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한국 현대시의 분수령을 이룬 ‘시문학파’의 중심에 용아 박용철 시인과 영랑 김윤식 시인이 있습니다. 용아와 영랑이 의기투합하여 시문학 동인지를 시작했고, 정지용 시인과 위당 정인보 시인, 연포 이하윤 시인이 참여하여 '시문학' 창간호를 발간했습니다.

그 뒤에 수주 변영로 시인과 김현구 시인이 제2호에 참여했으며, 신석정 시인과 허보 시인이 제3호에 합세하여 ‘시문학파’가 결성되었습니다.

최초로 시문학파 결성을 주도했던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이 창간한 ‘시문학’지는 우리나라 순수문학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강진 시문학파 기념관. 영랑 김윤식, 정지용, 용아 박용철

용아와 영랑은 태어난 시기와 성장배경, 가정환경 등 모든 것이 너무나 닮아 있습니다.

영랑은 1903년 전남 강진에서 오천석지기 김종호의 아들로 태어났고, 용아는 1904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리에서 알아주는 대지주 박하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현재 광산구 소촌동, 솔머리 박씨 눌재 박상의 16대 후손입니다.

휘문의숙에 다니다 배재 의숙으로 전학, 일본에 유학 아오야마(청산학원) 중등학부 4학년에 편입, 여기서 운명의 친구 영랑을 만나 시 쓸 것을 권유받습니다. 한국 현대문학사의 한 사건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동향이면서 고등학교 동문입니다. 또한 둘은 모두 젊어서 일찍 세상과 작별하였습니다.

용아는 후두 결핵으로 인해 34세를 일기로, 영랑은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재직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재난중에 포탄 파편에 맞아 47세의 젊은 나이로 이승을 떠났습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히포크라테스의 말이 떠오릅니다.
 
광주광역시에서 가장 오래된 광주공원에는 살아 생전에 못다 이룬 두 사람의 우정과 시혼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용아와 영랑의 쌍둥이 시비가 마치 무덤 인양 나란히 서 있습니다.

광주공원에 있는 용아와 영랑의 쌍둥이 시비

 이 시비는 용아의 고향 후배 시인인 손광은 교수 등 광주에 있는 문인들이 1970년 ‘한국 신시 60년 사업’의 하나로 건립하였으며, 쌍시비는 전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시비라고 합니다. 용아와 영랑의 대표작 ‘떠나가는 배’ 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새겨져 있습니다.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 그곳, 모란이 활짝 핀 곳에 영랑은 숨 쉬고 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선생은 편안한 나루터 강진과 해남을 남도 답사 1번지라고 했으며, 특히 강진을 일컬어 “영랑의 슬픔과 다산의 아픔”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강진 사랑은 대단했으며, 그 사랑은 명예 강진군민 제1호로 보답됩니다.

영랑생가 안채 국가지정 중요 민속문화재 제252호

영랑생가는 강진군청 옆 탑동마을에 있습니다. 안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됬으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07년 국가지정 중요 민속문화재 제252호로 승격되었습니다. 생가 구석구석에 그의 시혼과 서정이 녹아 있으며 시의 모티브가 되는 모란, 동백, 돌담, 감나무, 장광 등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생가 입구에 세워져 있는 ‘모란이 피기 까지는’ 시비

생가 입구에 국민 애송시 중의 하나인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 까지는’ 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오늘날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이 시는 자칫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한 사연이 있습니다.

이 시를 쓸 즈음 영랑은 일본 유학시절 그의 문우인 최승일의 여동생이자 훗날 ‘동양의 이사도라 던칸’이라고 불린 한국 ‘현대 무용의 원류, 인 월북 무용가 최승희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결혼에 이르지 못하자 절망적 비관으로 고향집 뒤안 동백나무에 목을 매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30년대 어느 봄날, 영랑의 생가에서 장안의 내노라하는 문인들이 모여 각자의 작품을 발표하는 문학 콘서트를 열고 있었습니다. 영랑도 앞마당의 모란을 보며 시 한수를 지었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하는 순간 옆에 있던 춘원 이광수 선생이 “이리 줘봐”하면서 읽어보고는 직접 낭송했습니다.

