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여기인(書與其人), 글씨는 곧 사람이다. 다시 말해 글은, 쓰는 이를 닮는다는 말이다. 한 획 한 획 숨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써내려가는 글씨가 어찌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거기에는 쓰는 이의 심성과 성정이 고스란히 배어들 터. "글씨는 쓰는 사람을 닮습니다. 체격이 있으신 분들은 글씨도 크고 힘찹니다. 또 키가 큰 분들은 글자도 길쭉길쭉합니다. 물론 심성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선생의 말에 나는 내 글자를 살펴보았다. 어딘지 부조화스럽고 못났다.

중허 홍동의 선생(59). 선생의 글은 단아하면서도 진정이 엿보인다. 해서체와 예서체로 날면서도 어딘지 순하고도 반듯하다. 기교보다는 정성과 마음이 담겨있는 때문이다.

삶이 기교로 사는 것이 아님을 안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글씨이다. 그것은 아마도 죽음을 경험한 그의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터. “얼마전 제가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차라리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는 3년 전, 위암수술을 했다. 수술이 잘못돼 세 번에 걸쳐 재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 죽음의 문턱에서 홍동의 선생은 삶과 인생과 자신의 예술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가졌다.

죽음 앞에서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다는 거. 너무 빤한 이야기지만 그것만큼 또 진리가 없었다. 자신의 삶은 그렇게 끝이 나도 세상의 다른 것들은 계속해서 삶이 이어진다는 사실 앞에 세상이 달리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리 미물일지라도 그들이 가진 생명이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졌다고 고백했다.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 시련을 겪게 마련이다. 사람을 키우는 건 그 시련이다. 선생 역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글에 대한 자세와, 세상을 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지금은 가장 겸허한 자세로 글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게다가 틀에 박히거나 구속에서 탈피하려 노력한다. 그래서 지금은 한글서체도 연구하고 있다.

왕대밭에서 왕대가 나는 법

사람이 성장하면서 결코 자라온 그 환경은 무시할 수가 없다. 홍동의 선생이 글씨를 접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려서 함께 살았던 조부가 쓸 먹을 갈면서 묵향을 느끼고, 글씨를 익히고, 사자소학을 공부했다.

선생은 조부를 회상하면서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왜 아니겠는가. 고요함 속에서 먹이 갈리는 소리와, 폐 속 깊숙이 파고드는 묵향과, 든든한 조부의 모습은 어린 선생에게 커다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그곳만큼 안온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세상은 또 없었을 것이다. 그 풍경은 성인이 돼서도 선생을 평생 따라다녔다.

책이 귀하던 시절, 조부는 책을 빌려와 세필로 창호지에 베껴 써 책을 만들고, 그 책으로 선생을 공부시켰다. 당시 선생이 살던 고흥은 강촌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책이 더 귀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어디 고흥뿐일까.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속도를 더듬어보면 어디나 다 마찬가지인 것을. 그의 전공은 전기공학이다. 하지만 결국 어릴 적 기억은 선생을 예술의 길로 이끌었다.

1977년, 대학에 들어간 선생은 어릴 때 기억을 더듬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서도가 벌써 40년째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을 살펴보면 어릴 때 경험이 절대적으로 작용하게 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아니면 그때의 기억이 자신의 분야에서 큰 도움이 되거나. 그러기에 어릴 때 경험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귀중하다.

번듯하게 대학에 들어간 아들이, 게다가 6남매의 장남이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를 하기보다는 오히려 용기를 주었다. "어머니는 참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장남이니까 돈을 벌어야 한다고 압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해보라고 용기를 주셨습니다. 세상에 그런 어머니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선생이 국전에 입상하던 날. 그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기뻐해주셨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러셨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어머니는 그러셨습니다. 정말, 어머니는 장남인 저에게 참 많은 힘을 실어주신 분이십니다. 장남으로서 도리를 강요하지도 않으셨구요. 돈을 벌어야 한다고 종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어머니는, 아니 선생의 부모는 선생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보내셨다. 6남매. 시골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덕분에 선생의 형제들은 지금 나름대로 생활을 일구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는 선생의 힘이 컸다. 광주로 유학을 온 선생은 부모를 설득해 동생들을 모두 광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자취하며 동생들을 돌봐주었던 것이다. 결혼해서도 동생들 뒷바라지는 온전히 선생의 몫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훌륭하신 분이지만 부인역시 선생에게는 큰 힘이 돼주었고, 역할이 컸다. 그들이 있었기에 선생은 힘든 예술가의 삶을 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스승과 좋은 인연이 좋은 선생을 만들어

