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이지만 어느 덧 23년을 훌쩍 넘어버린 저의 발레인생을 얘기할까 합니다. 그리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화목한 가정의 1남 2녀 중 차녀로 남부럽지 않을 만큼 사랑받고 자랐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몸이 약해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중, 5학년 겨울방학 때 우연히 발레학원에서 원생모집을 한다는 소식에 곧장 엄마에게 달려가 신청하겠다고 말씀드렸고 부모님도 운동 삼아 건강해지라고 흔쾌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처음 엄마 손을 잡고 가게 된 곳은 중앙무용학원이었습니다. 원장선생님이셨던 송건호 선생님은 저를 보시면서 “신체적으로도 괜찮고 마스크도 괜찮아서 발레하기에 좋은 체형이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저의 발레 인생은 시작되었고 그 당시 광주시립무용단에서 주역선생님들은 거의 중앙무용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저로서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발레를 시작하자마자 처음으로 보게 된 시립무용단의 공연은 장희빈이라는 한국 창작 발레였는데 그 당시 학원에서 저를 가르치시던 선생님들이 모두 주역을 하셨고 저는 화려하고 섬세한 발레의 몸짓에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저렇게 아름다운 분이셨다니….

처음 맛본 흥분감은 아직도 제 마음 속에서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습니다. ‘나도 꼭 저 무대에서 저런 아름다운 몸짓으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프리마돈나가 될거야!’

하지만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터라 저의 꿈을 좇기에는 부족함이 더 많았고 유연하지 못한 탓에 신체의 한계를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때마다 무대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제 모습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다짐했었습니다.

비록 내성적이긴 했지만 긍정적인 성격 탓에 힘들어도 춤추는 것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런 열정을 보셨는지 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은 유난히 저를 아껴주셨고 덕분에 유년시절 저는 힘들었지만 빠른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발레는 내성적이었던 제 성격도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하게 만들었고 신체적인 극복을 위한 인내와 노력을 가르쳐 주면서 자신감 넘치는 삶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유년시절을 잘 마치고 대학을 가야하는 찰나 제게 뜻밖의 시련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저의 발레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고 고난의 시간이기도 했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아빠의 사업도 IMF를 피해갈 수가 없었고 결국 부도의 위기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입시를 코앞에 둔 고3이 예체능에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인데 경제적인 어려움과 심리적 불안감은 현실로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장학생이 아니면 학교를 들어갈 형편이 안되었던 터라 어떻게든 장학생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어렵게 입학시험을 치르고 조선대학교 무용과에 수석입학을 하게 .되었지만 과대표를 하게 된 저로서는 대학생활을 할 수 있는 형편도 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리더로서 자신감마저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방황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학교생활은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 권위자이신 박금자 교수님께서 저를 불러서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딱 한마디 하시더군요. 심장이 멎는 것 같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심한 저를 나무라기는커녕 당신을 자책하시면서 학비를 어렵게 마련해 주셨고 오히려 제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깊은 곳에서 저려오는 이 아픔은 무엇일까? 늘 자신감 넘치시고 듬직한 아버지의 어깨 너머로 흐르는 눈물을 그때 저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처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학기를 마치는 동안 장학금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고 덕분에 수석졸업이라는 영광까지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 한구석의 허전함은 공부한다고 잠시 놓아둔 춤 때문인지 그 어떤 보상으로도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4학년 1학기가 되기 전 겨울 방학에 우연히 러시아 워크숍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저에겐 늘 관대하신 아버지…. 이번에도 제 간절함을 읽으셨는지 우리 학교에선 유일하게 저 혼자 가게 되었고 선생님들 몇 분과 국민대생들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살아오면서 처음 가보는 해외여행에 설렘도 잠시, 10일이라는 기간동안 좌절과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 발레를 했다라는 것 자체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발레의 종주국 러시아는 너무도 완벽한 교육 체계와 교수법을 갖추고 있었고 그들에겐 그야말로 발레가 문화이자 생활이었습니다.

워크숍 마지막 날 볼쇼이발레단의 공연을 보고 나오면서 눈보라가 치는 러시아 하늘을 보며 한없이 울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제 꿈과 그 설렜던 무대를 뒤로 한 채 한국으로 돌아온 저는 그길로 짐을 싸서 무작정 서울로 향했습니다.

‘배워야겠다! 춤추고 싶다!’

오직 이 생각만으로 서울 유니버셜발레단 연수부터 아는 선배의 도움으로 국립발레단 연수단원까지 아무생각 하지 않고 6개월 동안 춤만 추었습니다.그리고 바로 시립무용단 오디션을 보게 되었습니다.저는 국립발레단에 들어가려고 서울에 간 게 아니였습니다.

어렸을 때의 꿈.

바로 내 고향 광주의 무대에 서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서 넓은 세상을 공부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운이 좋게 광주 시립무용단에 입단하게 된 저는 처음 출근하면서 발레단 선배들의 실력들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걸 또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항상 성취감 보다는 좌절과 실패를 먼저 경험하게 된 저로서는 이번에도 꼭 이겨내리라는 마음으로 러시아에 계셨던 저의 스승님이 되어주신 문호 선생님이 한국에 들어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주말마다 서울로 개인 레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인연은 5년동안 계속되어왔고 오랜 노력 끝에 입단 7년 만에 늦으막하게 주역캐스팅을 받게 되었습니다.

‘꿈은 이루어 진다’라는 말처럼 제게도 고난과 시련 속에 드디어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겁니다.

그리고 정신없는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많은 것을 공부하고 많은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발레단 생활이 벌써 13년이 되어 가네요.

그리고 지금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생활이고 전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발레는 앞으로도 제게는 춤으로든 지도로든 계속 발전 중이겠지요.

어느새 13살이었던 작은 소녀가 이제는 35살의 어엿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짧고도 긴 여정 중에 제가 가장 힘들었던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옆에서 늘 함께해준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이제는 새로운 생명을 키우는 한 어머니가 되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발레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저와 함께 인생의 끝자락까지도 함께 갈 친구이자 동반자가 될 것입니다.

무용수 생활을 하면서도 얼마 전 후배들과 지역 예술인들을 위해 작은 단체를 만들었고 미약하지만 조금씩 광주 발레를 널리 알리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예쁘게 봐주신 한국무용협회 현 회장님이신 김미숙 교수님께서 2014년도 제23회 전국무용제를 나갈 수 있는 영광까지 주셨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의 결실로 3년동안 대상을 놓치지 않았던 터라 어린 나이에 기회를 얻게 된 저로서는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수상보다는 앞으로 더 많은 발전을 위해 공부하고 배운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한 결과 은상이라는 제게는 너무나 큰 상을 수상할 수 있었습니다.

전국무용제에 나간 작품 휴먼플라나리아의 주소재인 아버지는 어릴적부터 지금껏 묵묵부담으로 희생해주신 제 아버지의 얘기이며 우리 시대의 아버지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앞으로도 광주 지역의 문화 발전을 위해 지역 예술인들과 함께 발레리나로서 예술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네 후는 심히 창대하리라!

저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시련과 고통이 따르지 않은 보상은 그 어떤 보석보다 빛날 수 없으며 어렵게 얻은 보석보다 더 아름답고 빛나는 보석은 없을 것이라 생각 됩니다.

비록 지역의 작은 예술인이지만 젊은 혈기와 열정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고 지금처럼 무엇이든 도전한다면 언젠가는 제 바람처럼 광주의 발레도 대한민국과 세계를 이끌어 가는 예술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정정은 광주시립무용단 차석무용수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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