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상영된 영화 ‘암살’은 1930년대 상해 임시정부를 거점으로 활약했던 독립운동가의 활동상을 보여주면서 1천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온 흥행작 중의 하나였다. 때마침 광복 70주년에 즈음하여 개봉된 이 영화는, 또한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해결 과제의 하나인 ‘친일파 청산’ 문제를 새로이 부각시키며 대중의 관심과 눈길을 끈 바 있었다. 특히 이 영화는 김구나 김좌진, 홍범도, 이청천 등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 운동가들과 달리, 약산 김원봉이나 이름 없는 여성독립군들의 활약상을 보여주면서 그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조명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외세에 의해 침탈된 조국의 주권과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기 위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선 이들이야말로 조국 해방 투쟁의 최전선에 섰던 인물들이 누구인지 잘 보여주었던 영화였던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가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독립군들처럼 직접적인 행동으로 옮긴 자들만이 일제 침략에 저항한 것은 아니다. 이들처럼 극단적인 선택의 하나인 무장투쟁의 형태는 아닐지라도, 국권 상실에 맞서 다양한 형식과 방법의 저항이 이뤄졌던 것이 사실이다. 아예 조국을 떠나 만주 등 국외에서 활동했던 독립군이나 일단의 애국지사들과 달리,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지배하에 살아가면서도 끈질기고 완강하게 일제에 대항해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너무나도 명백한 힘의 열세와 불균형을 직시하면서도, 비록 소수이나마 일제 체제에 동조하거나 굴복하지 않은 채 불굴의 삶의 용기와 태도를 보여준 인물들이 있다.

감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서시」)를 소망했던 윤동주 시인이 그 중의 하나다. 일제 강점기 동안 훼철하지 않은 시인 중의 한 명인 윤동주는 일단의 독립군들처럼 결코 직접적인 투쟁에 나선 인물은 아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1943년 항일운동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가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문사한 게 전부다. 심지어 윤동주의 경우 적국인 일본 대학에 유학하며 ‘히라누마 도슈(平沼 東柱)’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독립군들의 투쟁과 비견되는 저항의 반열에 세우는 것은 솔직히 무리다.

침묵도 저항이었다

하지만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인 세력과 맞서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저항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만해 한용운이 그의 시 「님의 침묵」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완강하게 ‘침묵’하는 것도 일종의 저항이다. 일제 강점기에 변절하지 않은 시인 중의 한 명이었던 정지용 시인처럼 ‘슬픔도 꿈도 없이’ ‘차고 올연(兀然)히’ 깊은 산 속에서 ‘겨울 한밤’을 ‘견’(「장수산 1」)뎌내는 불굴의 고독 역시 움직일 수 없는 저항의 한 형태다. 어쩔 수 없이 일제의 지배와 통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김영랑 시인처럼 ‘모란이 다시 피기까지’ ‘찬란한 슬픔’(「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묵묵히 감내하려 했던 작가적 자세에서도 소극적이나마 불퇴전의 저항 의식을 엿볼 수 있다.

한국 문학사의 최대 미스터리(?)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육사와 윤동주의 시의 저항성 여부에 대한 의문은 여기에서 풀린다. 이른바 저항 시인은 곧 저항시라는 등식을 거부하며 매우 예외적으로 서정적이고 목가적이기까지 한 그들의 시들은 시와 실천을 분리해서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이육사의 시 「절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데다 무릎 꿇어야’ 할지 모를 만큼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극점에 스스로를 세운 결과다. 그 어떠한 권력도, 압제의 틈입도 허락하지 않으려는 정신적인 고투가 문득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히는’ ‘청포도가 익어가는 고장’( 「청포도」)을 꿈꾸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시집 한 권 내지 않았다는 것과 소위 문단 등단이라는 제도나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육사와 서로 닮아있는 윤동주 시인의 경우도 역시 그렇다. 비록 적국(敵國)인 일본 본토로 유학을 떠나고, 창씨개명을 하면서도 윤동주는 그의 마음속에 일제라는 상징계가 비집고 들어설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 빈자리를 어떤 경우에도 더럽혀지지 않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채웠다. 한낱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한 청년의 순결성이 그 자신이나 민족 앞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의 ‘길’로 인도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존엄을 지켜라

윤동주 시인은 그의 시 「서시」를 통해 문득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그가 ‘오늘밤’뿐만 아니라 ‘어젯밤’에도 그가 끊임없이 반성과 성찰을 해온 인물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내일밤’에도 역시 그러한 생의 자세를 일관되게 견지해갔을 시인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구절은 모든 이들의 자기실현의 길이 마치 ‘별’이 일부러 ‘바람에 스치’우는 것처럼 고정불변할 것 같은 ‘나’의 자아를 뒤흔들고 깨우며 세계의 고통과 불안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때 그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을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달리 말해, 윤동주의 시는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인들과 달리 굳이 어떤 슬로건이나 문학적 이념을 내세우지 않는다. 특히 그의 시 속에서도 이렇다 할 대안이나 전망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겸손하기만 하다. 하지만 한없이 낮고 침착한 그의 시적 음성 속엔 절대적인 힘의 열세와 열악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자신의 불리함이나 무력함을 탓하지 않은 채 자신의 존엄과 자존을 지키고자 했던 자의 고집 센 비타협성이 스며들어 있다. 동시에 그 속엔 가족과 조국을 버린 채 무장 투쟁에 나선 독립군들과 비교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절대 불복종의 선언이 들어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국권 상실이라는 비극 속에 놓여있었던 윤동주 시인의 생애가 주는 교훈은 바로 이것이라면 지나친 생각일까.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윤동주는 그 비극 속에서도 자신의 생애가 결코 도덕적 패배나 치욕스런 굴복으로 이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압박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타협이나 굴종의 길을 걷지 않았다. 대신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고자 했다. 그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양심의 부름에 응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시 속에 어쩌면 일제 강점기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깊은 심층이자 최대치의 저항 의식을 되새기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시대에 다시 서시를 생각한다

올해는 조국광복 또는 조국 해방 70주년이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윤동주 시인의 사후 70주년이 되는 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새삼 윤동주 시인의 시와 생애를 되돌아본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아마도 그건 우선 부정의와 불의에 저항하고 투쟁하기보다는 순응하거나 체념하기에 바쁜 오늘의 시대 속에서 지난 시절의 역사적 야만을 기억해내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이 보여주듯이 ‘어머니’로 상징되는 조국이나 민족에 대한 자기 구속성, 곧 한 인간의 성장을 돕고 보호해온 장소와 그 장소에 대한 ‘추억’과 ‘사랑’의 소중함과 관련되어 있을 터이다. 윤동주의 길이자 우리들의 과제인 「서시」의 길이 여전히 미완성인 채 우리들을 불현 듯 불러 세우고 있는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대동문화 91호 [2015 11,12월호]

임동확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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