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을 ‘오타쿠‘라고 한다. 한 분야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반면 사교성이 부족하다는 뜻의 다소 부정적으로 쓰이는 일본어이다.

근래에 들어서는 전문적인 분야의 광팬으로 쓰이는 단어로 다소 긍정적인 측면이 부각되고 있지만 아직도 사교성이 부족한 ’괴짜‘라는 인식을 벗을 수 없다.

나는 ‘오타쿠’였다. 만화책을 너무나 좋아했고 감성적으로 충만했던 사춘기 시절에 만화주인공의 대사들을 줄줄 외우고 다녔었다. 남들이 ‘SES’와 ‘핑클’의 가요음반을 구입할 때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주제가음반을 구입하고 또 그것들을 수집하였다. 포스터와 한정판 만화책은 물론 구할 수 없다면 불법복사를 해서라도 수집하였다.

친구들과 어울리기 보다는 구입한 만화책과 애니메이션 음반을 사들고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주인공이 나오는 게임을 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이렇듯 나의 청소년기의 대부분의 시간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빠져 지냈다.

대학입시와 진로문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길 원하시는 흔한 부모님들의 기대에 반하여 공부 안하고 놀기 좋아하는(잘 놀 줄도 모르는) 그저 그런 특징 없는 삼류드라마 속 흔한 아들이었다. 공부하는 것이 정말 싫었던 나에게 부모님의 기대와 엄한 집안 분위기는 크나큰 스트레스였다.

그렇게 대학입시 기간에 가까워졌고 집안의 골칫덩이였던 나는 마침내 자존심 강하셨던 부모님의 눈물을 보게 되었다. 대학 진학은커녕 고등학교 졸업시험이 있는 시절이었다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할 판이었다. 나에게 부모님의 눈물은 발등의 불이 되어 초조함과 좌절감의 연속인 고등학교 3학년 시절을 보내게 하였다.

오르지 않는 성적은 적성에 맞지 않는 공부와 함께 나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자포자기 심정이던 나에게 만화책 주인공을 신나게 베껴놨던 내 연습장과 미술대학에 진학하려던 친구가 생각났었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그리기로 상을 타보기도 하고 사생대회에 나가보기도 했었던 나에게 만화그리기가 재미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웠었다. 부모님께 만화를 좋아하니 차라리 관련 학과에 진학하여 만화와 관련된 공부를 하고 싶다고 말씀을 드렸다.

부모님께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꿈과 진로희망을 말하던 철없는 아들에게 너무도 쉽게 지지해 주셨고 아낌없이 지원해 주셨다. 미술학원에 등록한 것은 바로 말씀 드린 그 다음 날이었다.

입시미술과 수능을 동시에 준비하면서 힘이 들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기간이라는 생각에 즐겁게 고등학교 생활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수능성적이 저조했던 나는 담임선생님과 학원 선생님의 권유로 원하는 학교 지원보다 다른 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일단 대학에 진학을 한 후 원하는 학과로 편입학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죽어도 공부를 하기 싫었던 나로서는 재수생활을 통해 다시 이런 입시지옥을 맛보는 게 너무도 싫었기에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그러다 보니 만화와는 다소 거리가 먼 순수예술학과에 지원하게 되었고 합격하여 캠퍼스에 입문하게 되었다. 일단은 학교 수업 커리큘럼을 따라 1~2년은 학교생활을 하며 편입학 준비를 해야 하기에 기왕 이렇게 된 바에 대학생활에 충실하기로 하였다.

분식집 메뉴판 뒤의 서도호

뭐든 쉽게 질려버리던 성격 탓에 그림도 공부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던 나는 사회진출에 가까워지는 대학졸업이 두려웠다. 뭘 해야 할지도 몰랐고 제대로 뭔가를 해본적도 없었는데 나이는 벌써 20대 중반이 넘어가 있었다.

때마침 외국유학을 마치고 강의를 하시던 한 강사선생님을 만나서 예술에 대해 배우고 작가생활을 곁에서 볼 수 있게 된 계기가 만들어졌다. 용돈벌이와 그 수업의 좋은 점수를 받기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작가 어시스턴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예술에 대해 이렇게 작업을 하는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에 무언가 극적인 반전의 시작이 있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한 창 술에 취해 알콩달콩 연애와 놀기 바빴던 시절 술자리 한번 잘 어울리지 않고 열심히 그림만 그리던 친구가 생각이 났다.

