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종교와 마찬가지로 예술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보다 삶의 내면을 주목하는 까닭에 예술가는 고도의 정신철학을 지닌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그 깊이와 정신적 측면에서 최상의 경지로 인식되어 온 동양의 회화예술은 그러한 철학적 배경을 토대로 성장해왔다.

그 무궁무진하고 심오한 조형에 대한 관심은 현대에 이르러 절대적 흡인력과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실정이다. "동양예술의 창조는 정신과 물질의 상상적 결합의 산물로서 예술가 자신이 창조자로서 간파하는 안목과 스스로 체험한 경험이라고 하는 원료 및 자신이 창작의 주체로서 반영하려고 하는 궁극적인 정신의 종류에 따라 달라진다"고 조지 로울리는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사물의 형상에서 그 근본을 찾고 정신을 유출해 내는 작업은 자연의 원리를 뼈대로 하는 동양회화에서의 철학적 배경 하에서만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회화예술을 가리켜 신비한 대자연의 이치를 인간의 진의(眞意)와 기운(氣韻)을 통하여 그 본질을 밝혀내는 것이며 자연의 참모습을 작가의 마음속에 내재된 신운(神韻)으로 해석하는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져 왔다.

동양화가 지닌 상징성, 은유성을 통하여 볼 때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지혜를 찾는 것이 바로 동양회화의 본질이었기에 옛 선인들은 인간의 정신이 자연의 섭리에 의존하면 초월적 창조의 세계를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자연 속에 숨어 있는 신비한 이치나 진의를 찾아야한다고 역설하기도 하였다.

동양화는 원래 담백한 표현 양식과 신비스러우면서도 현학적(玄學的)인 먹색의 조화 등 동양인의 정서와 체질에 알맞은 재질과의 일체감으로 인하여 그 정신적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표현의 영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상징성과 직관을 요지로 하는 까닭에 생략과 강조, 함축과 은유야말로 동양회화의 본질이었으며 대상을 간결하게 표현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회화를 심의와 정신성에 우위를 두고 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여 그림의 주제와 대상을 귀일 시켰던 사의적(寫意的) 성향과 대상이나 주제를 구체적 형상으로 재해석하였던 사실적(寫實的) 성향으로 분류하였다.

전자가 재료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존재론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재료의 물성과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기교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동양화는 정신과 물질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이 양자를 일원적으로 통합하려는 정신적 조형의식이 분명하였음을 보여준다.

예로부터 먹을 하늘에서 내린 재료로 믿고 있는 동양의 정서 속에서 지, 필, 묵은 늘 물질이면서 동시에 정신성을 추구하는 그 무엇이었다. 이런 매재의 물성과 정신성에 비추어 볼 때 붓과 종이와 먹은 가장 정교한 음양의 대조적 성격을 지니면서 서로 상호 보완되는 호환성을 보이는재료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지, 필, 묵을 분리해서 생각하기 곤란한 이유도 이 삼자의 조화와 결합에 의해 구륵법(鉤勒法), 몰골법(沒骨法), 선염(渲染)같은 전통의 표현기법의 발전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전통 매재인 지, 필, 묵은 시간성의 매재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종이의 수용성과 먹의 응고, 해체의 성질, 붓의 기필에서 운필에 이르기까지의 조화와 변화에 따른 성질이 모두 재료의 시간적 효용성과 연관을 맺고 있는 까닭이다.

동양화의 전통재료인 지(紙), 필(筆), 묵(墨)이 그림의 주요 재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후한시대 이후인 육조 때부터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시기 들어 비로소 먹이 글씨와 동시에 그림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화론에서는 대체로 회화의 기본재료인 지필묵을 능숙하게 소화하여 심도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상당기간 수련과 연마를 쌓아야한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정한 예술적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교적 측면의 연마와 더불어 격조 높은 정신의 영역까지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기본 논리를 얘기하는 것으로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우선적으로 작의보다도 재료인 지, 필, 묵에 대한 선험적 이해가 요청되어지는 것은 이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먹의 습윤하고 정갈한 효과와 의취(意趣)를 독특하게 구사할 수 있는 선염(渲染)같은 기법만 하더라도 한지나 화선지와 같은 독특한 수용성 위에서만이 가장 그 효과를 잘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동양의 묵필 재료들은 서화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기에 가장 적합한 재료였던 것이다.

