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수필이 인생의 향기라 여긴다. 내가 쓴 글들은 어떤 향일까. 코 막혀 내 글의 향기를 맡지 못하고 자아도취에 치우친다면 꽃내음 못 맡는 것보다 악취 풍기는 게 더 부끄러운 일이지 않겠는가.”

위 글은 2015년 <무등수필> 연간집에 실린 ‘향기의 교향악’의 일부이다.

누구라도 한번쯤 자신의 향기에 대하여 생각해 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향기를 뿌리는 사람인가. 내가 살아 온 길에서 배어나는 향기들, 때로는 보랏빛 추억이며 핑크빛 러브레터이기도 했다.

최은정 작가의 수필은 곱씹는 맛이 진하다. 하찮은 일상도 그녀의 펜 끝에서 씹히면 향기를 발한다. 집 모퉁이 오래된 거적을 들추면 거기 하얗게 싹을 틔운 풀씨들, 일시에 쏟아지는 그리움의 향수.

중등교과서에 실린 ‘다듬이 소리’에서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진다. 두근두근, 푸른 동맥에 붉은 피가 돈다. 아련한 추억이 퍼진다. 50대 이상의 중년층에게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고, 청소년에게는 조상의 지혜를 생각해보게 한다.

수필은?　“느낌과 깨달음 사이에 놓은 삶의 고백”이라고 말하는 최은정 작가. 그녀의 집은 작은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독립운동가 목정 최한영 선생의 장손녀로 태어나 전남여고와 조선대를 졸업한 후 집안의 소개로 시집을 갔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급장(반장)을 하던 자녀 때문에 독서주간에 1일 교사를 하게 됐다. 그때 만난 김구봉 선생은 최은정 작가의 소질을 발견하고 글을 쓸 것을 권유한다.

‘사실 같은 거짓이 소설이라면 거짓 같은 사실이 수필’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최은정 작가. 40대 후반 무렵이었다. 과묵한 남편에게 “당신 나 사랑해”하고 묻곤 했는데, 남편은 “너와 내가 똑같이 보라색을 나눠가졌는데, 너의 보라색이 햇볕에 바랬지만 나의 보라는 가슴 속에 있으니 서로 꿈만을 변치말자”고 말했다.

그때서야 자신이 잃어가던 보라색을 되찾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의 글감은 남편의 선물과도 같았다고 고백한다. 다음은 남편과 나눴던 보랏빛 꿈이다.

내게 금빛과 은빛으로 짠 / 하늘의 천이 있다면,

어둠과 빛과 어스름으로 수놓은 / 파랗고 희뿌옇고 검은 천이 있다면,

그 천을 그대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 나는 가난하여 가진 것이 꿈뿐이라.

내 꿈을 그대 발밑에 깔았습니다 / 사뿐히 밟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하늘의 천 / 예이츠)

최은정 작가에게 인생을 하이라이트를 물었더니 “사과궤짝에 그릇 하나 엎어놓고 살 때”라고 한다. 신혼에서 아이들 낳고 살던 무렵이다. 부엌문을 열면 온갖 꽃들이 철따라 피어나고 열 칸 대청이 있던 시절, 소꿉장난처럼 살았다.

그녀는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 하고 소설은 인물 중심의 이야기지만 수필은 인격이다. 따라서 수필가는 철학자와 같다. 왜냐하면 시는 미쳐서도 쓰고 술에 취해서도 쓰지만 수필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오장육부를 통과한 정제된 인격의 언어가 수필이다.”고 말한다.

또한 “수필은 상상이 아니라 진실이다. 작가의 속으로 들어가 작가의 체험을 공감해 주는 일, 그래서 서로의 속사정을 안다. 수필은 ‘소통의 문학’이고 ‘고백의 문학’이다.”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가라앉고 평상심을 되찾은 그녀의 서재, 예이츠의 시가 흥얼거림으로 흘러나온다. 그녀의 발아래 깔아놓은 보랏빛 꿈, 철없는 아내가 가야할 길에 깔아 놓은 배려 깊은 남편의 정을 느낀다. 그 꿈속에서 최은정 작가의 작품들이 탄생했다.

문우들의 격려도 한몫을 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낙담하고 있을 때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 은정 女士. 하늘이 무너진 곳에 ‘황금 연못’을 파고 눈물 삼키며 당당하게 사는 모습에 감격합니다. 상사초(想思草)를 찾는 마음이면 황혼을 아직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 이파리가 없어도 골짜기를 밝히고 메우는 힘 때문에. 부디 콸콸거리며 글을 쓰세요. 6월 6일. 허세욱 -

혼자만의 기억의 우리의 기억이 되고 우리의 기억이 한 시절의 돌아보는 추억이 됐다. 그리운 시절이야 누구에게야 없을까마는 최은정 작가의 수필에서는 끈끈한 가족애와 자연이 어우러진 향기가 난다. 햇볕에 바랜 보랏빛은 친구에게, 이웃에게, 문우들에게 골고루 나눠져 다시 정으로 돌아왔다.

스스로의 과거 속, 자신만이 간직한 이야기들이 금빛처럼 빛나는 ‘황금연못’을 넘었다. “가만히 돌아보니 인류 속에 살더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자식들과 더불어 황금언덕을 올랐다.

애정을 듬뿍 담긴 ‘다듬이 소리’, ‘풀꽃 같은 말씀들’, ‘수양버들 앞에서’, ‘금강산과 예술정신’, ‘향기의 교향악’ 등 제목만 들어도 瑞田류라 칭하는 그녀만의 향기가 옮아온다.

심호흡을 한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오래된 향기들이다. 최은정 작가의 막힌 코를 뚫었던 고춧잎 짱아지의 향기는 알 수 없지만 누나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뿌려준 샤넬 No5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듯하다.

달력 뒷장을 뜯어서 작품을 쓴다면 소녀처럼 웃는 최은정 수필가. 손을 움직이다보면 마음이 작품을 쓴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필이 애인인줄 알았더니 자식이었어.”

그녀의 아파트를 나오며 잠시나마 황금연못에 정신줄을 적신 느낌이 발걸음을 감싸왔다. 가지런히 정리된 책과 접시, 그녀와 평생을 가는 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뿌리고 있다.

최은정 작가는 광주 출생으로 전남 여중·고, 조선대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수필 천료로 등단하여 한국문인협회, 국제 펜클럽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광주문인협회 부회장, 시누대 회장과 무등수필문학 회장을 역임했다. 수필집으로 <황금연못>, <황금언덕>이 있다. 황금언덕에 실린 ‘다듬이 소리’는 중등교과서에 실렸다. 광주문학상과 2004년 제23회 한국수필문학상을 수상했다.

대동문화 96호 [2016 9,10월호]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