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프고, 다리 관절이 아파하기 시작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야말로 어제까지 멀쩡하던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 급히 응급실에 실려 간 중병의 환자가 . 바로 그럴 때 병원당국이나 의사가 취해야할 첫 번째 조치는 무엇일까. 전문가가 아니라서 그 분야에 대한 상세한 매뉴얼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상식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당장의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의 다급한 사정은 차라리 차후의 문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갑자기 이 환자가 곤경에 빠졌는지 그 원인 규명이 먼저다. 당장의 증상과 환자의 호소에 따라 대응하는 대증요법보다 그 환자에 대한 정확한 종합 진단이 선결과제다.

언제부턴가 ‘헬 조선’으로 불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 중병 환자의 신세로 전락한 우리 사회에 대한 즉각적인 비판과 저항이 전부는 아니다. 말 그대로 오늘의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 그나마 정상적인 상태로 회생하기 위해선 날로 증가하는 빈부 격차와 청년 실업, 비정규직의 확산과 과도한 가계부채 등 당장의 현안에 대한 해결 의지만으로 부족하다.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의 결과로 얻은 민주주의가 어떻게 후퇴하고 경제성장의 과실이 누구에게 집중되고 있는지 묻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온갖 갈등과 혼란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 첫 번째다.

하지만 여기저기 성한 데 없는 상황에서 그 원인이 밝혀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금세 해결되리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무작정 그 원인을 찾거나 제거한다고 해서 모든 병이 한꺼번에 치료되리란 보장은 없다.

단지 그건 원인일 뿐 치료는 별개다. 비록 그 원인이 밝혀졌다고 해도 전반적인 신체 상태나 치료 가능성에 대한 고려 없는 치료는 자칫하면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제 아무리 환자의 요구가 절박하더라도 어디서부터 치료해가야 할지 순서를 정하는 데 더 중요하다.

제 아무리 몸부림쳐도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오늘의 대한민국 사회가 그렇다. 선장을 잃은 배처럼 무책임과 무능력이 만연한 사회에서 당장의 불안이나 불만, 울분이나 자학보다 먼저 요구되는 것은 아무도 풀지 못했던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린 알렉산드로스 대왕식의 해결이 아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식의 명쾌한 행동은 멋져 보일지라도, 본의 아니게 환자를 살리기보다 오히려 회복불능의 사태로 몰아갈 수 있다. 조금 느리고 답답하게 보일지라도, 단단하게 얽힌 매듭을 풀어갈 실마리가 무엇인지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한국사회에서 가장 먼저 풀어가야 할 매듭은 과연 무엇인가? 이른바 ‘4·16 대재난’의 한국사회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각자 그 관점도 다르리라.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헬 조선’에 이어 한반도에 지옥이라는 말을 합성한 ‘지옥불반도’라는 신조어가 정의의 실종과 깊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공정하고 올바른 가치의 실종이 ‘헬조선’, ‘지옥불반도’를 넘어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 등과 같은 절망적신 신조어의 급속한 확산과 공감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청년들이 오늘의 한국사회를 지옥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하버드대의 마이클 샌델 교수의 말대로, 그들은 그러한 신조어를 통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가 묻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의 소득이나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영광이 어떻게 분배되지는 묻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올바르게 분배되지 않거나 정당한 자기 몫이 없다는 절망감이 그들로 하여금 한반도를 지옥의 땅으로 보며 떠나도록 부축이고 있다. 한 사회나 공동체를 위한 옳고 바른 도리가 없다는 절망감이 청년세대로 하여금 ‘탈조선’을 꿈꾸게 한다.

현 집권층의 무능과 오래 누적된 사회적 모순의 결과를 한 개인의 ‘노력’ 부족으로 몰아 부치는 사회 속에서, 따라서 가장 시급하고 적절한 대책은 “세상이 무너져 내릴 지라도 정의를 세워라Fiat justitia, pereat mundus”이다. 아니면 모 법과대학 도서관 앞의 기념비에 새겨진 글귀대로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이다. 단지 청년세대만이 아닌 모든 시민들이 평등하고 공평한 기회와 분배가 이뤄지는 사회적 체계의 구축이다.

각자의 행복과 자유와 미덕을 향유하고 만끽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의 진작이다. 자기계발의 신화가 사라지고 있는 시대 속에서 열정 페이, 무급인턴, 비정규직, 취업난 등으로 고통 받은 청년층들이 움츠린 어깨를 펴고 다시 안간힘하며 생의 의욕을 갖게 할 수 있는 정의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의가 바로 선다고 해서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중병에 걸린 한국사회를 치유하는 첫 출발점에 불과하다. 특히 정의가 모든 불평등을 해소하거나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19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피를 제물로 등장한 군사정권이 뻔뻔하게도 ‘정의사회구현’ 또는 ‘민주정의당’을 운운하며 심각하게 훼손된 바 있는 단어인 ‘정의’는, 적어도 올바른 삶의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인간의 덕목 중의 하나다.

비록 더 가난해지고 고통 받은 사회가 도래한다고 해도, 자신들이 정의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는 자존감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누구도 지금 이곳을 아무런 희망이 없는 지옥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김수영 시인은 “뒤집어진 부정이 정의가 되지 않더라도” “차라리 부정한 자가 되라”(「예지」)고 한다. 설령 모두가 원하는 사회적 정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정의의 가치와 중요성은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얘기다. 솔직히 기대보다 걱정이 더 많은 새해에 우리가 할 일은 유대인 예언자 아모스처럼 “공의公義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아모스서 5장 24절)는 사회를 위한 노력이다.

세상이 망해도 정의의 실현만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정의가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자각이다. 전면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정의가 관철되는 세계 속에선 더 이상 자신의 조국을 부정하거나 떠나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동문화 92호 [2016 1,2월호]

임동확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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