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오월제五月祭의 기둥’(Maypole)은 여신 퀴벨레의 사랑을 받았던 소년 아티스의 성스러운 소나무. 하지만 그 여신의 질투로 자신의 남근을 거세하고 죽은 아티스를 기념하기 위한 아티스제祭에 참가한 자들이 여신 퀴벨레의 신전으로 운반하기 위해 짊어지거나 전차에 실어 가던 소나무를 가리킨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메이퀸May Queen’ 또는 ‘녹색인Green Man’을 뽑는 ‘오월제’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축제에 참가한 이들은 일종의 우주목宇宙木인 이 소나무 주위를 돌며 오는 봄을 맞이하고 생명의 재생과 부활의 기쁨을 만끽했다고 한다.

하지만 적어도 1980년 이후 한국인에게 5월은 이러한 ‘오월제’의 우의성寓意性은 한낱 사치스런 감정에 불과하다. 특히 80년 5월의 비극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광주시민들에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의 은총과 축복, 혹은 영적 재생과 성화聖化에 대한 기대와 소망은 어김없이 찾아드는 부채감과 죄책감, 원죄의식 등으로 뒤바뀌기 마련이다. 독일철학자 아도르노의 말대로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었던 세월 속에서 온갖 생명이 한껏 피어나는 5월의 찬란함을 노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브레히트)을 기꺼이 공유하고자 80년 5월에 대한 진실규명과 학살자 처벌을 한결같이 외쳐왔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우선 그것들은 우리가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그러한 인간적 가치와 신념이 한꺼번에 무화되어버린 폭력의 사태 앞에서 벌거벗은 채 서 있다는 절망감. 인간과 자연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기리는 서정의 춤과 노래가 더 이상 불가능해진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굴욕감 더 크게 작용한 결과이다.

인과적․합리적 차원서 이해해보려는 노력들

80년 5월에 대한 기존의 학문적인 작업들은 이러한 사태에 직면해서 그것들을 인과적이고 합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보려는 노력들이다. 특히 그것들은 문제의 근원으로 돌아가 눈앞에 벌어진 불가사의한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려는 이론적 시도이자 광주 5월에 대한 접근 방법을 정식화한 것들이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세계의 참혹을 감당하려는 인간적인 노력과 끝 간 데 없는 절망의 역사를 구조론적 관계에서 파악하려는 시도가 80년 5월의 사건에 대한 다양한 이론적인 방법론과 분석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수학 여행길의 아이들이 한꺼번에 수장되어버린 ‘4․16 대재난’이 보여주듯이, 80년 5월의 비극은 온갖 개념을 뛰어넘어 의미를 생성하는 그 무엇이다. 비록 그것들이 80년 5월의 비극을 단지 패배나 치욕이 아닌, 승리와 자존의 기억으로 뒤바꾸는데 기여했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그것들은 역사적 사건의 진행과정을 정리하고 분석한 가설과 사변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본의 아니게 그러한 사회과학적인 개념의 작업들은 성격상 그 과정에서 한 사태의 의미를 생성하기보다 소비하고 박제화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80년 5월 광주에 대한 경험론적인 접근 역시 그렇다. 각기 다른 구체적 경험을 종합하는 증언록이나 수많은 기록물들은, 분명 왜곡되고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데 기여한다. 하지만 각자가 직접적이며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사회적 분위기나 표층자아의 욕구에 맞게 변질되고 만다.

그 내적인 차이나 뉘앙스가 간과된 채 언어적 소통에 적합한 것으로 뒤바껴버린 것을 간과한 채 본래적이고 순수한 경험이라고 주장하기 마련이다. 바로 각자의 경험들을 절대화하여 실제적 진리에 접근하는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

작년 5월에 펴낸 소설가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소설의 한 구절대로 80년 5월의 시민항쟁에 참여한 이들은 무슨 특별한 사명감이나 이른바 사회적 불평등에 비롯된 계급적 의식에 의해 참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도청에 남은 시민군”으로서 “살아남은 증언자”들 대부분의 “대답”대로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야말로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공포나 예정된 패배에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감성의 충동. 이성적 판단과 분별로 제어될 수 없는 강렬한 내적 정념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작고 순수한 차이와 그 차이의 다양성 주목해야

달리 말해, 80년 5월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무슨 거창한 명분이나 보편적 가치 때문이 아니다. 이웃의 죽음과 불행을 제 것으로 느끼고 그걸 타인과 공유하려했던 순수한 마음. 이성적 판단이나 개인적 열정을 넘어선, 고통스럽고 비참하며 슬픈 세상과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선한 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처할 수밖에 없는 수동성과 유한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깊이 공감하는 데서 발생한 끝없는 연민의식이 바로 80년 5월 정신의 한축이다.

물론 그렇다고 80년 5월 광주에 대한 학문적 방법론이나 경험론 자체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80년 5월의 진실을 총체화하기 위해선 불가피하게 대상들의 경계를 구분하거나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생존자들의 증언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학문적 접근이나 경험론은 불가피하게 80년 5월의 참여자들의 가슴마다 들어 있었을, 그 자신들도 어쩌지 못한 마음의 자발성이나 순수성의 훼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80년 5월에 대한 서로 다른 이론적 기준들과 구체적 경험론들은, 바로 하나의 잣대로 잴 수도 포착할 수도 없는 진실들을 포착하는데 무력하다.

누군가 “사물들이 춤추게 하려면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멜로디를 연주해주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80년 5월의 경험을 일종의 독단으로 개념화하거나 고정화하기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실체적 진실 또는 실재적 경험에 접근할 때 역사는 인간적이고 되고, 현실은 춤이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80년 5월이 단지 하나의 기념식이나 행사 아닌 살아있는 축제로서 각자의 미래를 해방시키는데 있는 것이라면, 기존의 딱딱하고 의례적인 선율과는 다른 노래. 가시적이고 고정화된 방법과 경험에 가려지거나 가려져 있던 존재를 해방시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흔히 우린 신화를 단지 재미와 흥미를 위해 꾸려진 황당무계한 허구적 이야기쯤으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그때마다의 위기나 절박함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탄생한 것이 신화이다. 그러니까 동서고금의 ‘오월제’와 같은 각종 제의祭儀는 그러한 신화의 재현을 통해 해당 사회가 겪는 절실한 모순을 해결하고 불가해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노력에서 탄생한 것들이다. 특히 그것들은 단순히 기념제나 축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 또는 고통의 극단 속에서 언어를 상실하거나 세계가 차단되는 경험 속에서 타자와의 소통 내지 공감을 얻을 때 더욱 의미가 있다.

오월이 온다. 지울 수 없는 하나의 현대 신화이자 제의로서 80년 5월의 광주 기억하고 기념하는 ‘5월제’는, 따라서 한낱 주어진 경험이나 자료들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다. 한낱 개념이나 경험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이해하고 승화시키는 노력이 우선적이다. 궁극적으로 말해질 수 없고, 소통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소통하고자 할 때 80년 5월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지지와 공감을 일으킬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척도로 규정할 수 없는 작고 순수한 차이와 그 차이의 다양성에 주목할 때, 80년 5월은 국경과 인종을 넘어서 엄청난 생명력을 가진 재생과 부활의 축제가 될 것이다.

대동문화 88호 [2015 5,6월호]

임동확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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