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의 현장작업까지를 전시의 범주에 포함한다면 어떨까.

관람객들은 '차려진 밥상'인 전시만 보며 작품을 감상할 뿐이다. 하지만 전시에 앞서 작가들의 고뇌에 찬 작업과정을 볼 수 있다면 그건 분명 행운일 것이다. 전시전 과정까지를 전시에 포함해 폭넓게 작가의 작업과정을 접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다.

광주의 40∼50대 화가 9명이 가사문학의 본 고장인 담양군 남면에 지실마을 정태수씨 집 '와룡매'(臥龍梅)로 모였다.

지실마을은 식영정과 환벽당, 소쇄원, 그리고 가사문학관이 자리하고 있는 유서깊은 공간으로, 별뫼(성산) 주변의 절경을 찬미한 식영정 18경과 성산별곡을 낳은 곳이자 '계당매'(溪堂梅)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이 지실마을에는 매화나무 세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이 시냇물이 집의 입구를 가로 지르는 곳에 집을 지었다해 계당(溪堂)이라고 부른다. 이 계당을 따서 '계당매'라 부른다. 계당매는 백매와 홍매, 옥매를 일컫는다.

조선시대 수많은 선비들과 시인묵객들이 머물며 시대를 등지고 문화인의 삶을 살았던 공간이라 칭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유서깊은 공간에 화가들이 붓과 캔버스를 들고 찾아들었다.

분주한 창작활동을 하느라 현장사생이 어려운 시절인 만큼 더욱 눈길을 끌었다. 경제적 여건도 그렇고, 매일 매일 시간에 허덕이는 일상 때문에도 현장사생은 화가들에게 시간이 갈수록 더욱 어려운 여정이 돼 가고 있다.

더욱이 스케치가 그저 관람객들에게는 낭만스런 풍경으로 비칠지 모르나 정작 화가들에겐 그게 삶이다.

그려야 하는 숙명을 모두 다 가슴에 안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하다보면 좀처럼 짬을 내 현장사생을 다녀오기도 빠듯한 것이 작금의 사정이다. 이들 아홉 화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불의에 굽히지 않는 절개․기상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들 화가들이 지난 4월2일 오전 담양군 남면 지실마을 정태수씨 가옥의 뜨락에 자리하고 있는 '와룡매'(臥龍梅) 주위로 둘러앉아 어떻게 화면에 옮길 지 고민들 하느라 분주했다.

'와룡매'는 일반 매화와는 달리 곧게 자라지 않고 누워있는 용이 사방으로 승천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그 자태가 오묘한데다 이 와룡매가 정씨의 집을 따라 들어서있는 돌담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그 자체였다.

이 날 현장에서 만난 화가들은 캔버스와 화선지에 현실 공간 속의 '와룡매'를 각각 자신의 매화로 옮겨놓기 위해 구상이 한창이었다.

이들 화가들은 와룡매 밑에 주저앉거나 마당에 화선지를 펼쳐놓는 등 그 주변을 빙 둘러쳐 와룡매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내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봄바람이 세게 불어왔다. 현장사생 중 너무 센 바람은 작업에 여간 방해되는 것이 아니다.

지지대가 넘어질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이들이 굳이 꽃 좋고 풍경좋은 곳이 널려 있음에도 소쇄원과 식영정, 환벽당이 자리하고 있고, 송강 정철의 후예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실마을의 '와룡매'를 찾은 것은 단순하게 그림소재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더더욱 옛 선비들의 풍류를 재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늘 그림 작업하느라 삶을 놓치고 살 때가 많았을 이들이다. 이들이 이곳 와룡매를 찾은 것은 선비들의 지조와 절개가 무엇인가를 느껴보기 위함 때문이었다.

한국화가 허임석 이선복 이창훈씨와 서양화가 황순칠 류재웅 정경래 조규철 조현수 최요안씨 등이 이 날 사생에 참여했다. 이들 작가들은 모두 화단의 허리에 해당하는 40-50대들로,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창작에 전념한다는 공통분모로 묶여진다.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주제로 이날 하루 작업을 펼치면서 매화의 의미를 되새겼다. 작가들은 옛 선인들의 불의에 굽히지 않는 높은 절개와 기상을 표현, 혼탁한 이 시대에 전달하고자 하는 뜻을 담아냈다.

‘詩中有畵 畵中有詩’ 주제

이 날 현장에서 만난 작가들은 한결같이 현장사생의 의미를 설파했다.

정말 오랫만에 야외로 나왔다는 류재웅씨는 "카메라가 발달돼 많은 작가들이 사진으로 사생을 대체하는 경우가 많은데 카메라 앵글로 잡은 것과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 느낌 그대로 감성까지를 화면에 담을 수 있어 좋다"고 밝혔고, 허임석씨는 "젊었을 때는 발로 그리라고 했는데 현장감과 매화향기가 나를 밖으로 불러낸 셈이다. 현장감이 살아꿈틀대는 사생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이선복씨는 "움츠렸던 한 겨울을 털어버리고, 꽃피는 시절에 탐매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선비들의 지조를 생각하면서 매화향기를 이 봄에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이 날 한쪽에서는 화가들이 매화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중간에 주인장의 차 한잔이 화가들에 건네졌고, 대금연주자 오목대씨가 '청산별곡'을 연주해 그림과 선율의 만남까지 더해진 자리가 됐다.

이 날 사생을 기획한 황순칠 작가는 "전시를 열기 전 뜻 맞는 작가들끼리 모여 현장에서 사생을 하는 것으로, 흔치 않은 경우"라며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연주자는 선율을 선사해 근사한 문화난장이 됐다"고 밝혔다.

이들이 정성들여 화면에 옮긴 매화들은 오는 29일부터 전시를 열어 시민들에 선보인다.

이 날 사생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예술가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서 매화향기보다 더 진한 울림이 전해졌다.

한편 이 날 작업된 작품들은 각자 작업실에서 한달 가까이 완성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작품들은 오는 5월12일까지 광주시 북구 향토음식박물관 기획전시실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대동문화 88호 [2015 5,6월호]

고선주 광남일보 문화체육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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