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의 ‘땅끝’이란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상당수 사람들은 이곳을 ‘끝의 서글픔’과 같은 느낌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왜 바다의 언저리 즉 바닷가가 끝이지? 그 바깥쪽은 천길 절벽이고 절대 가서는 안 될 곳인가? 바다가 아무 것도 없거나, 그 무엇도 아닌 허(虛) 무(無) 공(空)의 존재였던가? 우리에게 바다는 무엇인가?

뻘짓이란 말이 있다. 사전에 나오는 말은 아니나 대충 헛짓 또는 쓸데없는 노력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그 구조를 보면 ‘뻘’과 ‘짓’의 합체(合體)다. 뻘과 관련 있는 행동이겠다. 낙지잡고 조개 캐는 그런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헛짓인가?

정작 우리는 뻘의 원래 뜻도 잊은 채 ‘뻘짓’에 그런 누명을 씌워놓고 있다. 사전의 표기로는, 뻘은 펄이다. ‘뻘짓’의 어원학적 분석이다. 뻘 또는 펄을 그렇게 바라보았듯, 우리는 바다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흔히 ‘갯가사람’이라고 하는 말의 ‘갯가’에도 그런 속뜻 또는 뉘앙스가 진하게 묻어있다.

세계지도 또는 지구의(地球儀) 속에서 한반도를 바라보라, 갯가 아닌 곳이 어디겠는가? 바다와 좀 멀다고 청주나 충주는 대륙 또는 내륙지역인가? 그럼 서울은? 우리나라 지도만으로 파악하는 느낌과는 달리 우리의 살림터 한반도는 숙명적으로 해양성(海洋性)을 타고난 곳이 아니던가? 어쩌다 우리의 역사와 의식은 바다를 저 바깥쪽 변방(邊方)에 방치해두고 있었을까?

한자말 방방곡곡(坊坊曲曲)은 이를테면 동네방네다. 동네방네는 골짜기(마을) 동(洞)과 동네 방(坊) 글자에 곡조 섞은 말이다. 방(坊) 곡(曲) 동(洞) 등은 다 땅(토지 地)을 속뜻으로 품는다. 坊의 부속품인 흙 토(土)나 모 방(方) 글자도 그렇다. 땅의 굽이굽이는 마을을 품고 있다. ‘노래’의 뜻이기도 한 굽을 곡(曲)이 ‘마을’을 가리키게 된 내력일 터다.

‘삼천리 방방곡곡’에는 가락이 살아있다. 전국의 여기저기라는 의미를 구성지게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더 들여다보면 우리의 방방곡곡이나 동네방네에는 바다(의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바다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다시 던지게 되는 대목이다. 바다는 그리도 별 볼일 없는 존재인가? 바다가 만만한가?

일본에서 우리의 방방곡곡처럼 쓰는 말은 진진포포(津津浦浦)다. 물(바다) 건너는 나루 진(津)과 갯가(바닷가) 동네 포(浦)로 만든 말이다. 물을 뜻하는 수(水)의 변형인 삼 수(氵)가 붙은 글자는 물과의 친연성(親緣性)을 짐작하게 한다. 언어나 생활은 그 터전의 환경을 반영한다.

절반이 섬인 반도(半島·페닌슐라 peninsula)와 섬[도(島)·아일랜드 island]의 차이일까? 방방곡곡은 평야 또는 산지(山地)의 이미지다. 진진포포는 바다 또는 강의 옆 또는 뒷마을들이다. '전국의 구석구석'에 대한 우리와 그들의 생각이 이렇게 다른 것이다.

우리는 뭍의 이미지 삼천리 방방곡곡인데, 그들은 나루와 포구의 모습 진진포포로 자기네 영토인 길쭉한 섬들을 떠올린다. 섬사람들의 숙명의 굴레이기도 하겠으나, 그 굴레는 바로 자신들 삶을 짓는 방법이 된다. 왜구(倭寇)라는 해적 떼는 그들 나름의 생존의 당위(當爲)였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선배 나라인 우리와 중국이 왜구 등쌀에 오래 어려움 겪었다.

