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63년(철종 14)으로, 농민 13세대가 한겨울 밤에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서 우수리강(江) 유역에 정착했던 때부터 시작됐다. 함경도 지방의 극심한 가뭄과 관아의 폭정에 못 이겨 정든 고향 산천을 버린 사람들. 이들은 신천지가 있는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에 정착했다. 이때부터 프리모리아(연해주 지방을 포함한 러시아 지역을 가르키는 러시아어)의 가슴에 피 같은 한인 이주 역사는 막을 연다.

사실 오래 전부터 국경을 넘어 북만주나, 연해주의 바닷가 쪽으로 들어가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당시 국경을 넘어 관군에 발각되면 참수로 다스렸는데도, 생존을 위해 두만강 강가에 있는 삼각주 녹둔도 넘어 연해주 땅으로 돌아다녔던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이 땅은 우리의 고토(古土)다, 부여, 북옥저 족이 거주한 지역이며, 고구려와 발해가 실제로 지배한 땅이었다가, 백두산 화산 폭발로 926년 발해 멸망을 끝으로 우리 민족의 손을 벗어나 잊혀진 땅이 되어 버렸다. 발해 이후 여진족의 금, 몽골 제국, 청 그리고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의 땅이 되어버렸다.

잃어버린 땅, 잃어버린 조국, 흩어진 민족

그러나 베이징 조약 이전에는 은연 중 조선 땅으로 묵과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두만강을 경계로 강이 흐르는 지점을 국경으로 삼았다. 그런데 1850년대 두만강 지역의 홍수로 인해 삼각주 양 갈래가 녹둔도와 연해주는 막아주고, 물길은 녹둔도와 조선을 갈라버려 영원한 국경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 1923년 재소 한인은 공식적인 통계로 10여만 명이 거주하게 됐다. 1932년 연해주 한인 학교 380개, 잡지 등 6종, 신문 7종 등이 발간되었고 실질적인 재소 한인은 25만여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이때가 연해주 시대의 최절정기였다.

1937년 여름부터 2,500여명의 지식인과 한인 지도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거나, 처형을 당했다. 스탈린의 대숙청이 시작됐다. 연해 지방의 한인들은 유대인이나 체첸인 등 소수 민족들과 함께 가혹한 분리 차별 정책에 휘말려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다.

9월 21일부터 11월 15일까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은 전원 6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로 내팽개쳐졌다. 171,781명이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 고려인[카레예츠]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중앙아시아의 황무지를 개척하고 한인 집단 농장을 경영하는 등 소련 내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가장 튼튼한 민족적 뿌리를 내렸다.

그러다 1992년 1월 소련이 붕괴되고 러시아 외에 11개 독립국가로 분리되면서 고려인들이 거주하는 국가에서는 배타적인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고려인들은 직장에서 추방당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다시 연해지방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이후 55~6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고려인들은 가장 넓은 면적을 지닌 러시아와 주변의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국가에 흩어져 고려인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한민족 예술 흔적 러시아 곳곳에 남아

혹여 빅토르 로베르토비치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를 아는가? 강력한 비트에 중저음으로 바닥에 깔리는 듯한 목소리의 소유자로 마치 지금 우리 광주의 충장로 복판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의 생김새를 지닌 젊은이였다.

옛 소련에서 젊은이들의 우상이었던 빅토르 초이라 불리던 고려인 3세로 소련의 록 가수이자, 싱어송 라이터 겸 영화배우이며, 소련의 록 그룹인 키노(КИНО)의 리더였다.

1990년 키노는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열어 6만 2천의 팬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해 8월 14일 다음 앨범의 녹음을 마쳤다. 그러나 8월 15일 아침 소련 라트비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투쿰스에서 빅토르 초이가 운전하던 차가 마주오던 버스와 충돌하였고 그 사고로 그는 죽고 말았다.

소련의 유력 잡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그의 의미를 간추린다. “빅토르 초이는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다른 어떤 정치인들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는 한 번도 거짓말하거나 자신을 팔아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빅토르 초이였고,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대중에게 보인 모습과 실제 삶의 모습이 다름없는 유일한 락커가 빅토르 초이이다. 그는 그가 노래 부른 대로 살았다. 그는 록의 마지막 영웅이다.”

