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에 전시회 때문에 런던에 간적이 있었다.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한국문화원 미술관에서 초대한 전시회였는데 가까운 곳에 세계적인 미술관인 내셔널 미술관이 있어 마음껏 명작을 볼 수 있었다. 영국은 대영제국 시절에 수집한 유물이 많아 국가에서 운영하는 미술관은 관람료가 없어 위대한 명작을 거저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미술관 앞 광장에는 이름 없는 예술가들이 모여 공연을 보여주고 자신의 예술을 자유스럽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런던의 거리는 오래묵은 세월의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어 처음 와본 거리인데도 낯설지 않고 따뜻했다. 마치 언젠가 한 번쯤 왔던 어느 거리를 걷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리를 걷는 내내 가슴 속에 따뜻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는 이 느낌, 런던의 거리를 걸으면 가슴에 담았던 오래된 기억들이 퍼즐처럼 맞춰져 마음 속의 잃어버린 그리움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동네를 조금만 걸어가도 수백년이 넘은 나무 숲과 공원이 있어 마음에 안식을 주었다. 몇 백년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의 이끼들 그리고 거리 사이의 낡은 커피숍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의 눈매가 런던의 거리처럼 깊고 그윽했다.

추억이 사라지면 다가오는 역사도 사라진다

런던에 있으면서 광주를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광주는 새로운 도시로 팽창하면서 나무는 잘려 나가고 언덕은 파헤쳐져서 오래된 신화가 묻어있는 골목과 건물이 사라졌다. 지나간 추억이 사라지는 것은 앞으로 다가오는 역사도 함께 사라지는 것이다. 나중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사라진 뒤일 것이다. 나는 가을로 젖어있는 광주의 도심을 가로지르던 폐선 길을 따라 걸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같았던 집들과 낡은 건물과 철로는 재정비되어 숲이 우거진 푸른 길이 조성되었다.

나무 숲을 따라 강변을 걷는 기분으로 푸른 길을 걷는 동안 잠깐씩 추억에 빠져들었다. 아, 이곳은 태봉산이 있었지. 그리고 여기는 경양방죽이 있었고, 옛 광주상고가 있던 계림동도 떠올리고 산수동, 농장다리, 조대 앞, 서민들의 애환과 모든 이별과 만남이 묻어있는 남광주역사, 그리고 양림동과 방림동을 가로질러 갔던 옛 철길을 따라 걸으며 수많은 별빛과 같은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초등학교시절 양림동 철길 바로 옆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학교를 파한 후에는 철길을 따라 걸으며 놀았다. 친구들과 철길 위를 누가 더 오래 걷나 시합도하고 이 철길을 따라 저 먼 수평선까지 걸어가면 어디가 나올까 상상도 해보았다. 어떤 때는 철길 옆 언덕 숲 속에서 짝사랑에 빠진 사내가 죽었다는 슬픈이야기도 들려왔다.

장소마다 사연․그리움 묻어있는 곳

남광주시장 안쪽에 있었던 지금은 사라진 남광주역은 광주와 인근 지역사람들의 온갖 사연과 그리움이 묻어있는 곳이었다. 여기에서 문학이 생기고 사람들은 절망과 희망을 건져냈다. 기차를 타면 기차 한 켠을 점령하여 맘껏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농장다리 옆에는 죄수들이 살았었다. 기차는 애환이 담긴 농장다리 아래를 무심히 지나갔다.

시민들의 온갖 애환이 담겨있는 도심 속의 철길은 사라지고 이제는 아름다운 숲길을 시민들이 걷는다. 어린 아이들은 이곳이 오래전에 이런 사연들이 있는 철길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하는 시간이 언젠가는 오게 되리라.

나는 푸른 길을 걸으며 장소마다 장소에 따른 의미와 역사 그리고 거리의 사연이 깃들어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곳의 역사와 추억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은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공간과 기록이 필요한 것이다.

그곳 위에 예술의 향기가 묻어나는 예술인의 공간이 함께 한다면 걷는 기쁨과 감동 그리고 휴식의 안녕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걷다 벤치에 앉아 쉬고 조금 더 걷다가 기타를 치는 젊은이와 시낭송을 하는 시민을 만나고, 커피를 한 잔하며 좋은 그림도 함께 볼 수 있다면 푸른 길은 더 의미있는 아름다운 길이 될 것이다. 꼭 문화의 전당과 연계되는 계산적인 공간이 아닌 시민과 젊은이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자유스럽고 즐기는 공간이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겨울 문턱을 넘어선 푸른 길을 걸으며 추억과 미래를 함께 꿈꾸어 보았다.

대동문화 86호 [2015 1,2월호]
 

한희원 작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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