하지만 선생은 서예가의 길로 들어선 뒤 자신의 서체와 길을 찾기까지 방황도 많이 했다. 무릇, 모든 예술가들이 그러겠지만 선생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선생은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학정 이돈흥 선생에게 찾아가 물었다. 정말 자신에게 재능이 있는지, 정말 글씨를 써도 되는지. 스승은 그런 선생에게 대답했다. 아무소리 말고 하루 1000자씩 10년만 써보라고. 게다가 그 스승은 이제까지 선생이 해온 것을 버리고 다시 한일(一)자부터 쓰라고 주문했다.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선생은 스승의 충고를 따랐다. 그 충고가 있었고, 그 충고에 수굿하게 따랐기에 오늘의 선생이 있을 것이다.

선생은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좋은 인연을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난 탓이라고 다른 이들에게 그 고마움을 돌렸다. 스스로의 재능을 잴법한데도 선생은 그 모든 것을 주변인에게로 돌렸다.

즐겨 쓰는 서체나 문구가 무어냐는 물음에 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요즘은 현대서예나 전위서예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전 고전을 중시합니다. 당나라 이전의 법책들을 주로 공부하고 있지요. 한나라 시대 예서나 당나라 해서, 그리고 사서나 채근담, 또는 한시 중에서 좋은 글을 선별해 즐겨 쓰곤 합니다."

요즘처럼 길을 잃고 세상이 어수선할 때는 다시 고전에서 출발하고, 고전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거기에 사람살이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덕목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만큼 또 외로운 작업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선생의 작업이 더 애정이 간다.

선생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부모님

감사하게도 선생의 서실에서 선생의 지도를 받고 함께 공부하고 글을 쓰던 회원들이 모여 전시회를 연 것이다. 일명 '탐고연서회전'이 그것으로, 올해로 벌써 24회째다.

선생이 수술을 마치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도 회원들은 한 명도 이탈하지 않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주었다. 선생은 그것이 또 고맙고, 그만큼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해주었다고 고백했다.

지금도 선생은 회원들과 같이 서실에서 밥을 해먹고 글씨도 쓰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제지간을 떠나 한 가족인 셈이다. 식구. 같이 밥을 해먹으니 식구인 셈이다.

"이 서실을 거쳐 간 사람 중에는 국전에 입상한 사람도 있습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죠. 청출어람만큼 기쁜 일도 또 없습니다. 서로가 힘이 됩니다. "선생의 얼굴에서 흐뭇함이 엿보였다. 선생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주저하지 않고 부모님을 꼽았다. 부모와 자식 간의 흉흉한 소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요즘 세상에 참 따듯하게 와 닿는 말이다.

선생은 지금 사단법인 국제서예가협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서도가 주춤하고 있는 시대에 서도의 부흥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중국에서 단체전도 열었고,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이어나갈 계획이다.

선생은 서도의 부흥을 위해서는 지금 같은 도제식 교육보다는 대학에서 전공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전공과목으로 체택해야 서도가 활성화가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역행하고 있죠. 오히려 서예과가 있던 학교도 지금은 폐과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선생은 취업에만 쫒기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는 속내를 밝히기도 했다. "좋은 문구나 좋은 글귀를 쓰다보면 성품이 나빠질 수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좋은 글귀를 접하다보면 좋은 인성을 가지게 됩니다. 정서적으로 메마를 일도 없구요. 그러면 사회가 오늘처럼 각박해지는 일도 없을 테구요."

급한 성정을 가진 사람이 일부러 인내심을 배우기 위해 서도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지금 같은 세상에 어쩌면 가장 필요한 것 중에 하나가 서도인지 모른다. 글쓰기를 통해 다다르는 도의 길, 서도.

"글씨는 1회성입니다. 한번 잘못 그으면 그걸로 끝납니다. 그러니 한 획 한 획 정성을 다하고 성심을 다해야지요. 그러니 서도가 곧 인생살이와 같습니다. 하지만 나를 포장할 수는 없습니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더니 다음과 같은 말이 돌아왔다. "내가 가는 길이 후배들의 이정표가 된다, 저는 이 말을 꼭 들려주고 싶습니다."

올곧게 걸으라는 말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흔들리지 말고, 비겁하지 않게, 자신의 길을 가라는 말이었다. 정말 그런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선생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참 상쾌했다.

대동문화 95호 [2016 7,8월호]

은미희 소설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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