결국 묵필의 전통 매재는 기를 무시한 정신이나 정신이 무시된 기에 의한 현상적 해석보다는 기운생동(氣韻生動), 전이모사(轉移模寫) 등 동양화 고유의 화론에 입각하여 동양화의 정신세계와 회화의 본질을 구현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현대 동양화가들이 동양화의 진수를 깨닫기 위해서는 지필묵에 대한 고답적인 관념을 깨뜨릴 수 있는 실험적이고, 진취적인 자세를 갖추어야하며 이런 현상들이 보편적으로 수용될 때 비로소 아시아 문화권 속의 화가들은 문화융화의 시대와 급변하는 변화의 시대에 잘 적응 할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서양미술을 대표하는 영역으로 유화를 꼽는다면 동양미술을 대변할 수 있는 것으로 수묵채색화를 들기도 한다. 이 두 가지 표현장르는 동․서양을 대표하는 미술형태로서 오랜 세월 동안 자리매김 해왔으며 각각의 고유한 미감과 조형적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동양미술 문화의 상징적 존재였던 수묵채색화는 서구 현대 미술의 화려함과 다양성을 가려 그 존재가치가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동양화의 기본 재료인 지(紙)․필(筆)․묵(墨)이 질료 일변도의 일방적 수용이나 해석에 따라 바탕에 담겨있는 정신적 특성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양화의 매재가 물리적 성향과 정신적 영역의 이원적 구조에 의해 이해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먹의 고유한 특성인 직관과 함축미를 바탕으로 동양의 정신문화를 함유하고 있는 동양 회화는 산수화, 문인화 분야에 모필 문화의 대명사로 여기는 서예를 포함시켜 시와 그림을 합친 삼절(三節)의 의미를 작품 속에 내재시켜왔다.

따라서 종이의 수용성과 붓의 활달한 운필의 기세를 바탕으로 한 동양화를 감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글을 읽듯이 천천히 음미하면서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는 점이다.

의재 허백련의 '춘하추동'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仁王霽色圖>나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의재 허백련의 <春夏秋冬>, 청전 이상범의 <早春> 같은 작품 앞에 유난히 많은 관람객이 모여드는 것은 그림의 채색이나 포치 같은 외형적 아름다움은 물론, 작가와 표현대상이 지닌 정신세계까지 공유하고자 하는 관람객의 열망이 한 쪽에 자리 잡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인간과 회화, 인간과 미디어와 같은 서로 다른 대상의 가시적 만남이 아니라 작품을 창작한 작가의 영혼과 우리의 가슴이 공감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수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숨겨진 진실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라 말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예술에 있어 개념과 독창성이 강조되는 현대는, 그것이 비록 아름답거나 교육적으로 유용하지 않더라도 나름대로의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동양회화는 고대부터 정서의 순화를 예술의 근본으로 삼는 자연관을 보여주었기에 감상자는 자기에게 유용한 것을 동․서양적 시각의 차이에 따라 달리 선별 수용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동양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소재의 정형성이나 회화 해석방법이 수천 년동안 전혀 바꿔지지 않고 계속 연결되어왔던 점도 중국을 비롯한 동양 문화의 독특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나 북종산수화(北宗山水畵)에서 볼 수 있는 정신적 깊이나 필묵의 세련된 묘사기법 등의 고차원적 숙달을 요구하는 화풍도 이런 특성을 떠나서는 간파하기 힘든 내용들이다.

그러나 글로벌 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일정한 양식과 사조가 파괴되고 온 세계가 인터넷으로 곧바로 연결되는 새로운 예술에 대한 사고를 요구하는 만큼 달라진 시대임을 알아야 한다. 비록 동양 특유의 토속적인 것일망정 잘 가꾸고 발전시키는 편이 주체 없이 흔들리는 것보다 미래의 우리에게 유익함을 가져오는 일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사람은 가치와 명분을 추구하는 존재다. 항상 무엇이 보다 가치 유용한 일인가를 생각하는 특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이나 양식이 좋은 그림일 수도 있으나 무엇이 보다 가치 있는 아름다움인지 생각하는 태도 또한, 회화예술을 애호하는 감상자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다.

장영준 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관장. 미술비평가  curcyj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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