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은 다른 지역에 비해 유난히 주조문화가 발달된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13개 읍면에 모두 한 개 이상의 주조장이 꼭 있었을 정도였으니 그럴 법도하다. 거의 대부분의 전통주가 곡물을 주원료로 사용하다보니 전국 최대의 농업군인 해남에서 주조장이 성행한 것은 이곳이 풍성한 곡창 지대였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별한 문화적 혜택이 불비했던 농산어촌 사람들은 배고픔과 힘에 부친 농업 노동의 시간들을 걸쭉한 농주 한 사발로 달랬다. 자연히 주조장은 번성했으며, 이 지역에서 애주가들 사이에서는 술맛 좋은 곳을 정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곡창 해남의 주조 문화

해남에서는 마산막걸리(해남군 마산면 소재)와 해창막걸리(해남군 화산면 소재)는 애주가들 사이에 명주로 통했다. 술 꽤나 드시는 마을 어른들은 언제나 두 패로 나뉘어 자기 지역의 술맛이 최고라고 주장했다. 이때마다 술도가에서는 전통을 빚는 정성 어린 맛으로 그 지역 애주가들의 위신을 세워주었다.

이에 뒤질세라 이웃 주조장에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품질 좋은 막걸리를 공급하기에 이르렀다. 구기자와 감초로 약성을 가미한 삼산막걸리(해남군 삼산면)와 천연유자향을 첨가한 화원막걸리(해남군 화원면)가 개발되었고, 시큼털털한 맛이 일품인 고구마 막걸리는 오랫동안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독특한 맛을 선보였다. 곡물 외에 지역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 여러 종류의 술이 만들어졌고, 명태 코다리, 산채와 같은 궁합이 맞는 다양한 안주들과 앙금을 가라앉혀서 맑은 국물(웃국)을 마시는 등 계절에 따라 술을 마시는 풍속도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해남을 대표하는 술을 논하자면 단연 무형문화재 제25호 진양주를 꼽는다. 진양주는 어엿한 양반가의 술로 아직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만찬주로 지정되어 그 인기를 가늠하기도 했다. 그러나 찹쌀을 주원료로 사용하는 진양주는 막걸리와는 차별화 된 방식의 청주였기에 제사에 사용할 제주(祭酒)나 명절 선물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이 지역의 애주가들은 함경도식 소주인 녹산주를 잊지 못한다. 피난민이 내려와 해남군 삼산면 나범리에 터를 잡아 술을 빚다가 대를 잇지 못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녹산주의 향수는 지역 애주가들 사이에 늘 아쉬움으로 회자되곤 했다. 전통주의 인식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요즘, 전통방식으로 술 빚는 명인이 많이 생겨날 정도로 해남은 전통술 연구가 활발하다.

근대문화유산격인 해창주조장

해창주조장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오래된 역사와 문화유산이 이곳의 자랑거리다. 1923년 일본인 시바다 히로헤이가 정미소를 설립, 그로부터 4년 후 본격적으로 양조장을 운영했다. 이전에는 가양주 형태의 술을 빚다가 1927년 공식적으로 양조장을 운영했으니, 이곳 막걸리의 역사는 1세기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경기도 양평의 ‘지평주조장’을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술도가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 역사를 깊이 있게 따져본다면 ‘해창주조장’의 역사와 대동소이하다. 전남지역에서는 1930년대 시작한 ‘남평주조장’의 역사와 술도가의 가옥이 최고(最古)의 물망에 올랐지만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해창주조장은 지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4대째 새로운 주인을 맞았다. 3대째 주인이 30여 년 넘게 운영해 오다가 8년 전 지금의 주인장 오병인, 박리아씨 부부에게 기술 전수를 하고 물러났다. 부부는 도시생활을 접고 귀향해 오로지 전통의 맛과 멋을 살려내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젊어서 오병인 씨는 여행을 즐겨했고, 전통문화와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우연한 여행길에 해창주조장의 술을 맛보고, 그 맛에 반했다. 오랜 단골로 해창막걸리 애찬론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연유로 3대째 주인의 적극적 권유가 있어서 지금의 주조장과 술 빚는 기술을 전수받게 되었다.

정원이 아름다운 바로 그 술도가

일제시대부터 운영되어 온 주조장은 적산가옥의 형태가 현대식으로 조금 바뀌었지만 정원은 그대로 자연 형태로 유지되어 있다. 부부는 정원의 가치를 바로 알아내고 지난해 2억여 원을 투자해 원형을 살려 재정비했다. 이곳을 사람들이 머물러 가는 주조장, 찾아오는 주조장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휴게쉼터와 주변을 스토리텔링화해서 여행객들에게 주조장의 새로운 문화를 선보이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그 결과 2012년 ‘KBS 한국기행’에 정원이 아름다운 주조장으로 소개되었고, 올해 농림축산식품부 지정 ‘찾아가는 양조장’에 선정되어 많은 기자들이 이곳을 찾았다. 해창주조장은 전국에서 유일무이하게 정원이 아름다운 주조장으로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되었다.

해창주조장의 막걸리 맛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눈에 반하게 만든다. 아무리 마셔도 머리가 아프지 않는 것은 첨가제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창막걸리의 무 첨가제 비법은 찹쌀과 멥쌀의 비율을 같게 하고, 엄격하게 햅쌀 사용만 고집하기에 막걸리 맛을 개선할 수 있었다. 단맛을 내는 사카린이나 아스파탐은 이곳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 넓은 들녘에 품질 좋은 곡식들이 넘쳐나고, 물맛 좋기로 소문난 해남에서 생산되는 자연의 맛에 인위적인 것을 가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부부의 생각이었다.

