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교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 20여년 옥살이를 했던 형 서승과 준식씨의 석방 및 한국 민주화를 위해 활동했던 서경식 교수(64ㆍ도쿄케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가 자신의 저서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刊)에서 첫 번째로 언급했던 신경호 교수(前 전남대).

서경식 교수와는 10년지기 막역한 사이다. 이 10년의 시간들은 아마 신 교수에게 예술인으로서 산다는 것과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등등 많은 것들을 다시금 일깨운 시간들이었을 터다.

이런 신경호 교수가 오랜만에 갤러리 나들이를 했다. 자신의 정년퇴임을 앞두고서였다. 다름이 아니라 정년 퇴임전을 연 것이다. 그런데 단순한 전시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40여년 회화지기이도 한 부인 정인수(前 광주교대) 교수는 물론이고, 자신들에게 배운 제자 90명이 함께 했다. 말 그대로 아름다운 동행이었다. 예술과의 동행 이전 삶의 동행이었던 셈이다.

배반의 시간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동행의 참의미를 되새겼다. 그것도 한 갤러리에서 말이다. 이름하여 '삶과 예술, 그리고 동행'전이 그것으로, 지난 2월5일부터 11일까지 유스퀘어 금호갤러리에서 열렸다.

'함께' '더불어' 느낌 주는 전시회

동갑내기 부부는 무던히도 다른 듯하면서도 닮았다. 광주의 중학교 시절부터 남몰래 신 교수를 흠모해 왔던 이화여대의 한 미대생은 몇 년 후 그의 아내가 됐다.

아이를 낳고 집안살림을 하느라 뒤늦게 공부를 마친 끝에 교단에 선 정 교수는 남편의 툭툭 쏘아대는 듯한 말투에도 아랑곳없이 늘 그를 향하는 듯했다. 때론 긴장감이 넘치기도 하지만 각자 분야에서는 뚜렷한 예술적 깊이를 이루고 있었다.

많은 정년전이 열렸다가 사라지지만 자신을 한없이 드러내 보이기만 하려는 다수의 전시와는 달리 함께 혹은 더불어라는 느낌을 안겨주는 자리로 꾸몄다.

신 교수는 처음엔 정년전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다. 하지만 대학교수이기 전에 예술가이기 때문에 작품들을 한 번은 털고 가는 기회를 가져야 했다. 아직도 깊은 예술적 깊이를 더하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어서 더더욱 전시를 주저했다 한다.

다만 앞으로 10년 뒤 화가로서 평가받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정년기념전 제안에 처음엔 시큰둥 했다는 신 교수는 "정년을 하면서 두 가지 아픈 후회가 가슴에 남는다. 함께 했던 많은 젊음들에게 측량할 수 없을 사랑을 붓지 못했다는 것과 내 스스로 그림 작업을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다. 이 전시는 지난해 8월 퇴임한 정 교수와 2월 정든 교정을 떠난 신경호 교수의 정년을 기념해 마련된 것이지만 진중한 부부 교수의 속깊은 뜻이 그대로 투영됐다.

스승을 위한 수직적 전시가 아닌, 제자들이 이끌고 가는 수평적 전시로 진행한 것. 즉, 화가와 교육가로서의 길을 걸어온 부부가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삶을 반추하고 나아가 제자들에게 끼친 따뜻하고 의미있는 관계들을 조명하자는 취지를 십분 살려냈다. 기존의 교수 정년전이 사제동행전으로 이뤄졌다하더라도 대부분 제자들의 전시작품이 각자 자신들이 해오던 작품 중 하나를 출품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이번 전시는 제자들의 출품작 중 10여 점이 신 교수와의 추억 및 인연 등과 관련한 특별한 이야기로 구성됐다는 점이 차별화됐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존경과 우정의 의미가 갤러리에 넘쳐났다.

스승-제자 사이 존경과 우정 넘쳐

그 넓은 갤러리를 돌며 작품들을 찬찬히 뜯어보는데만도 나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먼저 신 교수의 작품들은 넋을 비롯해 분노와 허무, 죽음 등 네가지 카테고리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미국 하버드대 방문교수를 지낼 당시 버몬트에서 작업했던 '독야청청'을 포함한 작품들의 경우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동안 신 교수의 기존 페인팅 작품들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여주는 자리였다. 또 단순하면서도 상징성이 강한 작업을 해온 정 교수는 이번 전시를 위해 작업한 여러 점의 신작을 출품했다. 1976년 결혼 이후 40여년 동안 부부로 연

을 맺어왔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작품에는 신 교수를 향한 '연가' 등 사랑의 메시지가 넘쳐났다. '댓잎띄우기'를 비롯해 '기다림', '당신의 강' 등 같은 작품들도 모두 신 교수를 향한 마음들이 고스란히 반영돼 있는 듯 했다.

이와 함께 교수직을 벗고 다시 치열한 작가의 삶을 살고자 하는 시작에의 의지를 '봄의 예감', '꽃피우기', '날다' 등의 작품에 담았다. 정 교수는 "가정 일과 직장 일을 한꺼번에 하면서 늘 시간이 없었다. 때문에 소품 위주로 작품활동을 했는데 이제 직장과 육아에서 해방됐으니 이를 계기로 온전히 내 작품만 할 수 있겠다."면서 "이번 전시를 함께해 준 제자들의 글들이 너무 따뜻하고 감동적이어서 감사하는 마음이다."고 덧붙였다.

이 전시에는 신 교수의 작품 15여점과 정 교수의 작품 15여점, 그리고 제자들의 작품 90여점이 선보였다. 서기문 교수(전남대 예술대학)는 "신 교수 부부가 젊었을 적 살았던 '돌고개집'을 거의 20여 년간 중국조선족 유학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해 한국생활과 학위과정의 적응을 돕는 것은 물론, 집을 무료로 대여해주고, 전시를 기획해 작품도 팔아주면서, 또한 작가로서의 성공적 역량과 네트워크까지도 넓혀주면서 연변의 제자들을 물심양면으로 크게 도왔다."고 밝혔다. 동행전 소식을 들은 중국 제자들도 기꺼이 전시에 동참해 갈수록 무심해지는 사제의 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해줬다.

부부도, 사제지간도 동행하지 않으려 한다. 나만, 자신만 있는 시대다. 이 전시는 예술적 성취에 앞서 '부부란 무엇일까'와 '사제지간이란 무엇일까'를 곰곰이 되새길 수 있다는 덤까지 더해졌다. 예술도 삶을 말할 때가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고선주 광남일보 문화체육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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