궂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광주 북쪽에 있는 건국동을 찾았다. 건국동은 1998년 전국 소규모 동 폐합 정책에 따라 본촌동, 우치동, 삼소동을 통합해서 만든 행정동 명이다. 당시 제2건국운동이 추진되는 과정 속에서 나라를 건국하듯 3개동이 모여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로 지어진 이름이다.

건국동 안에는 신룡동, 용두동, 본촌동, 지야동, 생룡동, 월출동, 오룡동, 대촌동, 용전동, 효령동, 수곡동, 태령동, 용강동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효령동에는 또다시 우곡, 학동, 종방, 신촌마을 등 4개의 자연마을이 산재한다. 행주기씨 기은종택은 종방마을에 있다. 막상 종방마을에 이르러 마을입구에 서 있는 지명비를 보니 옛 이름은 우치(牛峙)라고 전한다.

처가의 재산관리를 위해 정착하다

기은(棄隱) 기의헌(奇義獻.1587∼1653)은 부친 기효분과 모친 함풍이씨의 셋째 아들로 광주 소고룡리에서 출생했다.

선생의 가계를 잠깐 살펴보면 선대 덕성군 기진은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첫째가 송호 기대림, 둘째가 고봉 기대승, 셋째가 기대절, 넷째가 기소과이다. 기대임의 장남은 기효분이며 효분의 세 아들은 강재 기방헌, 만수재 기창헌, 기은 기의헌이다. 기묘명현이었던 복재 기준이 사화에 연루되자 기준의 형이 되는 기진이 광주로 은거했다. 복재선생은 기은에게는 작은 증조부가 된다.

기은은 태어날 때부터 복재선생의 절의정신과 고봉선생의 학문적 유훈을 안고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호남지방 의병도유사를 마다하지 않은 것도 어찌 보면 선현들이 가졌던 절의정신에 그 연원을 두었다 할 것이다.

기의헌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곡성현감 기효전의 댁에서 자랐다. 25세되던 1612년에 광주조씨 조지린의 세 딸 중 장녀와 혼인을 하고 처가 동네인 우점리에 정착했다. 남편을 일찍 여읜 장모 의령남씨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고자 사위를 그곳에 거처하게 했고 기의헌은 처가를 돌보면서 애경사를 도맡아 처리했다. 그 재산은 지금까지도 산재해 있으며 광주 동구 녹동과 광산구 연동에 토지로 남아 있다. 재미난 것은 기은선생은 사후에도 재산을 지키고자 녹동에 묘를 썼고 그의 부인 광주조씨는 연동에 묘를 썼다는 것이다. 현재 종손 또한 옛 선조께서 물려주신 땅은 더하지는 못하더라도 팔지는 않겠다고 말한다.

임진 정유난을 겪고 이제 북쪽으로부터 정묘호란을 겪으니 기은은 호서호남 의병을 지휘하던 사계 김장생의 부탁을 받아 광주지역 거의 양향유사로서 활동을 했다. 병자호란에 다시 청나라 군사가 쳐들어오니 광주의병을 모아 도유사로서 활동을 더했다.

기의헌의 자녀로는 죽봉 기전, 문과 급제한 기침이 있다. 종가의 종손인 기용주(1940)는 행주기씨 30세손이자 승지공파 16세손이다. 그는 대전충남지방병무청장(1998-1999)과 광주전남지방병무청장(1999-2001)을 역임한 고위 공무원 출신이다. 오랫동안 병무행정을 담당하면서 종택을 떠나 살다보니 부모님이 계셨어도 종택 관리가 잘 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도둑들의 손길도 비켜가지 못해 많은 문서를 도난당했다.

종택은 개축되고 사당만 남아

600여평 가량 되는 종가 마당에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화단이 있고 오른쪽으로 종택이 있다. 이미 문간채, 행랑채는 온데간데없고 마당에 까지 자동차가 들어가는 모습으로 변했으며 안채 또한 기역자형 구조에서 일자형으로 바뀌었다. 마루는 남아 있지만 벽체는 적벽돌 구조이고 지붕은 강판 팔작지붕이다.

