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래서 말이 곧 얼이라고도 한다. 영어의 지배에서 벗어나 아일랜드어를 부흥하려는 운동의 표어 ‘Gan teanga, gan tir’(언어가 없으면 나라도 없다)나, ‘유태인의 영혼이 피어나는 용광로에서 히브리어도 피어난다.’는 유태인들의 주장도 모두 말과 민족의 동질성을 말해 준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말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던 것도 여기에 그 이유가 있다. 말을 빼앗으면 자연스럽게 민족혼도 사라질 것이고, 그래서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걸림돌이 없어질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말은 곧 민족혼, 우린 무엇을 빼앗겼나?

일제가 우리말을 없애려 한 구체적인 시도는 여러 가지로 찾아볼 수 있으나, 학교에서 조선말을 쓰지 못하도록 한 것이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학생들에게 표를 미리 몇 장 나눠주고, 조선말을 쓸 경우 다른 학생들로 하여금 그 표를 빼앗게 하여 나중에 남은 표의 숫자를 세어 벌을 주는 등, 학생들 서로 조선말을 쓰지 못하도록 감시하게 하는 악랄한 방법을 썼던 것이다.

일제가 우리말을 빼앗으려 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학들의 희생도 있었다. 주시경 선생은 일찍이 우리말의 문법을 정리하여 이를 일반 사람들에게 강습하는 노력을 불철주야 하시다가 과로로 숨졌으며,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우리말 사전을 준비하다가 일제에 피검되어 일부는 옥사하고 일부는 해방 때까지 투옥되어야 했던 역사가 있다. 오늘날 우리말이 이만큼이나 정리되고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선학들의 노력 덕분인 셈이다.

무심결에 쓰는 일본말, 언어의 식민지인가?

해방 후 일제의 흔적을 지우려는 움직임이 여러 분야에서 일어났다.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이 전국 곳곳에서 베임을 당한 것도 그러한 움직임의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일상적인 말에서도 일본의 잔재를 없애기 위한 많은 노력이 기울어졌다. ‘벤또, 우와기, 쓰리, 쓰미끼리’ 등의 일본말이 ‘도시락, 윗도리, 소매치기, 손톱깎이’ 등의 순수한 우리말로 바뀐 것은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거둔 성공적인 예이다.

그러나 한번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일본말은 그렇게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도 일본말은 꾸준히 우리말에 유입되었다. 일제의 강제적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본의 문화, 기술, 산업 등을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일본말까지 묻어오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말이 입에 밴 세대는 자신도 모르게 일본말을 썼고, 해방 후의 세대는 그 말이 일본말인 줄도 모른 채 사용하는 수가 흔히 있었다. 그 중에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우리가 먹는 음식과 관련된 분야에서 쓰이는 일본말로서, 곰탕에 넣는 다진 양념을 뜻하는 ‘다데기’, 매운탕에 대비되는 맑은 탕의 ‘지리’, 닭볶음탕 대신 쓰이는 ‘닭도리탕’의 ‘도리’, 생선회 대신 쓰이는 ‘사시미’, 양파를 의미하는 ‘다마네기’, 음식을 담아 내어 놓는 접시 ‘사라’, 고추냉이 대신 쓰는 ‘와사비’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뽀록이 나다’의 ‘뽀록’(들통), ‘구라를 치다’의 ‘구라’(거짓말), ‘기스가 나다’의 ‘기스’(흠), 막노동자를 뜻하는 ‘노가대’, 고무 대야를 의미하는 ‘다라이’, 무모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무대뽀’, ‘시원스럽게’ 또는 ‘솔직하게’의 의미로 쓰이는 ‘앗싸리’ 등의 말들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밖에 건축이나 자동차, 재봉 등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일본말 또는 일본말식 외래어가 엄청나게 쓰이고 있지만, 이런 분야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일반인들로서는 그 세세한 양상을 알아차리기조차 힘들다.