그 왜국(倭國) 섬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왜구는 생존을 위한 필연(必然)이었을 것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종족 또는 겨레들의 성품은 이런 환경의 영향을 받아 지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그런 성품을 ‘침략적’이라 평가하고자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앞으로 나아가는 기상의 ‘진취적’(進取的) 성향이라 할 것이다.

세계사 속에서 근대 스페인 포르투갈과 그 후의 영국의 해양성을 주목하고자 한다. 또 명치유신(明治維新·1853∼1877) 이후 서구문물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여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발전을 이룩한 일본의 또 한 얼굴이 품은 해양성을 살펴야 한다. ‘갯가 것들’의 그런 성품에서 세계를 주름잡은 그러한 진취성과 모험정신이 생겨나지 않았을까?

광주의 시민운동그룹 <무등공부방> 강의실의 지도는 우리의 터전과 바다의 관계를 감동적으로 보여준다.(사진) 대항해시대 이후 스페인 포르투갈 등 서양 해적들로부터 비롯된 ‘보통’ 세계지도 아닌, 우리 땅의 본디를 살린 지도다. 그 중심에서 우리가 태평양을 보듬었구나.

누가 이를 다만 ‘거꾸로 그린 지도’라고 할 것인가? 남도 해남 송지면의 갈두리(葛頭里)를 ‘땅끝’으로 불러야 했던 우리의 생각은 옳았을까? 칡덩굴[갈(葛)]의 머리[두(頭)]라는 당초의 땅이름에는 이런 퇴영(退嬰)의 의식이 없는, 선조들의 지혜와 염원이 스며있는 것은 아닌지.

흑산도 안쪽, 한반도와 중국 사이의 지중해(地中海)가 이 지도에서 비로소 바로 보인다. 이 동아시아지중해에서 일찍이 고대문명이 태동했었느니, 바로 황하(黃河)문명이다.

메소포타이마 이집트 인도 황하의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發祥地) 중 여태 온전한 곳이 이 동아시아지중해다. 3,500년 전 갑골문(甲骨文)으로 한자(漢字)를 발명한 이래 이 지역은 한국 중국 일본 등 인류사에서 결코 만만할 수 없는 겨레들의 각축(角逐)의 터전이었다.

15세기, 중국이 잠시 바다에서 한눈을 파는 사이에 유럽의 벤처 해적들이 인도양과 태평양의 주인 없는 바다를 점령했다. 동아시아지중해의 몰락과 유럽과 미국의 번영의 배경이다.

아직, 바다는 우리의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배나 탄다.’거나 ‘갯가’라는 말은 부정적인 뜻을 품는다. 바다의 품성들 즉 해양성에 대한 이해나 활용, 선호도 등은 그리 높지 않다. 아기자기한 이쁜 놀이터로서의 바닷가 말고, 조개 캐고 낙지 잡는 뻘짓 말고, 우리에게 바다는 있는가? 장보고나 이순신의 바다는 어디로 갔지? 그러고도 해양산업에서 방방 뜨기를 원했다고?

우리는 한때 배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짓는 나라였다. 조선업과 수출을 바탕으로 해운업도 글로벌 다크호스 중의 하나였다. 해양을 배경으로 하는 이 산업들이 하릴없이 망가져 내리는 모양이 심란하다. 문득 진진포포의 일본과 방방곡곡의 우리 사이의 차이를 생각한다. 언어가 시사(示唆)하는 것처럼 그들에 비해 우리의 해양성(海洋性)은 튼실하지 못한 것 같다.

일찍이 우리의 벤처해적 장보고는 천하(중국)를 휘감은 동아시아지중해의 이 물길을 휩쓸었다. 충무공 이순신이 해전(海戰) 사상 다시 없을 전승(全勝) 이끈 바다가 여기다. 어쩌다 그 후손들의 간담(肝膽)이 쥐새끼 알통만큼 꾀죄죄해졌던고.

잊어서 잃어버린 그 바다를 되찾아야 우리는 산다. 저 바다가 정녕 우리의 살길이려니!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네 (I must go down to the seas again) ...> 영국 해양시인 존 메이스필드의 가슴 벅찬 시 제목이다. 다행히도 저 바다는, 아직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대동문화 96호 [2016 9,10월호]

강상헌 편집인  chkorea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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