층과 사회적 약자들을 제외하고 오늘날의 가난이 대부분 상대적인 박탈감과 소외감에서 오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난하다고 느끼는 것은 다분히 ‘남의 떡이 크게 보인’ 결과이다. 스스로가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자일 수록 제가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마음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크다. 남들보다 덜 가졌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부른 가난에 시달리는 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러한 우리들의 심층에 자리한 동물적 욕망의 배금주의와 물질주의가 당당하게 그 번들거리는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면 지나친 진단일까. 몇 해 전에 크게 히트를 친 바 있는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는 이러한 우리들의 심리구조를 정확히 꿰뚫어본 광고였다.

그리고 우리가 그 광고를 대할 때마다 다가왔던 왠지 모를 거부감이나 불편함은 너나없이 부자 되기를 소망하는 우리들 내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는데서 왔다. 제 아무리 노력해도 쉽사리 부자가 될 수 없는 사회 속에서 부자 되는 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묵시록적 메시지를 강요(?)당한 듯한 느낌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자가 되면 꽃향기 가득한 날들이 이어질까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정말 부자가 된다면 모든 생의 고민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대신 꽃향기 가득한 날들이 계속될 것인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일련의 경제적 수치나 지표로 구분하고 판가름하는 사회 속에서 우린 그에 대한 질문을 놓쳐왔다.

그리고 여전히 모두가 그토록 부자 되기를 소망하면서도 정작 우린 과연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보람된 삶인지 묻지 못하고 있다. 그저 남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사는 것이 유일한 가치이자 덕목이 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가난은 우리에게 그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취급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가난함과 부유함 사이엔 절대적인 기준이나 정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파트 크기나 재산 소유 여부 등으로 가르곤 하는 빈부의 차이는 한 사회가 제공하거나 강요하는 척도에 지나지 않는다. 누가 더 잘 살고 못 사는가를 가늠하는 그러한 기준치들은 지극히 상대적이고 표면적인 것일 뿐이다. 모든 것을 양적이고 물질적으로 환원하려는 근대사회의 천박성과 추악함의 단면을 들어낼 뿐이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열악한 조건에 놓여있는 자들이 더 만족한 생활을 엮어 나갈 수 있는 것은 단지 그들이 자신들의 욕심을 줄이거나 생활의 절제를 통한 자기만족 때문이 아니다. 주어진 것들에 자족하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가난과 부유에 대한 의미 구성. 곧 가난함과 부유함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우리가 지극히 불행하거나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잘 살아보세’라고 외치며 숨 가쁘게 달려온 살아오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그것들이다. 예컨대 우린 지난 세월 동안 가난함에도 그 속에 끈끈하게 흐르는 가족애와 서로에 대한 연민과 유대감 같은, 결코 돈이나 경제적 지표로 환원할 수 없는 것들의 가치에 주목하지 못했다. 어찌 그뿐인가. 우린 또한 인간 내면의 원초적인 결핍감에서 오는 삶의 서글픔과 아픔, 그리움과 쓸쓸함 등의 감정들 속에 들어있는 진정한 소통과 교류에 대한 열망을 애써 간과해왔다.

뭐든지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파시즘적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오는 동안 우린 돈과 물질의 신이 지배하기 이전의 우리들 마음의 세계. 서로 아끼고 보살펴주고, 함께 아파하거나 기뻐할 수 있는 천진(天眞)의 마음의 상실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 했다.

극복해야 할 것은 탐욕과 욕망에서 비롯한 가난

생전에 무등산을 1천 번 이상 오르며 지난 해 작고 직전 <무등산>이라는 시집을 상재했던 범대순 시인은 역시 무등산을 대상으로 한 시 <큰 바위의 꿈>에서 “남자가 남자에게 반하는 것은/거기 의로움이 있고/여자가 여자에 반하는 것은/거기 외로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린 표피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인간관계나 인맥관리가 중요하게 취급되는 사회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반하게 만드는 ‘의로움’과 ‘외로움’과 같은 미덕에 주목하지 못했다. 양적 성장의 신화와 자본주의적 소유양식에 사로잡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한 인간이 지닌 무한의 가치에 대해 고려하지 못했다.

그런 만큼 우리가 정작 두려워하고 극복해야 할 것은 물질적인 가난만이 아니다. 이미 충분히 소유하고 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채 더 많은 것을 갖거나 빼앗으려는 탐욕과 욕망에서 비롯하는 가난이다. 가난할 줄 모른 채 끊임없이 결핍감에 괴로워하거나 알 수 없는 생의 허기에 불안해하는 자들이 느끼는 가난.

우리 시대의 가난함을 그 자체로 인식하고 못하는 데서 오는 근본적인 가난함이다. 부의 소유 여부와 관계없이 가장 가난한 자는 다름 아닌 가난할 줄 모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한 무지와 몽매이다.

가난은 그렇듯 단지 물질적인 가난의 차원에 한정되지 않는다. ‘세월호 사태’ 같은 악마적 대재난 속에서 위기를 위기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난. 평소 이기적인 삶을 살다가도 이웃과 사회의 불행 앞에서 어김없이 발현되곤 했던 연민 또는 신성의 경험을 할 수 없는 무디어진 감각들이 역시 가난이다.

우매와 맹신, 불신과 적대가 지배하는 오늘의 세계에 대한 자기 절제와 자기 성찰의 부재에서 시작되는 끝없는 허기와 결핍. 도대체 만족할 줄 모르는 욕망의 추구 과정에서 잃어버린, 보다 높고 깊은 인간적 가치와 자유에 응답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에 대한 망각에서 오는 정신적 가난이 더 큰 가난일 수 있다.

백석 시인은 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를 통해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내린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적 진술은 얼핏 그가 매우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눈으로 볼 때 시대착오적이거나 지극히 낭만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지금 오늘밤에 내리는 눈이 마치 ‘나’의 사랑의 힘 때문에 내린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상력 자체를 상실해버린 것은 아닐까.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풍요 속의 가난 속에서 마음과 세계가 확실히 분리되지 않은 이러한 천진한 마법적 세계관이 주는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을 너무도 오래 망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남다른 자부심과 자존감을 갖고 살아가는 광주시민으로서 우리가 무등산에서 새해를 맞으며 소망하고 다짐할 것은 무작정 부자 되기일 수가 없다. 스스로를 지탱할 근거마저 상실한 ‘세계의 밤’의 시대 속에서 ‘갈매빛’처럼 투명하고 맑은 무등의 겨울 하늘을 바라보며 우리 시대의 궁핍함과 피폐함을 가장 본질적으로 가장 내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자발적 가난. 눈 깜짝할 새보다 더 짧게 살다가는 불꽃같은 삶의 소중한 깨달음 또는 새로운 전망의 시간성을 마중하거나 창조해내는 사심 없고 편견 없는 마음의 가난의 회복이다.

진정한 풍요는 꾸밈없고 순수한 마음의 가난에서 시작되며, 그 가난이야말로 그새 잃어버린 자기 존재의 수준을 높여주는 활력 또는 자기 초월력을 되돌려 주는 근원중의 근원이라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동문화 86호 [2015 1,2월호]

임동확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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