실제 국어학의 전문가조차도 일본말을 순수한 우리말로 오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라도 지역에서는 털로 짠 옷을 ‘개옷’, 털실을 ‘개실’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이때의 ‘개’를 ‘털’의 전라도 사투리로 잘못 아는 학자도 있었는데, 사실 ‘개’는 ‘털’을 뜻하는 일본말인 것이다. 글쓴이 자신도 이러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재빠르면서 활동적인 태도를 뜻할 때 흔히 쓰이는 ‘빠릿빠릿’을 형용사 ‘빠르다’에서 온 줄로 알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말 역시 일본말이었다.

일본어의 잔재, 생활 속에 한국화 되다?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된 지 일흔 해가 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아직도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상당수의 일본말들이 버젓이 쓰이고 있다. 게다가 일본말의 느낌이 나지 않도록 교묘히 들어와 있는 경우도 있다. ‘벤또, 우와기, 쓰리, 쓰미끼리’는 그 형태만 봐도 일본말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택배, 물류, 친수구역’과 같은 낱말들은 일본말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宅配, 物流, 親水區域처럼 한자어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택배’는 원래 door to door delivery라는 서양식 개념의 배달 제도인데, 일본에서 이를 ‘택배’로 번역하여 쓰여 오다가 우리말에 들어온 말이다.

‘물류’나 ‘친수구역’과 같은 개념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말이 일본 발음으로 들어왔더라면 누구나 이것이 일본말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을 터인데, 한자어로 들어와 우리식 발음으로 읽히다 보니 이 말이 일본말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이런 말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마치 우리말인 양 버젓이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런 데에는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의 책임이 크다. 경영학이나 경제학 또는 토목학과 같은 분야의 전문가들이 아무런 각성도 못한 채 일본식 술어를 그대로 써 온 탓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개념들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쓸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은 채 그대로 도입하다 보니 이런 꼴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말에서 쓰이고 있는 일본말은 몇 가지 층위가 있는 셈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서양 문명이 명치유신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왔다가 우리에게 유입되면서 들어온 말이다. ‘낭만’이나 ‘철학’과 같은 서양말의 번역어들이 이러한 예이다. 오늘날 ‘낭만’이나 ‘철학’을 일본말로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아마도 이런 전통이 이어져 앞에서 말한 택배(宅配), 물류(物流), 친수구역(親水區域)과 같은 말들이 일본말로부터 우리말로 유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화기와 지금의 시대는 엄연히 다르다. 개화기에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만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일본말 번역어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면 지금은 우리도 스스로 우리식의 번역어를 가질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의식의 문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말에 대한 애정으로 한글을 꽃피우자!

일본과의 교류가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교류를 틈타 일본말이 우리말 속에 유입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나 유럽 등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영어가 엄청나게 들어와 쓰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나 외국어를 받아들이는 자세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미가 같은 우리말이 있음에도 영어나 일본말을 그대로 쓴다면 그것은 언어적 허영일 뿐이다. 또한 우리말에 없더라도 바로 외국어를 쓰는 대신 기존의 우리말을 살린 새로운 말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스타킹을 ‘살양말’, 하이힐을 ‘뾰족구두’, 펌프를 ‘작두샘’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식으로 말을 만들어 써 왔던 전통이 있으니, 이를 계승하면 될 일이다.

그러므로 일본말은 당연히 배척되어야 하지만, 그보다도 우리말에 대한 애정을 기르는 일이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자신의 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음이 없으면 언제라도 외국어는 우리말 속에 들어와 쓰일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들어와 쓰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내치듯 외국어는 순수한 우리말을 죽이게 될 것이다. 무수한 한자어가 우리말을 대체한 역사가 이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광복 일흔 돌을 맞아, 말을 빼앗긴 채 벙어리로 살았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우리말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언어가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외침을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는 것이다.

대동문화 89호 [2015 7,8월호]

이기갑 목포대학교 국문과 교수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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