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흔적을 모으다

‘골목길’ 하면 생각나는 일들이 많다. 기억의 한 켠을 차지하고 있던 그 날이 자주 떠오른다. 8년전 큰 아이 초등학교 입학시키고 생일날이다. 케이크도 사고 떡도 만들고, 아이들이 좋아할 몇 가지 음식을 싸들고 아이의 학교운동장에서 보따리를 풀었다. 엄마들과 미리 작전을 짰다. 배고픔이 해결되고 나면 옛 추억 속의 놀이들을 꺼내 와 보기로 했다. 사사건건 참견하기 좋아하는 오지랖 넓은 큰 아이의 성격 덕에 반 아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왔다. 놀이의 판도 그만큼 커졌다. 다행스러웠다. 초등학교 1학년은 대부분 엄마의 결정에 의해 움직이는 추세다. 사실 많은 아이들이 참석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월화수목금토일"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아이들과 놀아주려 동행했던 엄마들은 옛 골목길 추억 놀이 앞에서 속수무책 흥을 감추지 못했다. '놀이'는 그런 것이다.

생일카드 역시 엄마들 손을 거친다. 여러 말이 나왔다. "신선한 생일파티네요. 재미있겠어요. 혼자 준비하시기에 힘드시면 같이해요." "어떡하죠? 미안해서… 학원 갔다가 영어선생님 만나는 날이네요." "그 날 영하로 떨어진다던데 찬바람 때문에 감기 걸리면 큰일인데, 차라리 실내 놀이터에서 하지 그러세요. 예약하면 바로 될텐데…." 의견도 다양하다.

들어가는 비용은 나중 일이다. 수업이 끝난 후 대부분 아이들은 학원으로 향한다. 골목길은 고사하고 운동장을 밟아 볼 기회조차 없는 게 우리 아이들의 슬픈 현실이다. 이 동네 저 동네 골목길에서 터져 나온 아이들의 울음과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아이들에게 주어진 시간동안 만큼은 넓은 운동장에서 마음껏 신나게 놀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하늘이 보이지 않는 네모난 공간, 차가운 기구놀이와 게임기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들의 생일파티. 아이들의 놀이문화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다.

가끔 생각한다. 문명이 아이들을 얼마나 기운 없고 생기 없고 웃음을 잃게 만드는 지에 대하여. 아이들은 신나게 달려야 한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놀이'다. 그곳이 사이사이 골목이길 바라고 다시 아이들의 소리가 가득해졌으면 한다.

아이들이 놀이 시간을 목말라 하는 것은 분명하다. 미리 준비한 고무줄과 구슬, 공깃돌, 딱지를 꺼내놓았다. 어린 시절 골목길 여기저기 만났던 모습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이들은 알아서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다. 흙바닥에 무릎 꿇고 장지손가락을 말아 구슬을 퉁기던 그 시절 남자아이들이 생각났다. 때에 절은 국물이 선명하던, 쩍쩍 갈라진 손등은 피가 날 정도였다. 지금 녀석들의 손등은 반질거리지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놀이도 승자와 패자가 있다. 모두가 웃고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몸싸움까지 벌였지만 끝내 패배한 아이들은 인상을 찌푸린다. 억울한 표정이다. 놀이 속에서 아이들은 또 다른 작은 사회를 이룬다. 살면서 맞닥뜨리게 될 수많은 패배와 죽음을 넘어서는 수많은 상황을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배운다. 아름다운 사회다. 이것은 모두 옛 골목길에서 나온 문화이기도 한다.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보옹~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 따라~ 고운 옷 갈아입은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엄마들도 신이 났다. 고무줄놀이를 통해 금강산을 그리워했던 그 시절. 입버릇처럼 부르던 노래는 시간을 건넌다. 검소하고 튀지 않게 하려던 큰 아이의 생일잔치. 어쩌면 아주 유별난 잔치였다.

골목의 흔적을 남기다

삶의 향기를 머금은 ‘골목’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광주시는 도시의 아름다운 경관을 보존하고 쾌적한 도시공간을 조성·장려하기 위해 여러 차례 작품공모와 행사들을 추진하고 있다. 문화는 작은 지류를 타고 흐를 때 역으로 힘이 세다. 골목에서 자생해 사람과 사람사이를 건너다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골목은 ‘문화 공동체’가 된다. 특정 누군가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 모두가 ‘골목 문화’의 주인이 된다.