기은 선생은 종택에 당호를 걸었는데 이름을 육오당(六吾堂)이라 했다. 하지만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안채로 들어가는 좌측 언덕에 행주기씨 사당이 있다. 4대를 봉사하는 가묘다. 1978년에 문중에서 증축했다는 이 건물과 안채 대청마루에 놓인 제사상만이 그 옛날의 종택 모습을 겨우 보여주는 듯하다.

종택에서 가까운 곳에 우산정사가 있다. 송은 기정륜(1663-1740)이 학문을 익히고 가르치는데 사용된 건물이다. 우암 송시열이 썼다는 우산정사 청백전가(牛山精舍 淸白傳家)의 액호가 큼지막하게 좌우에 걸려 있고 중앙에는 송은(松隱) 편액이 걸려 있어 집주인이 누구인지를 알게 한다.

청백전가는 중국 한나라 때 양진이란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자손에게 재물을 남겨주지 않는 대신 청백리의 자손이란 명예를 전해 주리라’는 데서 유래 했다고 한다. 집안 대대로 청백의 정신을 이어 전하겠다는 것을 청백전가라 한다. 아마 행주기씨 10세손 정무공 현암 기건이 생육신이자 청백리로 이름나 있어 이로써 연원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우산정사는 당초 종택내에 있었던 것을 그의 8세손 기경섭이 이건을 추진하다가 세상을 뜨자 그의 아들 기세국이 1917년에 현 위치에 중건했다. 벌써 일백년이 다되어 간다. 우산 정사 앞에 올곧이 자란 쌍벽오동과 붉은 백일홍은 벌써 일백년이 넘었다는 얘기다.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봉황이 깃들기를 염원하며 심었을 벽오동이다. 정내에는 기세국, 기동준의 기문과 기세국의 원운, 기세연, 이석 등이 쓴 차운이 걸려 있다.

너희에게 소망하는 것은

기은 선생은 나라를 올바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집안을 바로 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자기와 국가의 경영 또한 올바른 제가를 통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예의와 범절, 가정에서의 효(孝), 제(弟), 자(慈)의 정신을 강조했다.

기은은 자제들과 조카들을 모아 교육하면서 이렇게 당부했다. “내가 너희들에게 소망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나는 너희에게 입신양명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장원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맛있는 음식으로 나를 봉양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부지런히 학문을 닦고 어버이로서 자식을 사랑하며 동생으로서 형을 공경하고 형은 동생들과 우애하며 부부는 서로 존경하며 공경하고, 임금에 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그 올바름을 행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고 했다. 이것이 면학설시자질이며 가훈이다. 기은은 또한 사람다운 삶을 이루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병자호란 후 기은선생은 은거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거처하는 집을 육오당(六吾堂)이라 부르며 다음과 같이 삼언시를 지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나아가 육오당속제 오언절구 6수를 지어 설명을 더하고 있다.

식오식(食吾食) 음오천(飮吾泉) 의오의(衣吾衣) 낙오천(樂吾天) 수오명(守吾命) 종오년(終吾年)

나의 음식을 먹고 나의 샘물을 먹으며 나의 옷을 입고 나의 천성을 지키며 나의 운명을 지키다가 나의 생애를 마치리라.

이미 고인이 되신 부모님들은 종가 살림이 아무리 어려워도 걸인이 와서 구걸을 하면 그대로 보내지 않고 밥 한 끼라도 대접해서 보내곤 했다고 한다. 이웃을 돌보라는 뜻이 은연중에 종가에 흘렀기 때문이리라.

종손은 옛 이야기에 사계절 어느 때든지 팥 국수를 맛있게 해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시울에 젖어든다. 그 어머니는 쌀을 튀겨 조청에 버무린 강반과 쌀과 엿기름을 삭혀서 만든 엿을 잘 만드셨다고 한다. 오늘은 종손이 직접 타준 커피향이 새롭다.

대동문화 97호 [2016 11,12월호]

최성은 전문위원  koindol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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