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는 아홉 살 때부터 지금까지 장래희망

길을 걸으면서 키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보면 같은 나무라도 다 새들에게 둥지를 틀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을 본다. 어느 나무에는 둥지가 두 개, 세 개씩 자리를 잡고 있는데 앙상한 가지들만 보이는 나무들도 있다.

나는 어떤 나무의 모습으로 서 있는가?

나는 어떤 나무의 모습으로 살고 싶은가?

나는 어느 곳의 나무에서 둥지를 틀고 살고 싶은가?

지금도 나무들을 바라보며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장래희망이 화가였다. 사십이 된 지금도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더 이상의 꿈과 목표나 고지에 올라야겠다는 열정이 크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작업하고 전시회를 자주 열어도 그 결과는 헛헛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벽에 늘 가로막혀서 인정하고 싶지 않는 나의 한계를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술분야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비슷한 경험과 비슷한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의 문제는 싫거나 어려운 현실을 일부러 망각해 버리고 가슴 속의 뜨거운 희망이 없는 채로 작업을 하고 전시회의 횟수를 줄이는 행동이었다. 아마도 노력과 노동한 시간에 비해 물질적으로 보상 받지 못하는 예술가의 삶을 두려워하는 심리가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예술가의 예민한 감각과 상상력 그리고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인데 말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2009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산수동에서 2001년부터 작년까지 20평의 작업실을 15년 가지고 있었다. 이사를 해야 할 상황이 되었기에 깨끗한 그림들과 최근 작품들은 집으로 옮기고, 낡고 오래된 작품들과 여러 책들은 후배 작업실에 임시적으로 맡겨두었다.

이사 갈 새 작업실이 없이 15년 동안 축적 된 어마어마한 짐들을 혼자서 한 달 동안 버리고 정리하는 과정 중에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영화 ‘미션(The Mission, 1986)’이나 돌부처를 허리에 묶고 산을 오르는 김기덕 감독의‘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의 한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

더 큰 일로 힘들게 사는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너무 힘들었고 정말로 고행의 시간이었다. 그림을 포기하거나 취미로 그리면 얼마든지 편하고 즐겁게 살 수 있는데 왜 헛 구름을 쫒아 가려하냐고 이해를 하지 못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마음에 내 존재가 큰 짐이 되는 것 같아서 되도록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나의 일들을 해 왔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란 말이 있는 것처럼 나의 삶에서도 행운은 있어 왔다. 나름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지금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은 나를 돕는 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작년 겨울에 작업실 이사와 정리로 힘든 상황에서도 대인시장‘한평 갤러리’에서 초대 기획전을 했다.

경기도에서 대인시장과 전시를 보러 온 한 관람자께서 나의 어린 왕자 시리즈 작품을 보시고 자신의 아들을 12호 캔버스에 그려달라는 의뢰를 했다. 목돈이 필요한 시점에서 큰 도움이 됐다. 자칫 작업을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의뢰받은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서 집에서 2개월 이상 열심히 작업을 하게 된 점이 너무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림이 마쳐질 즈음 양림동 펭귄마을에 새 작업실도 얻게 되었다.

펭귄마을에 온 어린왕자와 장미여인

나의 작업은 어린 왕자가 연상되는 눈이 큰 아이의 캐릭터와 장미여인의 나부를 그리고 원점을 찍어서 바탕을 채우는 기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곳 펭귄마을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잠시 산책을 나갔더니 양림동의 고즈넉한 고택들과 호랑가시나무들에 반했고, 먼저 살다 가신 선교사들과 시인, 예술가들의 정취에 도취됐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펭귄마을 골목길 텃밭에 꽃들이 피어나 나를 반겨주니 마치 어린왕자가 펭귄별에 온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여기서 어린 왕자의 새로운 장을 다시 쓰고 그려내야만 할 것 같다.

주말 휴일에는 펭귄마을에 구경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주민 한 사람 두 사람이 모여 쓰러져가는 어둡고 누추했던 골목길을 깨끗하게 치우며 잡동사니 폐품들이지만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 시켰다. 담벼락에 오밀조밀 꾸며놓은 것이 이제는 재미있는 볼거리가 되었다. 펭귄마을은 주민 김동균 촌장님의 자발적인 헌신이 있었기에 3년째 이어져오고 지금도 날마다 보수작업과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이곳 골목길에서 사진을 찍으면 아주 예쁘게 나와서 교복 입은 학생들과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유명해졌다. 다녀간 이들이 인스타그램과 블로그 등에 많은 이미지들을 올려놓아 타 지역에서도 관광을 오고 있다. 예술과 문화라는 건 한 사람의 좋은 의식과 헌신으로 시작하여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확장 공유해 가는 것이라는 것을 여기서 보았다.

화가의 시각으로 존재의 재확인 작업

화가라는 나란 존재가 이곳에서 어떤 의식과 정신으로 작업해야 할지 요즘 더더욱 숙연해진다. 나에게 둥지를 내어준 거목과 같은 양림동에서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랑과 희망을 함께 노래하고 싶다. 존재는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 나에게 파이팅을 건넨다. 싫든 좋든 또 몇 년간이 흐르면 나는 오늘의 내 모습을 건너다보게 될 것이므로.

서양화가 정강임은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권 미술학 석사를 졸업했다. 2002년 ‘11월의 쉼’으로 개인전을 시작하여 총6회의 개인전과 50여회의 단체전을 가졌다. 라프레스코 비엔날레, 한평 갤러리 다다 기획전, 광주 시립미술관 청년작가, 아트페어와 레지던시에도 참여하며 다채로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화풍을 구사하는 그녀는 최근 양림동에서 시민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시도하며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하고 있다.

대동문화 94호 [2016 5,6월호]

정강임 화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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