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의 여름이 마치 헤어지기 싫어하는 ‘정부(情婦)’처럼 앙탈을 부리다가 여러 가지 신기록들을 남겨 놓은 채 물러 갔습니다. 그 우렁차던 매미들의 교신(交信)이 뚝 그치고 구름 높은 가을 하늘이 다가왔습니다.

조석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결이 느껴지고 밤에는 사각거리는 광목천 홑이불의 감촉이 기분 좋은 요즈음입니다. 여름이 물러가고 난 빈자리에는 바로 5일간의 긴 추석 연휴가 찾아왔습니다.

모처럼의 긴 연휴 덕분에 평소에 올라보고 싶었지만 ‘동네 뒷산’이라는 연유로 미뤄뒀던 ‘군왕봉’에 올라 가을을 노래하는 시나 몇 편 읽어볼까 합니다.

•이제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가을 이라고는 하나 산속은 아직 여름의 끝자락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약간 퇴색은 됐지만 아직은 푸르름 그대로입니다. 벌초해놓은 마른 풀잎의 향기가 코를 간지럽히네요. 개옻나무 혹은 붉나무 부르는 이 나무는 초가을임에도 벌써 붉은 옷으로 갈아입고 이제 그만 가을을 허락하고 싶은가 봅니다. 아니, 이미 허락했군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 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최영미의 시 “가을에는” 전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우리는 누구나 ‘벌레 먹은 나뭇잎’입니다

잠시 물 한 모금 마시며 호흡을 가다듬고 오르다가 벌레 먹고 상처 난 나뭇잎들과 조우합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누구나 상처 몇 개쯤은 안고 살아갑니다.

누군가를 부양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나뭇잎에 난 상처는 누군가를 먹여 살렸던 ‘이타’의 아름다운 흔적입니다.

이 상처들로 인하여 산새들의 노래가 있고 우리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년 단풍철이 되면 우리는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끈하게 물든 단풍만을 보고 감탄하지 않았던가요.

상처 나고 벌레 먹은 볼품없는 단풍잎에 따듯한 위로의 눈길 한 번 준 적 있었을까요. 카메라 들이댄 적 있었나요. 패러독스입니다.  이생진 시인을 만나 상처 난 영혼 위로받을까 합니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의 시 “벌레 먹은 나뭇잎” 전문. ‘시인과 갈매기’ 중에서)

‘연탄재 시인’으로 잘 알려진 안도현 시인은 이 시에 격하게 공감했던 터라 연탄재 대신 나뭇잎으로 살짝 변주해서 이생진 시인을 오마주 했습니다.

“구멍 난 나뭇잎 함부로 밟지 마라
너는 한 번이라도 네 속살로
남을 먹여 살린 적이 있느냐”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오늘의  목적지 ‘군왕봉’에 다다릅니다. 군왕봉(君王峰 394m)은 무등산 장원봉에서 두암동 쪽으로 뻗은 줄기로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에 이를 에워싼 모습이 흡사 ‘군왕’을 중심으로 여러 신하가 줄지어 임금을 첨모 하는 듯한 형국으로 되어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꼭대기에서 시내 반대편인 등촌 마을 쪽을 바라봅니다. 들판의 벼들은 누렇게 익어가고 있고 들판 사이의 가을길이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아름답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끊임이 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 을 의심하면서 한 길을 남겨 두었다” 는 R. Prost를 만나볼까 하다가 추석도 되었고, 학창 시절 국어시간도 생각나고 해서 ‘한국의 모더니즘’ 김광균 시인을 만나 보기로 했습니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 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 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 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셀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帳幕)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김광균 의 시 “추일 서정(秋日抒情)” 전문. ‘인문평론’ 1940. 10)

•이 땅의 모든 ‘가난한 시인님’들을 위하여

 시도 몇 편 읽고 ‘군왕봉’도 올랐으니 이제 다시 산아래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문득 지난 5월,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 부커상을 받았다고 떠들썩하던 때 최영미 시인의 SNS 글이 떠올랐습니다.
 
“마포세무서로부터 근로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내가 연간 소득이 1300만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이며 재산이 적어 빈곤층에게 주는 생활보조금 신청 대상이란다. 약간의 충격. 공돈이 생긴다니 반갑고 베스트셀러 시인이라는 선입견 없이 나를 차별하지 않는 세무서의 컴퓨터가 기특하다...”

영화 제목이 아니더라도 ‘죽은 시인의 사회’ 아니 ‘시와 문학이 죽어가는 사회’입니다. 돌탑에 이 땅의 모든 ‘가난한 시인님’들의 소원을 대신 빌면서 하산합니다. 올가을은 유난히 찬란하리라는 걸 직감할 것입니다. 2016년의 여름을 견뎌낸 사람들은!

임영렬 시민기자  chkorea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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