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땅고(Tango)하면 춤을 연상하거나 배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사실 땅고는 춤이면서 연주의 음악이자 음악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땅고 연주는 바이올린, 피아노, 더블베이스, 반도네온으로 연주되는데, 그 중에서도 반도네온은 ‘땅고’를 가장 ‘땅고’스럽게 만드는 악기이다.

‘반도네온’(Bandoneón)이란 이름의 유래는 반도네온을 고안한 독일의 하인리히 반트(Heinrich Band)의 이름에서 따왔다. 독일 선원이나 아르헨티나로 이주해가던 독일인들이 19세기 후반 전파하였는데, 이후 아르헨티나에서는 땅고 연주시 반도네온을 널리 쓰게 되었고 땅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가장 중요한 악기가 되었다.

땅고는 19세기 유럽 리듬의 변형과 이식,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리듬과의 결합을 통해서 탄생된 이민자의 음악이다. 땅고의 모체 혹은 그 원형이 된 것으로 '아바네라' (Habanera)를 들 수 있는데,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사교계에서 유행되기 시작해서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섬 전체에 유행한 이 매력적인 댄스가 당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출입하는 뱃사람들에 의해 아르헨티나에 수입된 것은 19세기 중엽이었다.

아바네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지방색에 차츰 동화되면서 템포와 멜로디도 변해갔고 '밀롱가' (Milonga)라는 무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 후 밀롱가는 오늘날의 땅고로 탄생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기원과 사연이야 어쨌든 땅고는 부에노스 아이레스(Buenos Aires)의 변두리 항구(Puerto)인 보카(Boca) 지역에서 탄생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전통 땅고를 뽀르떼뇨 땅고(Porteño Tango)라고도 부른다.

(뽀르떼뇨는 항구 출신이라는 뜻인데, 부에노스 아이레스 토박이를 뽀르떼뇨라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부연할 것은, 땅고는 그저 춤이나 무도음악이 아니라 ‘음악’ 바로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땅고는 춤(Danza)과 가수(Cantante), 연주자, 그리고 음악이 일체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거기에 반도네온(Bandoneon)은 필수다.

현지서 배운 실력으로 가장 완벽하게 연주

그런데 이 반도네온에 미친 우리나라의 어느 수학도(數學徒)가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과 비디오 게임에 열광했던 소시적에, 애니메이션과 게임의 배경음악에 사용됐던 땅고의 선율은 그를 온통 사로잡았다. 특히 땅고를 연주하는 반도네온에 매료돼 다니던 대학을 관두고 그것을 배우러 일본으로, 아르헨티나로 무작정 갔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지금 활발히 음악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바로 반도네온 연주자(Bandoneonista) 혹은 뮤지션 고상지다.

그런데 왜 하필 반도네온이었을까. 반도네온은 사실 가장 배우기 어렵고 까다로운 악기이다. 배우는 사람도 많지도 않고 악기 제조 또한 전통적으로 만드는 방법도 거의 사라지고 있어 시장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조금은 희소적인 장르인데 고상지는 반도네온을 연주하며 땅고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 나타났다. 우리나라에서 반도네온을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이는 서너 명에 불과한데 그 중 고상지는 현지에서 제대로 배운 사람답게 가장 완벽하게 반도네온을 연주한다.

2011년, 2년간의 아르헨티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국내에서 다른 뮤지션들과의 활발한 협연을 시작으로 그의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하는데, 특히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수상한 아르헨티나 출신 아티스트 구스타보 산타올라야 (Gustavo Santaolalla)의 일렉트릭 땅고그룹 바호폰도 ‘Bajofondo Tangoclub'의 2012년 내한공연에 게스트로 출연, 뛰어난 연주를 선보여 관객들에게 격찬을 받았다. 그동안 주로 협연을 해왔던 그가 작곡 및 연주, 프로듀싱 1인 3역을 하며 ’maycgre'(2014년)이란 앨범을 발매했다.

정식 데뷔작인 셈인데 앨범에 담긴 고상지의 음악은 전통적인 땅고라고 하기보단 땅고와 대중음악의 간극에서 스릴넘치는 줄타기를 하는 장인처럼 담대함과 현란함으로 무장한 채 두 장르간을 자연스럽게 왕래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앨범이 만 30세의 작품이란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솔직히 말하면, 그의 음악은 내가 최근에 접했던 음악 중 가장 혁신적인 사운드이다.

애니메이션 캐릭터서 비롯된 앨범 ‘maycgre’

앨범 제목 ‘maycgre’는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인 고상지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의 첫 글자에서 따온 거라고 한다. 특히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OST에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앨범은 고상지가 영감을 받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와 캐릭터에 대한 오마주 혹은 땅고를 빌려 쓴 고상지의 음악 연대기라고 할까.

배경이야 여하튼 앨범의 각 곡들은 대단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으며, 고상지의 음악적 섬세함과 프로듀싱의 능력이 돋보인다. 특히 이 앨범은 반도네온 연주자로서의 고상지가 아닌 작곡가 고상지의 능력이 발현된 작품이며, 협소하고 열악한 국내시장에서 활동해야 할 그의 영리한 선택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어느 언론의 인터뷰에서 “단순한 반도네온 연주자가 아닌 음악인(그것도 땅고만 연주하는 음악인이 아닌)으로 인정받고 싶다” 라고 말한 것처럼 단순한 땅고 연주자 혹은 반도네온 연주자가 아닌 폭넓고 다양한 음악을 통해 자유로운 음악을 하고 싶다는 심경을 얘기한 적 있다. 우리가 그의 다음 앨범 혹은 다른 활동들을 주시해야할 이유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앨범 ‘maycgre’ 중 'A Los Amantes'(연인들)과 'Red Hair Heroin'를 가장 좋아한다. ‘Los Amantes’란 스페인어로 연인, 그것도 부적절한 관계의 연인사이를 의미한다. 이름처럼 이 곡은 온통 불안한 미래와 불안전한 연인사이의 심리를 매우 섬세하고도 열정적으로 묘사한다. 피아노의 긴 전주와 반도네온이 없는 사이 마음을 파고드는 바이올린 솔로는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암시이다. 하지만 그건 열정이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이기도 하다.

‘Ataque'와 'Red Hair Heroin'에서는 반도네온과 현악기와의 치열한 대립 혹은 배틀이 애니메이션의 긴박한 장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붉은 돼지’(Porco Rosso), 에반게리온의 장면들을 연상케 하면서 주마등같이 스쳐간다. 어쨌거나 이 앨범은 곡 하나 하나를 염두에 두기보단 앨범 전체의 이미지와 프레임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어서 작곡가 고상지의 진면목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해 보인다.

안타까운 게 있다면 앨범의 음악성과는 별개로 이 앨범이 협소하고 편향성이 강한 국내 음악시장에서 일반 소비자들의 호응을 끌어내기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최근 국내 음악시장에서 공연과 음악콘텐츠의 다양성이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월드뮤직이나 다양성을 내포한 크로스 오버류의 음악, 그것도 연주 음악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에는 버거운 현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상지의 음악은 분명 혁신적이고 다양한 대중적인 실험들을 통해 진화를 거듭하며 고상지만의 음악세계에 안착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의 다음 앨범이 정말 기대된다.

대동문화 87호 [2015 3,4월호]

장용석 문화기획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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