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가 건너다보이는 해남 달마산 기슭 이진마을에서 꽃상여 타고 할아버지가 저 세상으로 가시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땅에 튕겨 허공에 흩어지던 방울 소리와 상여꾼들 노래, 여러 색깔 만장(輓章)과 꽃상여 종이꽃, 그 현란함 속에 오래 서있었다. 어린 소년은 어지러웠다. 품위 있는 옛 장례의 모습으로 늘 기억한다.

언론인이며 문화사업가였던 한창기 선생(1936~1997)이 살았을 적에 이미 자기 초상치레를 꼼꼼히 설계했다는 얘기를 듣고 ‘한창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서 품격 누렸으면 저승가면서도 폼 잘 잡아야하지 않겠는가? 기자 할 때 어떤 인연으로 빚어진 한창기와의 기억들은 오랜 부담이기도 했다.

문화예술분야 기획자 이용식 박사(전남문화관광재단 연구개발팀장), 순천 풍물패 ‘잽이’의 김경선 씨, 서울서 KBS 피디로 일한 박인규 씨 등 여러 전문가들이 힘을 합친다고 하여 그 기억을 꼼꼼히 풀어냈다. 2015년 12월의 일이다. 순천대학교 강당과 고흥문화회관에서 막을 올린 공연 ‘한창기-80년만의 귀향’에서 그 기억 몇 토막도 함께 선을 보였다. 이미 늦었으되 더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애써 만든 오방색 꽃상여가 사실과 달랐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얀 지화(紙華)로 엄숙하게 차린 단정한 백(白)상여를 타고 떠났다고 뿌리깊은나무 재단 차정금 이사장이 지적해주었다. 하여간 제대로 된 상여와 상여노래가 무대에 올랐다. 간략하기는 했지만, 씩김굿(씻김굿)도 만장(挽章)과 함께 상여를 밀었다. 대저 상장(喪葬)의 예식은 엄정하게 겨레 또는 공동체의 과거를 담는 그릇이다.

대구 출신 디자이너 홍미화 씨가 한창기의 혼백을 부르는 무용수의 옷을 지었다. 부산 출신 강주미 씨의 춤을 위한 노고였다. 보성 출신 윤진철 명창이 ‘제갈공명 동남풍 불러오는 대목’ 적벽가 한 자락으로 그 시간 한창기를 비롯한 이승과 저승의 모두를 위로했다.

한창기가 베푼 뜻을 상징하는 연희(演戲)와 인물들이었다. 그로 인해 죽어가던 판소리 등 우리 땅 구석구석의 노래가 기사회생(起死回生)했고, 차(茶)문화가 살아났다. 우리 그릇의 가치를 새롭게 알 수 있었고, 말과 글을 바로 쓰는 것의 의미를 체감할 수 있었다. ‘뿌리 깊은 나무’는 ‘샘이 깊은 물’과 함께 그가 만든 혁신적인 잡지다. 문화로 세상을 흔들었다.

벌교 출신으로 순천중과 광주고를 나왔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책장사’가 되어 외판(外販)산업을 ‘창조’했다. 그가 수집했거나 그와 관련된 ‘대단한’ 물건들은 순천 낙안성의 순천시립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에 있다. 송현 시인이 최근 어떤 강연에서 한 다음 얘기는 ‘한창기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알기 쉬운 답이 되겠다. 참으로 여러 얼굴로 꾸려나간 삶이었다.

<...한창기 선생의 업적에 대해서 다각도로 조명할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한 선생을 ‘뿌리깊은나무’ 같은 놀라운 잡지의 발행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 민중의 사투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이를 전국적으로 수집하고 기록하게 한 업적을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 잎차를 현대화하는 일에 크게 기여한 바를 높게 평가합니다.

또 어떤 분은 우리 토박이말을 사랑하고 쉬운 문장을 쓰는데 크게 기여한 공적을 치하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나라의 소리를 채록(採錄)하고 채보(採譜)한 업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또 우리의 반상기(飯床器)를 현대화한 공적을 높게 평가합니다.