곳곳마다 문화유적, 옛이야기 풍성

해창만은 어성천을 따라 이어지는 해남 제1의 관문이었기에 조선 시대 훨씬 이전부터 포구로서 역할이 중요시 되었던 곳이다. 고인돌과 같은 선사시대 유적과 마한의 마을 형태를 띤 유적들이 발굴되는 일이 많았다. 국문학의 비조인 고산 윤선도가 해남의 녹우당 사랑채를 짓기 위해 효종이 하사한 수원의 고택을 뜯어서 운반해 왔을 때, 이곳을 통과했다는 기록은 해창포구가 해남 중심권역으로 가는 중요 관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조세를 걷어 들여 곡식을 저장하는 조운창이 있는 지역이 해남지역엔 남창, 북창, 해창 세 곳의 포구가 있다. ‘바다 옆에 있는 창고’란 의미의 해창(海倉)이란 이름도 그렇게 나왔다. 포구에는 당연히 쌀이 넘쳐났고, 일본 사람들은 조선인이 좋아하는 술을 만들어 판매했다. 그것이 해창주조장 막걸리의 시조다. 당시까지는 고천암 방조제가 생기지 않았던 터라, 지금 해창주조장 바로 앞은 바다였다. 조선시대에는 연곡 마을에 해창포구가 있었지만 이후 이곳에 신해창(新海倉)이라는 지명으로 옮겨지면서 정미소와 주조장이 생겨났다.

1대 주인장 일본인 시바다 히로헤이는 마을의 출산한 임산부에게 미역국을 끓여 주었을 정도로 조선인의 인심을 많이 얻었다고 한다. 그래서 창립주의 인품을 되새기며 3대, 4대에 이르는 이곳의 주인장들은 주변에 인심을 전하는 일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해창주조장 정문 앞에 오래된 나무들과 노송이 많은데, 소나무가 서있는 도로변 민가 담장을 의지하고 3개의 비석이 일렬로 서있다. 해남군수를 지낸 이용우의 선정과 휼민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03년에 세운 이용우 선정비(李溶愚 善政碑)와 서울선비 신씨가 이곳에 은거하다가 그의 집 두 채와 논 서너 마지기를 동네에 헌납하고 떠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80년 세운 신선생 백파소요대비(申先生白坡消遙臺碑)가 있다. 오른쪽 호패 모양의 비 하나는 앞면이 심하게 훼손되어 비명은 알 수 없지만 뒷면의 내용으로 보아 1884년 건립된 것으로 이 역시 누군가의 선행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전해져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후한 인심을 나타내 주는 듯하다.

그 당시 인근 지역 삼산면 송정마을에는 만석지기 황산면 출신 이 참판이 살았는데, 이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큰지 가진 것을 또 갖고 싶다는 뜻의 ‘또마니’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이 사람의 고약한 성품은 팔도에 소문이 날 정도였고, 그의 땅을 밟지 않고는 어디든 갈 수 없어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도 세금을 내야할 정도였다. 세월은 흐르고 빈 터로 남은 그의 고택이 무너져 내리자 어느 누구도 근처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 마침내 그 흔적마저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묻혀버렸다.

주조장의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

군사독재를 피해 해남에 은거하면서 장길산을 집필한 소설가 황석영이나 해창에서라는 시를 남긴 김지하 시인은 고천암 너른 벌판에서 자유를 향한 몸짓을 펼쳤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허허벌판과도 같은 삭막한 해창나루에서, 또 어떤 이들은 번성한 시대의 사러리 강변, 사러리 들녘에서 자연경관에 흠뻑 취해서 자유롭게 노닐며 ‘소요유’(逍遙遊)했을 것이다. 혁명적 목소리로 한국문단을 일깨운 김남주 생가가 지척이고, 남도의 정서와 전통가락을 빌려 민중의 고난과 저항의식을 표현한 여류시인 고정희 생가가 인근에 있다. 어성천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조선의 풍경 좋은 이곳 ‘삼산팔경’의 노래 속에서 고스란히 그 역사를 말해준다.

해창주조장은 이제 현대적 감각을 도입한 주조장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보이고 있다. 오로지 고유의 술맛을 지켜내고, 자연을 벗 삼아 ‘소요유’하겠다는 생각이 4대의 맥을 잇는 해창주조장 주인장 머릿속에는 이미 각인되어 있다. 누구보다 술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고,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이들 부부에게 해창주조장은 지역의 소중한 관광 자원으로 발돋움해 나가는 문화 공간이다.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 서 있다/옛날엔 번창했던 포구/고천암 막아/이제는 폐항 돼버린 해창

통운 창고 앞에 아득하게 서 있다/한 사람은 취해 한 사람은 깨어/개마저 짖질 않고/국밥집 터엔 바람만 불고

다가서는 나를 꼼짝 않고 노려본다/멀리서 물오리들 떼지어 헤엄치고/삭은 똑딱배 물결에 흔들리고

구름 낮게 드리운 날 거기 그 자리/내가 서 있다/반쯤은 취해 반쯤은 깨어/둘로 찢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사그라드는 노을 함께

아득하게 사라진다/점차 떠나는 소리/차 모습마저 고개 너머 자취 없고/두 사람도 사라진다. - 김지하 ‘해창에서’ -

대동문화 91호 [2015 11,12월호]

정지승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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