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강진군은 거대한 말굽 모양을 하고 있다. 강진의 한가운데로는 쐐기처럼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있는데 이 바다를 우리는 ‘강진만’이라 부른다. 강진만은 만 입구에 위치한 완도 본섬과 고금도를 기준으로 대략 100㎢쯤 된다. 해방 후에 주로 만의 서쪽인 강진군 도암면과 신전면, 해남군 북일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간척사업 전에는 이보다 20㎢ 남짓 더 넓었을 것이다.

바다라고 하지만 강진만은 대체로 고요하다. 완도로 향한 남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제법 높다란 산자락으로 에워싸인 덕분이다. 동쪽에는 장흥반도의 천태산이 치맛자락처럼 넓게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월출산ㆍ일봉산ㆍ오봉산ㆍ보은산 등이 솟아있다.

서쪽으로는 해남반도의 척추처럼 만덕산~덕룡산~두륜산~대둔산~달마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땅끝까지 길게 뻗쳐있다. 봄이면 이들 산에는 산벚나무들이 팝콘처럼 탐스런 꽃을 피어올리고 그 빛깔은 가운데로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강진만의 풋풋한 물빛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강진군이 이처럼 만을 중심으로 말굽 모양의 생김새를 갖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원래 강진은 지금의 완도군까지 관장하는 고을이었다. 그렇다보니 강진과 완도는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었다. 1530년대에 펴낸『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이 책에 강진을 대표하는 인물로 첫 손가락에 꼽은 이는 궁복(弓福)이었다. 우리가 장보고라 부르는 그 사람이다. 요즘 같으면 장보고는 완도의 아이콘 같은 인물이지만 1896년 이전까지 장보고는 강진 전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됐던 셈이다.

‘제주 뱃길’ 오가던 이들이 머물던 탐진

하나의 행정단위였던 강진과 완도가 지금처럼 두 고을로 분리된 것은 1896년이다. 이 때 이후로 강진은 강진만을 중심으로 한 고을이 됐다. 그래서인지 강진을 대표하거나 상징하는 것은 많겠지만 필자에겐 강진만 자체만큼 강진을 표상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강진만은 군의 한가운데에 위치할 뿐더러 강진의 과거와 현재, 일상생활에까지 오롯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강진군의 11개 읍면 중 7읍면이 만과 이웃하고 있다. 특히 도암, 신전, 칠량, 대구, 마량 등 5개면은 삶의 풍경뿐 아니라 간척지 농사나 양식업 등 실생활 면에서도 만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살고 있다. 강진만은 고대로부터 제주를 오가는 뱃길의 기점이자 종점으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강진의 옛 지명 중 하나가 탐진이었던 내력도 이런 뱃길과 관련된 것이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제주에 원적을 둔 고씨나 양씨들의 최초 상륙장소도 강진이었다. 또 칠량면에는 이를 기념한 사당으로 고량당(高梁堂)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강진만의 다채로운 이력은 옛 기록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름에도 배어있다. 우선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에 강진만을 일컬었던 성자진(星子津)이 있다. 고려시대까지 제주의 통치자인 성주(星主) 혹은 그 아들인 성자(星子)가 사신 자격으로 육지부로 나올 때면 반드시 이곳에 배를 댔던 데서 비롯된 이름이라 한다.

강진만이 제주뱃길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것은 단순히 강진만에 국한되지 않고 강진 전체의 지정학적 역할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강진만을 종종 ‘탐진만’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해상요충의 역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성자진을 특정 포구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1980년대 펴낸 <강진군 마을사>에는 성자진이 지금의 강진읍 남포리에 있었을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남포리는 군동면의 백금포(일명 영포), 칠량면의 봉황리와 함께 강진만에서 가장 유명했던 3대 포구 중 하나였다. 옛 지명의 현재 위치를 강박적으로 찾으려는 욕구를 누르고 20세기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진’이나 포’로 끝나는 지명이 특정 항구나 포구뿐 아니라 해역이나 바닷가를 두루뭉술하게 표현할 때도 사용됐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약용의 ‘남포행’ 싯귀도 흐르고

일례로 후삼국시절인 912년 왕건과 견훤의 함대가 맞붙어 싸웠다는 유명한 덕진포 해전이 있다. 이 해전의 장소인 덕진포는 꼭 집어 지금의 영암군 덕진면 일대라고 말하기 어렵다. 수많은 배들이 뒤엉켜 싸운 곳이 작은 포구 앞바다였다고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기서 말한 덕진포란 지금은 하굿둑으로 인해 영산강의 일부가 됐지만 그 전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어 바다의 일부로 간주되던 남해만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크다.