어떤 분은 한창기 선생이 평소에 우리 문화재와 골동품 등 귀한 자료들을 무려 6,800여점을 수집하여 마침내 순천시가 ‘뿌리깊은나무 박물관’을 만들게 한 공적을 기리기도 합니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당시 영어권 나라들 호사가들의 서재를 장식하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매 사업에 뛰어든다. 매우 이례적인 선택이다. 돈을 많이 벌고자 함이었을까? 고급스런 이미지의 비싼 물건을 상류층에 파는 외판산업의 기틀을 세운 이가 한창기다. 이후 내로라 하는 외판사업의 경영자들은 거의 ‘한창기 학교’ 출신들이다.

그 무렵 미국부대는 그에게 정식 출입증을 발급한다. 젊은 그의 사진도 든 출입증의 ‘직위’란에는 ‘세일즈 맨’이라고 찍혀있다. 아마 외판원에게 출입증을 발급한 사례는 미군 사상 유일한 경우이지 싶다고 한창기는 생전에 농담 삼아 얘기하곤 했다. 미국인들 사이에서 ‘미국인보다 영어를 더 잘 하는 한국인’으로 불린 그의 영어와 사교성, 상술을 보여주는 일화다. 미국 정치인 등 유명인들과 얽힌 일화도 많다.

돈을 벌며 그는 ‘문화산업’을 시작한다. 골골대던 판소리를 회생시키고 논두렁이나 초가집 처마 밑에서 스러져가던 농요나 민요를 채보 채록한 것이나 레코드로 내서 보존한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차(茶)를 다시 마시자는 주장과 함께 차와 다기의 상품화에 나서기도 했다. 그의 값비싼 반상기는 ‘좀 산다는 집’에서는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뿌리깊은나무와 샘이깊은물 잡지는 그런 그의 경험과 사색의 결정체다. 별나게 독재에 항거하거나 정치적인 색깔이 짙은 타입이 아니었는데도 ‘문화의 본디’를 논하는 그와 잡지사 동인들, 기고가들의 그룹은 당시 박정희 정권의 엄혹함과 능히 맞짱을 뜰 수 있었다. 나중 전두환이 칼자루를 잡으며 폐간이라는 구박을 면치 못했던 것도 그런 연유다.

풍류(風流)라는 말이 있다. 문화는 메이지 시대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개화(開化)의 뜻 시빌리제이션(civilization)을 번역한 단어다. 한자문화권의 글월 문(文)과 변할 화(化)의 문화의 원래 뜻과는 다른 개념이 됐다. 일본 영향으로 우리와 중국에서도 1895년경부터 이 말이 ‘새로운 뜻’으로 쓰였다. 차츰 컬쳐(culture)와 아트(art)를 포괄하는 뜻으로 변했다.

전통이나 ‘뿌리’를 얘기할 때 불가피하게 용어나 문자(文字)를 꺼낼 때가 있다. 한자 실종 이후 세대들에게는 이런 어휘(語彙)들이 점차 안개 속의 나무처럼 흐릿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 속뜻인 한자의 의미 없이 (국어)사전적 풀이만을 생각하다보니 생기는 현상일 터다.

‘설문해자’(說文解字)라는 동양의 위대한 저술이 있다. 한자의 文을 설명하고 字를 풀어낸다는 뜻이다. 문자의 ‘문’과 ‘자’는 글자를 이르는 말이다. 이 글의 제목 ‘풍류해자’는 설문해자의 뜻 빌어 풍류의 여러 개념을 글자의 본디부터 궁리해보자는 의미다. 어원(語源·말밑)이 튼튼하면 그 사람의 말과 글은 늘 새로워진다. 풍류와 생각도 더 다채로워질 것이다.

풍류는 풍월 음풍농월(吟風弄月) 화조풍월(花鳥風月)과 가깝다. ‘문화’보다는, 아취(雅趣) 그윽한 예술이나 노래의 뜻이 짙다. 風 즉 바람이 우리 생활과 의식에서 얼마다 다채로운 의미로 쓰이는지 짐작해본다. 누구나 예향(藝鄕)이라 부르는 우리 고장의 전통도 실은 풍류다. 한창기의 삶 또한 문화보다는 풍류의 풍운(風雲)이리라. 풍류의 시대 오니, 그의 목소리 더 귀하다. 한창기를 오늘 소환하는 이유다.

대동문화 98호 [2017 1,2월호]

강상헌 편집인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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