빅토르 초이는 소비에트 음악과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들은 이전의 다른 어떤 그룹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음악과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다. 빅토르 초이는 러시아 록의 선구자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실행으로 소련 사회에 개혁·개방 분위기가 급격히 전개되자, 서방의 록 음악을 소개하여 유행시켰던 자랑스런 대중문화의 선각자였다. 지금도 매년 8월 16일에는 러시아 여러 곳에서 그를 추모하는 록 페스티발이 열리고 있으며, 이들의 노래는 일부는 록 가수인 한대수, 록 밴드인 윤도현 밴드 등에 의해 한국어로 번안되어 불리기도 했다.

그의 음악 성향은 펑크록 스타일에 러시아 특유의 우울하면서도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저항적이며 자유지향적인 노래로 소비에트 전역의 젊은이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가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자 소비에트 전역에서 5명의 여자가 자살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카잔 ·키예프 ·알마아타 ·타슈겐트 등지에 생겨났다.

또한 모스크바 예술의 거리인 아르바트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의 벽이 생기기도 하였다. 1993년 모스크바 콘체르트 자르 앞 스타 광장의 명예가수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 한 사람 초이의 뒤를 잇는 대중예술인도 있다. 아니타 초이 (Anita Tsoy, Анита Цой). 뛰어난 가창력과 강렬한 무대 매너의 소유자이기도 한 아니타 초이의 아버지는 과학자였는데, 아니타가 어릴 때 실종되어 생사를 아직도 모른다고 한다. 그녀는 여성 대중가수 아니타 초이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공훈 예술가 칭호도 받은 가수로 사회성 짙은 가사와 작곡 능력, 가창력을 겸비한 싱어송 라이터로서 사랑 받고 있는 고려인 3세대 출신이다.

정추 - 빅토르 초이 - 아니타 초이

양림동 출신의 천재 음악가로 추앙받던 정추(1923~2013) 선생. 그는 ‘검은 머리의 차이코프스키.’라고 불렸다. 예술가의 길은 고단했을까? 1941년 광주고보(현 광주일고) 재학 중 조선어 금지에 반대 운동 때문에 퇴학을 당한 그는 일본으로 가서 음악을 공부한다.

1946년 월북했으나 독재와 개인 우상화를 반대하다, 1958년 소련으로 망명했다. 차이코프스키 음대를 졸업한 그는 사상 처음으로 만점을 받아 ‘천재 음악가’라는 호칭을 들었다. 그 후 고려인들이 모여 사는 카자흐스탄으로 간 그는 고려인들로부터 구전 가요 1,068곡을 채록했고, 그의 대표작 ‘조국 교향곡’은 궁상각치우 5음계를 사용해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한 작품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는 2012년 광주 남구청의 초청으로 ‘아리랑 유네스코 등재 염원 1만 5000명 오카리나 대합주’의 지휘를 맡기도 했다. 광주 남구청은 정추 선생의 영구 귀환을 추진했으나, 2013년 6월 13일 귀국을 앞두고 현지에서 타계하고 말았다.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를 담은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을 만드는 등 300여 편의 관현악곡과 실내악곡, 칸타타 등을 남겼다. 카자흐스탄의 음악 교과서에는 그의 작품 60여 곡이 실렸고, 1988년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공화국 공훈 문화 일꾼’ 칭호를 받기도 했다.

우리의 부모의 부모들이 힘든 노동을 하면서 노동요로 흥얼거렸고, 툇마루에 아이를 잠재우기 위해 흥얼거렸던 자장가를 듣고 자란 아이는 흥겨움의 DNA 고스란히 전해져, 문화예술판의 거목이 되었듯이 우리의 각별한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혼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것은 동토의 하늘도, 강제 이주의 역사도 막지 못했다.

광복 70년을 맞은 우리 광주의 예술혼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역사도 예술도 영원할 것이다.

대동문화 89호 [2015 7,8월호]

박재완 오지 탐험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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