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초입에 보았던 동백나무가 생각난다. 아파트 정원의 동백잎이 비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무엇이 비치나 가만 보니, 내 얼굴들이 뭉개졌다. 이어 지난날의 기억들과 사람들이 뭉개졌다. 수그렸던 허리를 펴자 그 기억과 얼굴들은 다시 동백잎으로 돌아갔다.

기고할 섹션의 꼭지 이름이 ‘청춘예찬’이라 했다. 타이틀에 대한 작은 강박이 있어 소설을 쓸 때도 제목부터 짓지 않는다. 그런데 ‘청춘예찬’이라…예찬할만한 청춘을 쥐어짜다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내게는 언제부턴가 청춘이란 단어가 고루하게 들린다.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녹슨 안테나가 떠오르는 낱말이다. 이 시대의 청춘들은 예찬의 대상이 맞는가? 잘 모르겠다. 이런 곤란에 직면했을 때 유용한 방법이 있다. 솔직하게라는 말은 조금 그렇고 기억나는 대로 옮겨보는 방법이다.

때늦은 사춘기와도 같은 것

내게 있어 청춘은 때늦은 사춘기와 같은 것이었다. 어릴 적 조숙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착하다는 말도 적잖이 들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 같다. 내 것이라 믿었던 ‘조숙하다’는 말과 ‘착하다’는 말을 의심하게 됐다. 그 날로 성장이 멎어버린 느낌을 받았다.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이 죄다 유치하거나 위선적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해서 관계망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사건들은 나와 나를 둘러싼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쥐며 살고 싶었고 그런 고민 끝에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때부터 소설을 마음에 품기 시작했다. 가상의 이야기들을 떠올릴 때면 기분이 썩 괜찮았다.

나는 조숙하고 착한 사람이었기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를 울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고 그저 책을 읽으며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상상해보고는 하는 게 고작이었다. 목표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졸업을 몇 개월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다. 도서관에 들렀다가 문예창작과란 곳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듬해 나는 문예창작과 새내기가 됐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휴학생이 되어 있었다. 대학 생활에 대해 기대했던 것과 실제가 달랐다. 무엇보다도 대인관계를 맺는 게 어려웠다. 처음으로 했던 연애가 실패하고 한동안 잊고 지냈던 의심이 불거졌다. 나는 조숙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그러자 배신감이 들었다. 나에 대해 조숙하다고, 착하다고 평해주던 이들이 원망스러웠다.

휴학을 하고 일 년이란 시간을 학교 근처에서 지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사색을 많이 했던 시기였다. 광주란 광역시에서 산과 들로만 쏘다녔다. 일 년 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자연이 그리웠다. 나는 촌놈이었고 꽤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도 시간은 부족하다 생각했었다. 그 무렵에는 소설은 쓰지 않았다. 대신 시의 짧은 호흡이 좋아 간간히 시를 끼적였다.

‘내가 쓸 수 있는 소설을 쓰자’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바뀐 것은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부터이다. 군대 덕분이 아니라 군대 밖에서 나를 기억해주고 있는 이들이 있어서였다. 새내기 시절 내 눈에 비친 문예창작과 학우들은 대부분 비정상으로 보였다. 그들에게서 내 불안과 열등감을 발견하게 될까 두려웠다. 그래서 피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전역 후 재회한 그들은 누구보다 든든한 동반자들이었다. 그때 알았다. 영혼에 난 흠집이 치유되는 데는 비슷한 처지의 이들이 누구보다 훌륭한 연고가 되어주었다.

서른이 가까워지면서 불안과 쓸쓸함에 대해 고민하는 날들이 늘어갔다. 서른이 가까울수록 고민과 걱정의 경계가 무뎌졌고 초조해져갔다. 서른이 되도록 등단을 하지 못한다면 소설에 재능이 없는 것이라 판단하기로 마음먹었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스터디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처지가 닮은 이들 간에 이해되지 않는 책들을 이해해보겠다고 붙들고 앉아 머리를 맞대는 시간이, 서로의 작품을 가혹하게 평가하면서도 그 창작열에 대해서는 존중을 해주는 문화가 좋았다.

그러나 서른이 됐어도 달라진 건 없었다. 이후 일 년이 지나 등단을 하기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새 수저를 장만하라 일러주신 선생님의 말씀이 있어서였다. 아까워 사두기만 하고 쓰지 않던 걸, 서른 살 되던 새 해 첫 날 사용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세운 목표가 무너진 것 같아 서럽고 우울했다. 그해는 습작품들에 대해 가장 많은 혹평을 받은 해이기도 했다. 혹평에 저항이라도 하듯 정신없이 습작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합평회에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보다 일단은 내가 쓸 수 있는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고 공교롭게도 그런 마음으로 쓴 작품이 등단작이 됐다.

기고문을 청탁 받을 때 등단을 하기까지의 과정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사실 현재 부분에 대해 적기가 가장 난감하다. 딱히 드러낼 만한 부분이 없다. 나에 대해 설명해야하는 관계들이 늘어간다. 소설을 쓴다고 밝히는 게 가장 어렵다. 소설을 쓰고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소설가인가 하는 데에는 답을 못하겠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소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애초에 소설과 밀접한 일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경쟁에 익숙하지 못한데다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 서툴다 보니 글쓰기를 제외한 여타의 일에서는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지가 꽤 됐고 어쩌면 당분간 이 상태가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몇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고 주말에는 장편원고를 퇴고 중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사는 타입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나기도 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으로 떠도는 계획이라면 시간을 잘 활용하자는 것이다. 구상만 짜다 써내지 못한 작품이 지금보다 많아지지 않도록 하고 싶다. 소설을 쓰는 행위에서 보다 많은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고 싶다.

청춘의 한 때를 지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가고팠던 길이 이토록 하염없는 것이었나, 힘없는 것이었나.’ 아무도 나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는 생각만큼 힘든 것도 없다. 그럴 땐 울어도 되고 무릎을 꿇어도 된다. 그러나 너무 억울해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청춘은, 모든 소중한 것들이 그렇듯 지나고 나서 봤더니 빛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청춘의 문턱에 걸려 넘어졌을 땐 일어설 기운을 충전하고, 조금 쓸쓸하더라도 내가 나의 부목이 되어 일어서면 된다. 청춘의 뼈는 제법 단단하다. 좀 더 편한 길 따위는 없다. 어느 길로 가도 가시밭길이라면 외롭고 힘든 길이라도 내가 원하는 길을 걷는 것,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청춘이다. 그렇게 지나와 돌아보면 내 낡은 안테나가 읽어냈던 전파들이 생각날 것이다. 세상에 혼자 버려진 기분이 되어 목 놓아 울던 기억, 그 곁에 조용히 머물러준 조력자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대동문화 88호 [2015 5,6월호]

김용태 소설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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