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백년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문화유산 중에 대표적인 것은 무엇일까. 아마 조선왕조실록과 훈민정음을 꼽을 것이다. 한글 창제와 조선왕조실록 이 두 가지는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자긍심을 만천하에 보여준 상징물이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 까지 25대 왕조 5백년 장구한 세월동안의 기록물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는 가장 훌륭한 문화유산이다.

국가의 크고 작은 일과 자연 재해, 풍속 지리 등 후세에 전할 만한 사안들이 하루도 빠짐없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분량이 1,866권(887책)으로 방대한데 이를 국책사업으로 번역한 결과 380페이지 책으로 413권이라는 책이 만들어졌다. 이 엄청난 분량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록이 가치가 높은 이유는 방대한 분량에 있는 것이 아니라, 30여명의 젊은 사관들이 금력의 유혹과 권력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목숨보다 더한 사명감으로 사실 그대로 올 곧게 기록했다는데 있다.

왕과 관료, 사대부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춘추필법에 의해 평가되고 기록된 역사였다. <왕조실록>은 임금은 물론 어떤 권력자도 함부로 열람 할 수 없었는데 이것은 절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훼손 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제도였다.

예컨대 세종이 부왕 태종의 실록을 열람하고 싶은 생각에 사관들에게 “과인은 실록의 내용을 절대 고치지 않겠다.”' 라고 확약을 하며 간청을 하자 사관들은 “전하의 약속은 믿지만 신들은 전하께서 언제 어디서 부왕의 실록을 열람 하셨다는 사실을 또한 전하의 실록에 적어야만하고, 이는 후세 왕들에게도 열람의 전례가 되기 때문에 열람을 용납 할 수 없습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한다.

반면, 연산군은 사관을 억압해 실록을 열람하여 어머니 윤씨(성종 왕비)가 폐비가 되는 과정에 동참한 인사들을 대거 숙청하는 갑자사화의 참극을 초래하고 만다. 이는 실록을 열람하거나 고쳐서는 안 되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실록은 기록 못지않게 관리에도 신중을 기울였다.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를 서울과 지방에 각각 두어 만일의 사태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다카하시도루 작 <식민지 조선인을 논하다>라는 책은 한국인의 부끄러운 역사인식을 잘 꼬집고 있다.

"…조선인 스스로도 자국의 역사는 자못 경시하여 불필요한 학문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송나라 때 주희가 쓴 역사서 <자치통감강목>은 산간의 벽촌서당이 있는 곳이라면 읽지 않는 곳이 없다. 때문에 조선의 학동들은 신라 태종의 삼국통일의 사적을 알기도 전에 한(漢)나라 말 삼국의 정립과 조조 유비가 중원을 다툰 것을 더 잘 알게 된다.

또 자국의 역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탓에 자국 역사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호사가들이 단편적으로 엮은 기사괴문으로 가득한 야담 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과장된 역사이야기 정도다. 어떤 사건이 왜 일어나서 어떤 결과를 이루었나 하는 역사적 인과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것이다."

역사학자 E. H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 했고, 단재 신채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또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치란(治亂)의 역사는 후세에 귀감(龜鑑)이 되고 도리어 스스로의 인격수양에 도움을 주게 된다. 역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라 하지 않은가. 정치에 관한 참고서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칭송 받은 <자치통감(自治通鑑)>이나, 삶의 귀감이 되는 <명심보감(明心寶鑑)>의 책 이름에 거울 감(鑑)자를 쓰는 것은 그 이유이다.

요즘 한국사회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전환 문제로 반목 갈등 속에 들끓고 있다. 국정교과서가 무엇인가. 국가가 직접 편찬, 저작권이 국가에 있는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라 하고 민간출판사가 국가의 검정·심사를 통과한 뒤 발행한 교과를 검인정교과서라 한다. 국정교과서는 역사가 힘의 논리에 의해 왜곡 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는 제도이다.

동서고금의 수많은 위정자들은 자신의 과오와 패덕을 미화하기 위해 역사왜곡을 마다하지 않았다. 헤로도토스는 <역사>를 기술하면서 “신(神)은 인간의 오만에 대해서 보복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라고 했으며, 간디 역시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들의 권력은 붕괴되었으며, 결국 신의 보복을 받았다”고 했다.

원로 역사학자 이만열(전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교수는 정부 여당의 교과서 국정화 운운에 대해 “모멸감이 든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제도의 후퇴뿐 아니라, 국격(國格)을 현저히 떨어뜨리는 일이며 굉장한 상처”라고 했다.

역사의 평가와 심판이 무엇보다 준엄하다는 사실을 21세기, 바야흐로 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안다. 민주화를 이룩한 지 30여년,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국민들은 일방적 통보보다는 소통을 갈구하는 것이고, 다양한 가치관으로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 그런 아름다운 나라를 소망하는 것은 아닐까.

대동문화 91호 [2015 11,12월호]

조상열 발행인  ddmh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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