성자진이 남포리일 가능성을 전적으로 배제하기 어렵다 해도 그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강진만 전체를 일컫던 옛 이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강진만을 일컫는 다른 말인 구십포(九十浦)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구십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현 산천 항목에서부터 나온다. 이 책에서 구십포의 지명 유래를 딱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구십’이란 표현은 이 만에 많은 포구들이 있었거나 만 내부의 물굽이도 복잡했음을 반영한 표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시대 시문집들에는 남포(南浦)란 표현도 자주 눈에 띈다. 남포는 앞서 소개한 강진읍 남포리를 지칭할 때도 있지만 상당수는 강진읍의 남쪽에 있었던 만 전체를 말하는 용례로 표현될 때가 많다. 실제로 정약용의 시 ‘남포행(南浦行)’에는 남포가 곧 구십포와 같은 의미였음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남포를 약간 비틀어 표현한 것으로 남당(南塘)도 있다. 만이 강진읍 남쪽에 있어 붙인 명칭이란 점에서는 남포와 같은 맥락이지만 포를 당으로 바꿔 쓴 것이 특이하다. 과거에 당이란 한자는 대체로 제방, 연못, 물가 외에 호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할 때도 썼다. 1722년 겨울, 강진만에 왔던 충청도 선비 이하곤이 지은 시의 제목도 ‘남당가’였다. 이때의 체험담을 기록한 이하곤의 시문에는 몇 가지 진귀한 기록들이 보인다. ‘남당의 복어’를 강진의 진미로 꼽은 대목도 그렇다. 강진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복어를 애호했다는 얘기는 그보다 100여년 뒤인 정약용의 시 ‘남포행’에도 등장한다.

20세기에 들어 널리 불린 이름 중에는 구강포(九江浦)가 있다. 이 표현은 수많은 강들이 유입한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정부에서 몇 년에 한번씩 간행하는 『전국하천일람』을 보면, 강진만으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탐진강 등 여섯 개를 꼽고 있다. 비교적 큰 하천만 해도 이 정도인데 실제로 그보다 작은 개천들까지 헤아리면 훨씬 많다. 그래서 많은 강이 모이는 바다라는 의미로 구강포라 했을 가능성이 있다.

뭐라 부르든 시대변화 따라 ‘말치레’

구강은 다른 의미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1900년대 일본인들이 작성한 『조선지지자료』를 보면 구강의 의미를 훨씬 좁게 해석했다. 강진읍내의 서쪽으로 흐르는 강진천을 당시 구강이라 했다고 기록한 대목이 그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강진천은 주교천(舟橋川)이라고도 했다.

원래 이 개천을 따라 학명리 도원마을까지 장삿배들이 드나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장이 섰던 데서 ‘배드리장’이라고 했다. 이 음이 변해 ‘배다리장’ 또는 ‘주교장’이 됐다. 그 뒤에 장터가 옮겨져 오늘날의 강진읍내장이 됐는데 읍내장의 별칭으로 지금도 배다리장, 주교장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밖에 강진만을 일컫는 말로는 도암만과 칠량만 등이 있다. 도암만과 칠량만은 각각 만에 속한 도암면과 칠량면 이름들을 딴 것이다. 해방 후부터 최근까지 이들 면을 중심으로 각종 간척사업과 양식업이 왕성하게 펼쳐지면서 부각된 이름이다. 간척사업의 결과, 현재 도암면 농경지의 13%, 신전면의 26%는 본래 갯벌이거나 바다였던 곳을 매립해 논으로 만든 땅이다.

그렇다면 강진만을 가리키는 이들 다양한 표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사용자들의 부주의로 생긴 결과, 또는 말의 치레에서 빚어진 이름이라고만 치부할 것일까? 이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런 다양한 표현에서 강진만이 겪어온 경관과 생태의 변화, 그리고 그것을 지켜봐온 사람들의 인식을 가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발문 바다라고 하지만 강진만은 대체로 고요하다. 완도로 향한 남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제법 높다란 산자락으로 에워싸인 덕분이다.

발문 강진만이 제주뱃길의 요충지 역할을 했던 것은 단순히 강진만에 국한되지 않고 강진 전체의 지정학적 역할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의미가 크다. 강진만을 종종 ‘탐진만’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해상요충의 역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대동문화 95호 [2016 7,8월호]

조광철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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