그러자 참석자들의 감탄과 찬사가 이어졌다고 합니다. 또 하나의 명시가 쓰레기통에서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시문 곳곳에 처연한 실연의 아픔이 배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영랑이 삼백 예순 날 마냥 섭섭해 울면서 기다린 ‘찬란한 슬픔의 봄’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요.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은 영랑이 기다린 봄의 정체를 ‘나라 잃은 슬픔과 광복을 기다리는 마음’을 모란에 실어 표현했다고 했습니다만, 그것은 지극히 공적인 해석인 것 같고, 젊은 영랑으로서는 ‘최승희와의 못다 이룬 사랑’이 더 큰 슬픔이 아니었을까요.

한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생가 곳곳에는 시비들이 시와 걸맞게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뒤안 언덕배기 대나무와 동백나무 아래에는 그의 데뷔작 ‘동백 닙에 빗나는 마음' 시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홍준의 말대로 동백이 “목이 부러지듯 잔인하게 떨어져 풀밭에 누워 피를 토하고...” 있습니다.

마당가 우물 옆에는 ‘마당 앞 맑은 새암물’이 장광 옆에 서있는 감나무가 지금은 고목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을날 누이가 장독대에 감나무 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오메! 단풍 들것네” 하고 내뱉는 한마디를 그는 아름다운 시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돌담 담장에 보일 듯 말 듯 한 곳에는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으며 사랑채 툇마루 옆에는 ‘사개 틀린 古風의 툇마루에서’ 시비가 자리하고 있어 시 한편 읽고 풍경과 분위기를 탐미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국가지정 문화재답게 잘 꾸며 놓았습니다.

생가 바로 옆에는 ‘시문학파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기념관은 2012년에 개관한 제1종 문학전문 박물관으로 1930년 창간한 ‘시문학’ 을 중심으로 순수 시문학 운동을 했던 작가들을 기리는 공간입니다.

특정 작가에 한정하지 않고 한 시대의 문예사조를 조망해보는 국내 유일의 ‘문학 유파 기념관’이라고 하는데, 이는 강진군의 노력과 영랑의 삼남인 김현철 선생(81)의 노력으로 유치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또한 생가 바로 뒤편에는 일 년 내내 세계의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세계 모란공원’ 을 유치하여 금년 10월 완공 예정이라고 합니다.

강진 초입 ‘영랑 로타리’에는 영랑동상이 “영랑의 고향 방문을 환영 합니다” 하듯이 서 있고, 읍내에는 ‘영랑 수퍼’, ‘모란 추어탕’, ‘영랑 찻집’, ‘모란 빌라’, ‘영랑 카센타’ 등 온통 영랑에 대한 오마주로 가득합니다.

강진하면 영랑이요, 영랑하면 강진이라고 할 정도로 영랑과 모란을 강진의 정체성 즉, 브랜드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새로운 강진의 가치를 창출하고 관광, 자원화하여 군민소득 증대를 위해 ‘남도답사 1번지’를 뛰어넘어 ‘감성여행 1번지’로 만들겠다는 군의 노력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중심에 영랑생가와 시문학파 기념관, 세계 모란공원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투자는 예산의 문제가 아니고, 문화를 바라보는 수준이며 시각이며 미래를 바라보는 통찰입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강진군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이 공동으로 조사한 ‘지역문화실태조사’에서 지역문화지수 2년 연속 1위에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문화 정책의 수립과 정책 실행, 정책 예산 집행이 안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역으로 문화정책에 대한 의지와 열정, 추진과정 및 성과를 인정받았다고 합니다.

솔머리 마을에 용아는 없네!

용아 생가 안채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

용아 생가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있습니다. 과거에는 소촌동 일대를 솔머리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마을의 지형이 마치 가마솥의 머리 부분과 같다고 하여 정두(鼎頭)라 했고, 나중에 우리말로 솥머리라고 불렀는데 부르기 쉬운 솔머리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흔히 호남 학맥의 중심을 이룬 광주를 일컬어 기고박(奇高朴)의 고장이라 부르는데 행주 기씨, 장흥 고씨, 충주 박씨를 일컫는 말입니다. 용아도 이 충주 박씨의 후손입니다. 이곳에서는 '솔머리 박씨'라고 부릅니다 .

