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은 42살 때인 1472년 음력 8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지리산을 등반하고 ‘유두류록’이라는 산유기를 남겼다. 16일 천왕봉에 오른 기록이다.

기러기나 고니라 할지라도 우리보다 높이 날 수는 없으리라. 하늘이 푸르고 아득하여 끝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말하기를 “멀리 바라볼 적에 그 요령을 얻지 못하면 나무꾼의 견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대게 먼저 북쪽을 보고, 다음으로 동쪽을 보고, 다음으로 남쪽, 그리고 서쪽을 바라보아야 한다. 또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 글을 읽은 이후로는 반드시 산의 정상에서 북-동-남-서의 방향으로, 가까운 곳부터 먼 곳의 거리로 조망하게 된다. 산에서는 하늘과 바다와 산과 들판과 마을과 길과 사람들이 바라다 보인다. 그것은 산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다.

한민족은 산신 숭배 사상 민족

산은 우리 공동의식에 공간 지형학의 기준점이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는 지형이 가장 알맞은 삶터였다. 우리 민족의 방향 감각과 공간 의식이 산을 기점으로 생겨났다. 그래서 단군 신화부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산 숭배 민족이었다. 산은 민족의 생명 터이자 정신적 표상이었고 생활문화의 터전이었다.

산을 오르는 이유는 다 다르기 때문에 하나로 꿸 수가 없다. 삶에 지치고 생에 권태를 느꼈을 때, 생의 용기를 얻기 위해 등등등…. 우리나라 산이 모두 4,440개라고 산림청에서 발표한 것이 2007년이고, 등산 인구는 2015년 통계조사 기관이 1년에 1,800만 명을 넘어선다고 하니 산행 인구 곱하기 각자의 산행 횟수만큼의 남다른 이유가 다 있을 것이다.

산은 자연의 대명사다. 산은 자연의 철학자이자 교사이다. 그 스승이 우리에게 무언으로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산에서 태어났다. 구약의 시나이산은 야훼의 산이고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십계명을 받은 곳이다.

설산에서 고행하던 고타마 싯다르타는 고행을 끝내고 산림 속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를 이루었다.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산이 있기에 신과 인간계의 점이지대인 산이 가장 신성한 곳이 되었다.

오늘도 나는 가리 배낭을 메고

오늘도 산을 오른다. 등산 배낭은 ‘무게는 적이다. 그러나 하나라도 빠뜨리면 생명의 위협이 따른다.’는 등산 교본을 따라 산행짐을 꾸린다. 가장 짧은 구간을 통해 정상까지 해가 있는 동안에 등산을 마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산은 없다.

그래서 음식은 2끼 분량, 물도 10시간 정도 견딜 수 있는 분량이면 충분하다. 등산복은 갈아입을 수 있도록 여벌 상하의를 준비한다. 스틱, 램프, 장갑, 모자, 수건, 화장지, 쓰레기봉투, 돗자리 등을 준비한다. 중요한 것은 산의 환경과 등산 계획에 따라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과 지식이 교차하면서 산행이 풍부해지고 깊어진다.

등산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산이 시간마다, 계절마다, 밤낮으로 서로 다른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산은 각각 다른 얼굴과 표정으로 우리를 맞는다. 북한산, 팔공산, 무등산, 한라산, 설악산 등을 천 번 이상 등반했다는 꾼들도 많은 것을 보면 산의 얼굴의 천변만화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또 하나 산을 가는 이유 중 하나는 인심(人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풍경도 좋지만, 인심 풍경도 산에서는 넉넉하다. 함께 산행하면서 산을 보증 삼아 넉넉하고 진실된 이야기를 나눈다. 산에서는 아무도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산처럼 듬직한 산우(山友)와 가을산을 오른다. 단풍이 한반도의 산 등골을 타고 내려오면서 아우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산은 들머리부터 된비알이다. 가풀막을 오르면서 산길은 뱀이 기어가는 것 같다. 상반신이 흠뻑 땀으로 젖어들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한 발 한 발 높이를 쌓아 가면 다리 근육이 먼저 힘들어지고 다음은 심장과 허파가 고되다.

‘길에는 주인이 없어 그 길을 가는 자가 주인이다.’는 말은 <산경표>라는 책을 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득의의 구절이다. 산길도 주인이 있어 그 길을 가는 자가 주인인데, 이 산길을 누대의 산꾼들이 걸어가면서 몸으로 낸 길이라는 진실을 마주치면 진실로 마음이 아득해진다. 도대체 이 산길을 최초로 걸어간 이는 누구일까? 그 뒤로 얼마나 많은 발바닥들이 이토록 분명한 길을 낸 것일까?

여암 신경준이 우리 강산의 산줄기를 대간·정맥·정간 등으로 나누고 백두대간과 연결된 14개의 정간·정맥으로 부른 사실이 알려지면서 대간꾼들이 생기고 산길이 새로 나기도 했다. 개척 등반을 하는 산꾼들도 많다.

산은 산길을 걷는 자가 주인이다

산의 안부(鞍部)에 오르면 등산은 80% 이상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산마루의 움푹 패인 곳, 능선 고개이며 말안장처럼 봉우리와 연결된 곳이다. 이곳에 오르면 배낭을 벗고 땀을 들이며 물이나 간식이나 과일을 먹는다. 멈춤과 움직임, 일과 쉼이 교차하는 것이 산행이다.

안부에서 마지막 정상까지에 다가서기 위해 또 우리는 출발한다. 한 번에 정상을 보여주는 산은 없다. 산은 산의 고자인 山의 상형문자가 산봉우리 3개가 것처럼, 조산 없이 울울한 봉우리가 있을 수 없다. 또 다른 산등이 눈앞에 갑자기 나타난다. 산등과 산등을 등등등(登登登)하면서 걷고 또 걷는다.

이윽고 조망이 터지고 산줄기들과 들판의 윤곽들이 역연해진다. 산 정산 부근에는 반드시 산고비가 있어 산에 들어온 이후 가장 튼튼한 근력과 폐활량을 실험한다. 산은 언제나 기진맥진한 그로기 상태의 인간에게 비로소 환한 정상을 내놓는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만만한 산이란 결코 없다.

드디어 정상에 오르면 무장해제를 하고는 저 산 아래를 북-동-서-남 방향으로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관찰한다. 정상을 정복의 상쾌함을 만끽한다. 정상 표지석을 붙들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산 아래 지인에게 전송하기도 한다. 거기 오른 사람에게 산 정상은 언제나 특별하다.

경치 좋은 곳에서 혼자 슬퍼하네

정상을 정복하고 혼자 또는 여럿이 모여 산행식을 먹는다. 지친 심신에 그 소찬과 밥의 진미는 더욱 각별하다. 산우는 정상주(頂上酒)로 막걸리를 내놓았다. 그 맛은 산 아래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데, 그것은 그 산의 모든 자연이 참여하는 맛이기 때문이다. 산과 산새와 바람과 나무들과 바위들….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선생은 무등산을 기행한 ‘유서석록’에 이런 구절을 남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승처상심자애(勝處傷心自哀)라 하여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 인간은 유한하고 자연은 무한하다. 그것이 슬프다. 아마 그런 뜻일 것이다.

일행은 모두 한결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정상 단체 사진을 찍고 나서는 가뿐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반드시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기쁨이 너무 커서 산에서 자고, 더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산사람으로 산에 산다. 그런 사람들을 빼고는 모두 산을 내려가야 한다. 사람들이 다 내려간 산은 혼자 다시금 우뚝해진다.

대동문화 96호 [2016 9,10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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