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 가운데 ‘큰 추위’라는 뜻의 ‘대한(大寒)’은 겨울의 마지막 절기답게 폭설과 한파로 며칠간 맹위를 떨치었다. 그래서 국정 농단사건으로 상실감에 빠진 민초들의 마음이 더욱 춥게 느껴지는 이번 겨울이다. 게다가 AI로 수천의 닭과 오리를 땅 속에 묻어야 했던 허탈한 농심은 공수해 온 낯설고 하얀 계란 앞에 서글픈 심정이 되었다. 우리는 토끼비리 같은 험난한 이 비렁길을 얼마나 더 헤쳐 나가야 할까?

답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달래보고자 도심을 벗어나 어머니 품 같은 무등산 자락으로 나섰다. 광주호 옆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상류에 이르러 눈 덮인 무등산을 마주할 때 성산(星山)이라 부르는 별뫼의 높은 언덕에 정자 하나가 있다.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오르니 노송이 오랜 세월의 당당한 모습으로 위엄을 드러내고, 그 옆에 아담한 정자가 비켜 앉아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앞과 옆으로 마루를 내고 한쪽에 방을 두어 손님이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조선중기에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이 정자를 지었고, 그 이름을 「장자」의 잡편에 나오는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 에 비유하여 '식영정(息影亭)'이라 하였다. 이곳에 임억령을 비롯하여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 교유하였던바, 이 네 사람을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부르며, 송강 정철이 일찍이 이곳의 풍경을 읊었으니,

"어떤 지나가는 손님이 성산에 머물면서 서하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들어 보소. 인간 세상에 좋은 일이 많지마는 어찌 한 강산을 갈수록 좋게 여겨 적막한 산중에 들어가 아니 나오시는가. 소나무 뿌리를 다시 쓸고 대나무 평상에 자리를 보아 잠깐 다시 올라 어떠한고 다시 보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 서석을 집을 삼아 나가는 듯하다가 들어가는 모습이 주인과 어떠한가. 푸른 시냇가의 흰 물결이 정자 앞에 둘러 있으니 하늘의 은하수를 누가 베어 내어 잇는 듯 펼쳐 놓은 듯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구나. 산 속에 달력이 없어서 사계절을 모르더니 눈 아래 헤친 경치가 철을 따라 절로 생겨나니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신선이 사는 세상이로다." 라고 하는 '성산별곡(星山別曲)'이다.

식영정

또한 '성산의 겨울 풍경' 에서

"빈산에 쌓인 낙엽을 북풍이 걷으며 불어 떼구름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조물주가 꾸미기를 좋아하여 옥으로 꽃을 만들어 온갖 나무들을 잘도 꾸며 내었구나. 앞 여울이 얼어 외나무 다리 놓여 있는데 막대를 멘 늙은 중이 어느 절로 간단 말인가. 산 늙은이의 이 부귀를 남에게 소문내지 마오. 눈 덮인 아름다운 자연인 이곳 은밀한 세계를 찾을 이가 있을까 두렵도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바탕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추위에 인적마저 드물다. 내우외환에 오랜 경기침체는 마음까지도 꽁꽁 얼어붙게 만들었고, 생필품마져 오르는 물가에 민초들의 삶이 더욱 고달픈 현실이다. ​아아, 이처럼 민생들의 고단한 그림자를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쉬어 갈 안식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푸른 하늘을 마음껏 껴안고 반짝거릴 호수도 꽁꽁 얼어 식영정의 풍경도 싸늘하니 어서 이 계절을 지나서 따뜻한 새 봄이 오길 기다려본다.

이근섭 시민기자  rmstjq2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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