생가는 금호타이어 광주공장 삼거리를 지나 꼬불꼬불하고 비좁은 골목길로 약 100여 미터를 들어가야 만날 수 있습니다. 크게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서재, 사당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용아는 유독 초가지붕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부친이 기와지붕으로 개조하려 하였으나 용아는 “시골집은 초가라야 어울립니다. 가을에 이엉을 얹은 후 은은한 달빛이 비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노랗게 빛나는 그 색깔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며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의 뜻대로 초가지붕으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안채로 들어가는 길목 좌측에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떠나가는 배’의 시비가 유일하게 서 있습니다.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로 시작되는 이 시는 울적한 현실에서의 탈출을 꿈꾸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들의 몸부림을 담고 있습니다. 아무리 탈출을 시도해도 암담한 현실의 벽을 느껴야 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비 밑에 2008년 12월 23일에 광산구청장이 세웠다는 '친절한' 설명이 새겨져 있지만 친절하게 느껴지지 않음은 왜 일까요.

이 시는 ‘꼬방동네 사람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등으로 1980년대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던 배창호 감독의 영화, 국민배우 안성기와 이미숙 그리고 ‘작은 거인’이란 애칭을 가진 가수 김수철이 출연했고, 당시 청춘들의 방황과 부조리한 사회의 저항정신을 계승한 로드무비 ‘고래사냥’의 OST ‘나도야 간다’의 후렴구로 일부 인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봄이 오는 캠퍼스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편지를 쓰네/(생략)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나도야 간다 나도야 간다/ 님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

생가를 아무리 둘러봐도 용아의 시혼을 느낄 수 있는 장소나 풍경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본채 입구에 배 모양의 조그만 조형물이 하나 있는데 용아의 시 ‘떠나가는 배’를 형상화해 놓은 것으로 짐작은 가나 전혀 시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습니다.

만약 유홍준이 왔더라면 그 특유의 까칠한 입담으로 뭐라고 비틀었을지가 사뭇 궁금해집니다. 그는 영랑생가의 아름다운 시비를 보고도 “소담한 안채와 뒤뜰의 해묵은 동백꽃은 영랑의 시처럼 아름답지만, 요새 만든 시비는 우악스러워 고가의 분위기를 망쳐 버렸다”고 했을 정도인데 말입니다.

용아생가는 다른 문인들의 생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품이나, 초상화 같은 것도 하나 없습니다. 작가의 생가라 함은 작가의 영혼과 작품이 녹아 숨 쉬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드웨어 못지않게 용아의 문학적 콘텐츠의 복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용아는 시문학 외에도 ‘문예월간’, ‘문학’, ‘극예술’ 등 총 4종의 문예지를 창간했고, 자신의 시집보다 먼저 ‘지용 시집, ‘영랑 시집’을 발간했으며 사실상 시문학파의 창시자이자 후원자이며 보호자였습니다. 34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할 때까지 74편의 시를 남겼습니다.

송정리는 용아의 고향이자 그의 문학의 근원적 탯줄이며 수원지 같은 곳입니다. 그 유명한 송정리 떡갈비 골목에 ‘용아 떡갈비, 가게 하나쯤 있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또 하루 수만 명이 이용하는 KTX 송정역 광장에  ‘밤 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시비를 세워서 송정리가 용아의 고향임을 널리 알리고 용아를 살아 숨 쉬게 함은 어떨는지요.

“온전한  어둠 가운데 사라져 버리는/ 한 낱 촛불이여./ 이 눈보라 속에 그대 보내고 돌아서 오는/ 나의 가슴이여.”/ (생략)

문화가 ‘밥’ 이 되는 세상입니다.

18세기 산업혁명의 시대를 거쳐 20세기 정보혁명의 시대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입니다. 즉, 문화가 자원이 되는 시대입니다. 세계를 주목하게 했던 ‘해리포터’나 ‘반지의 제왕’이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국내에는 경기도 양평군의 ‘소나기 마을’ 사례가 있습니다. ‘잘 만든 문화 콘텐츠 하나 열 공장 안 부러운 시대’ 입니다.

광주광역시의 문화산업 비중이 6대 광역시 중에서 울산광역시 다음으로 꼴찌에서 두 번째라고 합니다. ‘문화중심도시’ 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광주에는 원형의 문화자산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원형의 자산에 스토리를 입혀서 문화관광 콘텐츠로 개발하여 고부가가치 관광문화사업으로 가치를 재창출하고 이를 관광 자원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문화가 ‘밥’ 이 되는 세상입니다.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