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쓴다는 것은 사막에 가보지 않고 사막을 느끼는 일, 물 한 방울 없는 모래땅에 씨앗을 뿌리는 마음이다. 아무리 척박한 땅일지라도 반드시 싹이 틀 거라는 믿음… 내가 뿌리는 희망의 씨앗이, 비록 기약할 수 없이 정처 없는 여행일지라도 언젠가 꼭 무릎 꺾인 누군가의 가슴에서 꽃으로 피어나리라는 믿음…

눈물뿐인 세상일지라도 눈물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개 끄덕여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세상이 향기로워지리라는 믿음… 눈물들의 한恨은 되갚아야 풀리는 한이 아니다. 되갚아줄 상대의 아픔도 못 견디는 착한 눈물들의 생이 시로 꽃피어난다. 나의 눈물 젖은 시를 세상의 모든 눈물에게 바친다. 나는 너에게로 흐르고 너는 나에게로 흐름으로써 세상 모두가 우주 안에서 한 피붙이인 것이다.

전남 장성이 고향인 전숙 시인은 전남여고와 전남대 간호학과를 졸업했다. 그 후 나주시 노안면의 금안보건진료소에서 보건진료소장으로 33년을 일했다. 고향에 버금가는 삶의 터전이었고 또 안식처였다. 청춘을 불살라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면서 어르신들의 딸이 되었다. 시인으로 등단하면서부터는 나주 문화예술운동에도 앞장서서 헌신해왔다. 다시 시간을 되돌린다 해도 금안진료소를 택하겠다는 전숙 시인, 나주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주민들에 대한 사랑이 전해져 왔다.

광주 문단에서 큰언니 혹은 친정엄마 같은 시인으로 통하는 전숙 시인이다. 그만큼 폭넓은 문단활동과 습관처럼 몸에 밴 배려, 여러 어려운 문제에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면서 상담역할을 해왔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학창시절의 별명조차 ‘엄씨’였다니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닐 터...

전숙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나이든 호미’의 시인의 말에서 ‘어머니’라는 말을 과일 속살처럼 부드럽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에 대하여 ‘나이든 호미’를 예로 들었다. 낡은 호미는 새 호미보다 날이 무뎌져 있다. 풀을 매거나 작물을 수확할 때 힘은 들지만 생살에 상처를 내지 않는다. 잡초까지도 상처가 없기를….

전숙 시인(61)은 전후 시대를 살아온 광주의 여류시인이다. 한국전쟁을 직접 아프게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근대화의 소용돌이를 정확하게 관통했다. ‘보릿고개’로 대변되는 어려운 시기를 같이 겪으며 그 시대의 어머니들의 눈물의 짠맛을 시인의 혀로 기억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호구지책이 먼저였다. 까만 눈의 새끼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남의집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시심(詩心)이 일어나면 참새를 쫓듯이 멀리 쫓아버렸다.

시 같은 거, 문학 같은 것은 오히려 빨강립스틱처럼 활동사진 속의 서양여자처럼 낯설었으리라. 그러나 만약 우리 어머니들이 시를 썼다면, 그들이 시심을 밝혀 노래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숙 시인을 보면서 전후세대 어머니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큰언니’라든가 ‘친정엄마’ 같은 말은 부담스럽고 과분한 말이라고 손사래를 치는 다정한 모습... 전숙 시인의 시가 태동하는 시작점을 알 것 같다.

세 편의 시집은 우리들의 현재 진행형

전숙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상처의 번역자, 눈물의 대필자’라는 말을 한다. “무의식의 세계에서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쓴다.” 창작이라고는 하지만 자연의 소리, 마음의 소리를 옮겨 적는 일, 일종의 대자연의 대리자와 같다는 말이다. 공감되는 말이다.

어머니가 자장가처럼 들려주었던 말을 기억하고,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장롱을 떠올리는 시인... 그녀에게는 아직도 못 버리는 낡은 장롱이 어머니의 유품으로 있다.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끌어안고 산다. 시인은 장롱에서 어머니를 느끼고 하염없이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렇게 어머니를 추억하고 유년의 기억을 모아 첫 시집 ‘나이든 호미’(2009)를 냈다. 날밤을 새우면서도 쓰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쓰고 또 썼다. 칼날 위에 서서 강신무를 추는 무당처럼 마음에 들려오는 말들을 받아 적었다. 첫 시집을 내자 숙제를 마친 기분이 들었다. 후회하고 후회했지만 어머니는 아무 곳에도 안 계셨다. 대신 자신이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시인의 길에 서 있었다.

