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으로 쳐들어온 왜군은 파죽지세 격으로 도성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은 연패하였고 선조와 조정은 피난길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보름 만인 1592년 4월 14일이었다. 밤이 깊어서야 도착한 이일(李鎰)의 장계에는 적이 오늘내일 사이에 도성에 이를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장계가 들어온 뒤 얼마 되지 않아 선조와 조정은 피난길에 올랐다.

칠흙같이 어둡고 비가 내려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사관(祠官)이 종묘(宗廟)의 신주(神主)와 사직(社稷)의 위판(位版)을 받들고 세자 광해군이 그 뒤를 따랐다. 광해군은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에도 종묘 신주와 사직의 위판을 모셨다.

5년 만에 왜란이 종료되고 1593년(선조 26) 8월, 세자 광해가 신주를 모시고 한양에 도착하니 선조가 백관을 거느리고 궁을 나와 묘문(廟門) 밖에서 공경히 맞이하였다.

역대 왕들의 신주와 위판을 모신 제례 공간

죽어가는 백성들은 외면하고 몽진 길에도 모시고 간 신주와 위판. 고대 동아시아 왕조 시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왕조 시대 종묘와 사직은 곧 국가였다.

태조 3년(1394) 10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조선 왕조는 그해 12월에 종묘를 착공하여 이듬해(1395) 9월에 완공하였다. 개경으로부터 태조의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정전에 모셨다. 이렇게 조성한 종묘는 그 후 수차례 제도가 바뀌고 건물을 늘리면서 점차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종묘는 정전 19실에 49위, 영녕전 16실에 34위의 신주를 모셨고, 정전 뜰 앞에 있는 공신당에는 정전에 모신 왕들의 공신 83위를 모셨다.

정문인 외대문의 오른쪽 소문을 통해 들어서면 돌길이 맞이한다. 신이 다니는 길이라는 신로(神路)이다. 신로 표지판에는 신로임을 알리고 통행을 삼가라고 안내한다. 신로는 거칠고 넓적한 박석이 세 가닥으로 깔려 있는데 양 옆길보다 가운데 길이 약간 높다.

가운데 길이 신로인데 이곳은 향, 축문, 폐백 등 제사 예물이 오가는 향로를 겸하여 신향로라고도 한다. 오른쪽 길은 임금이 다니는 어로, 왼쪽은 왕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향대청 동남쪽으로 망묘루(望廟樓)가 있다.

왕은 종묘에서 어떤 행로를 따라 제례를 올렸을까 상상하며 향대청을 나와 오른쪽으로 가면 재궁(齋宮)에 이른다. 재궁은 왕이 머물면서 세자와 함께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는 곳이다. 재궁 정문에 들어서면 북쪽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어재실이다. 임금이 머무는 곳이다. 동쪽으로 세자가 머무는 세자재실, 서쪽으로 어목욕청이 있다.

재궁을 지나 정전 동쪽으로 가면 정전수복방, 전사청, 제정이 이어진다. 정전수복방(正殿守僕方)은 종묘를 지키는 수복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그 앞으로 찬막단(饌幕壇)과 성생위(省牲位)가 있다. 천막단은 제사에 바칠 음식을 미리 검사하는 단이다. 종묘제례에는 날 음식을 올렸으므로 특별히 주의해야 했기 때문에 천막을 치고 휘장을 둘러 청결하게 하였다.

정전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세 곳에 있는데 남문은 신이 다니는 신문(神門)으로 혼백이 드나드는 곳이다. 제례 때 제관이 출입하는 곳은 동문이고 악공, 춤추는 일무원, 종사원은 서문으로 출입하였다. 정전 협실 양쪽으로 동쪽에는 동월랑(東月廊), 서쪽으로 서월랑(西月廊 )이 있는데 이것은 제사하는 날 눈이나 비를 피하기 위해 태종의 명으로 만들어진 건물이다.

가장 중요한 종묘의 제사는 대제(大祭)

정전 앞으로 월대가 있고 월대 가운데로 신로가 신문에서 정전의 신실로 이어진다. 정전 경내에 들어오면 정전 건물도 건물이지만 돌로 된 월대가 눈에 확 들어온다. 이곳에 제관과 집례관들이 도영하여 제례를 올린다. 정전은 국보 제2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전 서남쪽 담장 밖에는 제례악을 준비하는 악공청이 있다. 악공청은 종묘제례 때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기다리며 연습을 하던 건물이다.

종묘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제(大祭)였다. 대제는 춘하추동 사시제, 납제 등 일 년에 다섯 벗 지냈는데 이를 통칭 오향대제(五享大祭)라고 한다. 종묘에는 대제 외에도 다른 제사가 적지 않았다. 가뭄이 심하거나 오랫동안 비가 오거나, 질병, 전쟁, 재이(災異) 등의 제사, 어가의 행사, 봉책(封冊), 관혼 등 국가의 큰일이 있으면 종묘에 나아가 사유를 고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당에 올리는 천신(薦新), 사냥해서 잡은 짐승을 올리는 천금(薦禽) 등등 수시로 제사를 지냈다. 이런 점을 살펴본다면 종묘는 왕실의 제례 공간일 뿐만 아니라 고도의 정치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종묘 정전과 영녕전, 기타 부속 건물과 종묘 제례, 종묘 제례악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정유철 서울본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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