지난 2013년 월산 4동에서는 마을잡지를 만들어내고 마을의 모든 것을 담았다. 마을의 역사와 유래는 물론, 이 마을을 아름답게 하는 따뜻한 미담들을 담았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담았고, 월산 4동의 옛 사진들을 모아 그 마을이 지금껏 걸어온 시간들을 엮어냈다. 이곳에 사람들 골목이야기도 정겹다. 예전과 다른 놀이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골목길 탐사를 토대로 마을 지도를 그렸다. 예쁘고 세밀하게 그린 지도는 시간이 지나 또 다른 골목길 추억으로 남는다. 월산 4동 골목에서는 마을 주민들의 오랜 사랑방 기능을 한 해태공업사 가는 길도 있다. 1970년대 밷엘교회 앞 뽕뽕다리가 있던 마을의 기억도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 마을은 그 동안 아름답게 걸어온 흔적과 앞으로의 삶,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꿈을 담아냈다. 마을의 깊이를 담아내는 골목길 이야기와 감동적인 마을 잡지가 해마다 나오길 기대해 본다.

골목의 흔적을 본다

슬슬 바람이 분다. 봄바람이다. 생각나는 곳이 있다. 낡고 오래된 가옥들, 지나온 시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존재가 희미해져가는 곳. 거기 시간이 뭉쳤다. 100여 년 전 광주 최초로 근대문물을 받아들인 유입구이자, 생명존중사상을 싹 틔웠던 광주정신의 발현지였다. 광주 근대화가 시작된 땅, 양림동이다.

양림동산의 한쪽 기슭, 광주기독병원 뒤쪽 길을 따라 막다른 골목까지 곧장 올라간다. 길의 끝에 오래된 건물이 하나 서있다. 우리의 건축양식은 아니다. 회색벽돌을 쌓아서 만든 2층집이다. 광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건물, ‘우일선 선교사 사택’이다. 그 건물이 정확히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우일선 선교사의 한국에서의 행적에 비추어 1911년에서 1972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우일선 선교사가 활동하던 시기, 광주는 작은 면 단위에서 전라도의 중심으로 거듭난다. 근대적 교통과 행정의 기능에 의해서였다. 1914년에 호남선이 개통됐지만 광주는 여전히 신작로와 영산강을 통해 서만 외부와 연결됐다. 1922년 호남선이 경유하던 송정리와 광주 사이에 지선이 부설된다. 같은 해 광주와 담양을 잇는 철도도 개통된다. 그때부터 며칠 걸리던 서울길이 10시간 거리로 단축됐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여전히 혜택을 받지 못했다.

우일선 선교사의 가장 큰 활동은 광주 나병원의 개원이었다. 하늘이 내린 형벌로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환자들을 그의 힘으로 새로운 숨길을 열었다. 양림동이 담고 있는 것은 비단 서양 문화의 흔적만은 아니다. 양림동 골목은 남궁혁. 김철, 김마리아, 조아라 등 많은 독립 운동가들과 인연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사직공원 통기타 거리를 지나 전남여성회관 골목으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복층형 한옥 최부자집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목조 2층 건물로, 최명귀씨가 1940년대 지은 집이다. 부속건물인 문간채만 11칸에 이르는 큰 가옥으로 한 때 독서실로 운영되기도 했다.

또한 양림동은 시인 김현승, 이수복, 음악가 정율성, 정추, 정근, 화가 배동신, 이강하 등 많은 예술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양림동 골목에도 바람이 봄바람이 불고 있다.

골목은 공동체 사회가 낳은 하나의 상징이다.

광주 장동에도, 동명동과 서석동에도, 그리고 또 다른 많은 곳에 상징은 남아있다. 이들 지역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개관과 맞물리면서 문화의 향기까지 더해지고 있다. 폴리와 인권도서관, 복합문화공간, 갤러리, 공연장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골목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골목만큼 멋진 곳도 드물다. 세련된 멋보다는 푸근함, 깔끔함 보다는 구수함이 느껴지는 골목들이다. 좀 더 깊고, 좀 더 따스하고 좀 더 감동적인 곳이 우리 골목이다. 하지만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골목을 안타까워하며, 광주의 또 다른 얼굴인 숨은 골목골목들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길 바란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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