전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눈물에게’(2011)는 제목 그대로 세상의 ‘눈물에게’ 바치는 헌시다. 어머니와 유년의 기억에서 나아가 이웃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이 시집은 ‘제3회 최치원 문학상’ 수상시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시인의 약력 난도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푸른사상사’에서 선정한 『오늘의 좋은 시』에 ‘주름’(2010), ‘눈물에게’(2011), ‘하늘말나리’(2012), ‘변호사’(2015), ‘산소호흡기’(2016)가 선정되기도 했다.

한 편의 소설처럼 진화하는 전숙 시인의 시, 어머니를 바탕으로 눈물시대를 열었다. 세상의 어떤 아픔도 다 눈물로 씻김을 받는다. 눈물이야말로 인간에게 허락된 생애의 진정한 축복이 아닐까? 슬퍼도 울고 기뻐도 울 수 있는, 때로는 기름진 흙이었다가 때로는 거친 황무지가 되는 인생의 여정에서 진정으로 우는 일… 나를 위해, 세상을 위해 진정으로 마음 바쳐서 우는 일… 붉은 피 같은 피눈물, 검은 십자가에서 흐르는 검은 눈물…, 세상의 모든 눈물로 울어보는 시인의 마음이 독자로 하여금 눈물샘을 파게 한다. 그리고 씻김을 받듯 아침이슬처럼 찾아오는 정화의 평화…

2015년도에 발표한 제3시집 『아버지의 손』을 보면 전숙 시인의 활달한 시적 전개가 보인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으로 가는 소설의 구성단계처럼 시상의 발단이 ‘나이든 호미’였다면 전개에 해당하는 ‘눈물에게’, 그리고 ‘아버지의 손’은 위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전숙 시인의 시선이 어머니로 시작하여 이웃(눈물)을 건너서 세상과 우주로 향하는 ‘아버지의 손’을 보았기 때문이다.

정말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한 세대가 가기도 전에 우리가 아는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고, 어린 적 꿈꾸었던 많은 것들을 눈앞에서 보지만 행복하지도, 실감이 나지도 않는다. 이것들은 ‘알파고’를 만난 ‘이세돌’처럼 인류의 총체적인 위기상황이 아니고 무엇인가. 뼈 빠지게 일하여 오늘을 만들어 놓은 우리들의 아버지는 지금 무엇을 낙으로 삼고 있는가.

아버지의 푸른 혈맥이 흐르던 손은 메마른 사막이 되었다. 그렇지만 쉼을 얻지 못했다. 다시 ‘손자’라는 짐을 져야 했다. 그 가족의 얘기에서 시 ‘아버지의 손’이 탄생했다. 아프다. 남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된다. 우리의 아픔이 된다.

눈을 감고 만지면

아버지의 손은

죽어 천년을 산다는 사막의 나무

한때 그 몸에 푸른 이파리 살랑였던 기억까지

깡마르게 지워낸 호양나무의 수피처럼

갈기갈기 거친 호흡으로 덮여 있었다.

「아버지의 손」 부분

심미안, 조금씩 더 깊어져가는 우물

전숙 시인은 광주문단의 중견시인으로 광주의 대소사를 지나칠 수가 없다. 천주교인이면서도 방언처럼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시구詩句, 이명처럼 귀에 울리는 시구를 식구처럼 안고 살아야 했다. 2007년 광주항쟁에 대한 시를 쓰게 됐다.

새벽 3시쯤이었을까. 꿈인 듯 현실일 듯 잠자리에서 일어난 전숙 시인은 ‘꽃과 꽃 사이 오월’이라는 제목을 받았다. 민주와 민주 사이, 오월의 아픈 꽃, 그 가시 같은 꽃, 그러나 아름다워야 할 꽃으로 5·18공식추모시를 썼다. 그리고 오월영령들 앞에서 피를 토하듯 낭송을 했다. 그렇게 2014년까지 8년간 오월 추모시를 쓰며 영령들의 영혼을 한 송이 한 송이 꽃으로 피워냈다.

시인은 늘 기다리는 사람, 시를 기다리고, 그 시가 행복한 시였으면 하고 바라고, 시를 통하여 사람들이 쉼과 위로를 받고 작은 용기를 충전하기를 바란다. 다시 태어나도 시를 쓰고 싶다는 전숙 시인이다. “제 시의 시작과 끝은 우주의 종교인 모성 즉 ‘측은지심’입니다.”라고 말하는 전숙 시인에게서 ‘어머니의 향기’가 보랏빛 라일락향기처럼 풍겨왔다.

전숙 시인과 마주 앉은 시간, ‘전숙’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빌려서 영혼의 눈에 비친 이야기를 들려주고 받아 적었다. 그녀의 가슴에 담긴 시를 들었다. 한 마디 한 마디 아린 시간의 틈으로 저녁바람이 불어왔다. 노을을 거둔 해거름 사이로 저녁 불빛이 스며들었다.

대동문화 95호 [2016 7,8월호]

김을현 기자  -08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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