뭔가 배울 점이 있을까 기웃거리다가 친해졌고 많은 것을 그 친구를 통해 배우게 되었다. 나는 술도 마시지 않는 친구 녀석에게 분식집 떡볶이를 사주며 급한 마음에 그 친구가 일러준 것들을 메뉴판을 찢어 받아 적기 시작했다.

“한국 작가로 현재 유명한 작가는 서도호라는 작가이고 네가 관심을 갖는 영상분야는 백남준이 있다. 최정화라는 작가와 이불 이라는 작가 등등”

생소하게 처음 들어본 이름을 일러주고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라는 말을 해주고선 배를 두드리며 떠나던 친구 뒷모습을 보며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열심히 검색하고 공부하며 작가선생님의 조수 역할을 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이 ‘작가‘이지 그 외에는 알지도 못했던 나는 정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작가생활은 배고프다?

입시미술에 질려있던 터라 작업을 시작하는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작업 메시지 전달에 대해 고민했었다. 마침 운 좋게 유학파 강사선생님들께 수업을 받으며 미디어아트에 대해 배우고 관련된 유명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의 작품들을 실제로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또 관련 분야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을 만나볼 기회도 얻게 되었다.

전역 후 남은 대학생활 2년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어느덧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졸업 후 진로는 당연히 작가 생활을 하려고 하였고 나는 공부가 부족한 것을 느끼고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게 되었다. 졸업 후 작가선생님의 조수 일을 적지만 월급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곁에서 힘들게 생활을 유지하며 작가생활을 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태우며 자연경관이 있는 별장 같은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삶이 흔히들 알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가들은 배고픈 것과 일반적인 삶, 즉 안정적 직장에서 고정수입을 얻으며 가정을 꾸리고 나아가 노후를 준비하는 것과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자신의 작업에 열과 성을 다하여 모든 것을 불태우며 전시 오픈식을 끝내고 다음 전시와 다음 작품을 준비하는 워크홀릭이었던 작가선생님은 자신의 작업 세계관을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것에 더 중점을 두었다.

이런 선생님을 따라 다니며 작가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느라 집에도 잘 들어가지 못했던 나에게 말없이 하고자 하는 바를 지지해주시던 부모님께서 나에게 한 말씀 하셨다.

작가가 되는 것보다 무언가 관련된 다른 일을 하여 돈을 벌어 너도 너의 삶을 꾸려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이었다. 작가가 되면 배고프고 불투명한 미래 밖에 없다. 성공하는 작가는 손에 꼽을 정도이며 작품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고 힘든 생활만 하게 될 것이라며 걱정하는 부모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었다.

졸업하는 선배들은 남아서 작업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몇몇 작업을 계속 하는 선배들은 아르바이트 생활의 연속이었고 그 외의 선배들은 저마다 다른 분야에 취직하여 회사원이 되었다. 취직이 된 선배들은 오히려 잘 된 일이다. 취직도 하지 못하고 부모님 지원을 받으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 선배들도 있었고 결혼하여 그냥 주부가 된 여선배들이 대다수였다.

작품을 만들고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도 작업할 돈이 없었고 부모님의 원조만 받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렇듯 나뿐만 아니라 청년작가들의 과반 수 이상이 나와 비슷한 처지에 꿈을 쫒아 생활을 하고 있다.

반면 그래도 내 꿈을 지지해주시는 부모님의 원조라도 받을 수 있었던 나는 행복한 편이었다. 부모님께서 지원해주신 500만원과 25만원의 월세 사무실을 작업실로 얻으며 그렇게 나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로 그러기에 앞서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만두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현실적으로 꿈꾸는 사람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어느새 유치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월세와 공과금을 걱정하고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고 모인 돈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생활이 먼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안정적인 보호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작업은 2번째가 될 수밖에 없다. 마음먹기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 힘들어서 포기하는 것이든 작업을 근근이 해 나갈 생각을 하는 것도 일단은 안정적인 삶이 되고 나서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작업을 포기하려는 시도는 단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으며 이것만이 나를 증명하는 일이다.”라고 멋들어지게 말하며 멋지게 살고 싶지만 그것도 나중에 두고 볼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이루고 싶은 목적이 분명하며 현재 그것들을 하나씩 해 나아가고 있다는 지금의 현실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족 혹은 불만족을 말하는 문제도 나중에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이상을 구분 짓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나는 그렇게 현실적으로 이상을 향해 꿈꾸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대동문화 93호 [2016 3,4월호]

김명우 미디어아티스트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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