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영산포의 삼영동과 안창동은 바다를 향한 전라도 사람들의 꿈이 펼쳐지던 곳이다.

“우리가 바다를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 그것은 고속도로가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콜린 그레이의 <역사를 전환시킨 해양력>이란 책에 나오는 말이다. 바다의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에 한 마디 더 보태자면 바다는 더러 비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역사에 바다가 비수가 된 예가 있다. 그 중에서도 고려 말엽부터 조선 초엽까지 이어진 왜구의 준동은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왜구의 노략질을 당한 사람들에게 바다는 재앙 그 자체였을 것이다.

조선사람들은 바다에 약하다?

물론 자랑스러운 바다의 역사가 없지 않다. 해상왕 장보고가 그렇고 진포 해전이나 한산도 대첩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주어서인지 지난해 영화 <명량>은 크게 흥행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뱃사람들의 자손이나 해양 민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관념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에 서울 낙원동에는 백명곤이란 청년 부호가 살았다. 평소 축구광이던 그는 조선축구단을 결성했고 1928년 중국에서 개최되는 대회에 팀을 이끌고 참가했다. 그런데 이 원정 경기에서 조선축구단은 참패했다. 참패의 원인을 진단하며 백명곤은 이런 말을 남겼다. “조선 사람들은 바다에 약하다.”

이 말은 그의 축구단이 대회 출전을 위해 바다를 가로질러 여행한 것을 빗댄 것이다. 그해 조선축구단은 서울을 출발,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에 승선했고 다시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대회 개최지인 상하이까지 갔다. 동해와 동중국해를 넘나드는 항해 기간 동안 선수들은 지독한 뱃멀미에 시달렸고 그 후유증으로 경기에 졌다는 것이 백명곤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백명곤이 패인으로 바다를 운운했을 때 이를 반박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이처럼 바다는 우리에게서 축구 경기의 패인으로 삼아도 될 만큼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영산포와 영산포 사람들

그런데 나주 영산포에 가면 이런 느낌이 싹 사라진다. 오늘날 여기서 바다는 수십 킬로미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다의 냄새는 코밑을 흐른다. 그리고 등대와 홍어거리까지 남아있다.

이처럼 나주의 공기에 비릿한 바다 냄새가 담긴 까닭은 지금은 달라졌지만 예전 영산강의 풍경 탓이리라. 1970년대 말엽 목포 하굿둑 공사를 시작하기 전까지 바닷물은 나주까지 밀려왔다. 당시 바닷물은 지금의 나주교 밑까지 왔고 이런 바닷물에 실려 무수한 배들이 나주에 닻을 내렸다.

그리고 이제는 거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지만 영산포라는 이름도 여기서 비롯됐다. 영산포는 고려시대 말엽 신안군 흑산도 사람들의 이주와 관련된 지명이다. 그 무렵 흑산도는 영산도라 불렸던 것 같고 실제로 지금도 흑산도에 딸린 섬 가운데 영산도가 있다. 여하튼 이주자들이 육지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 그들은 두고 온 고향 이름을 따서 그곳을‘영산’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상륙한 영산은 어디일까? 오늘날 영산포라 하면 나주시 영산동과 이창동 일대를 가리킨다. 영산동의 군함산에서 이창동의 만봉천 합류점까지 영산강을 따라 늘어선 동네다. 물론 등대와 홍어거리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고려 말엽 흑산도 주민들이 왜구를 피해 옮겨와 살았던 곳을 영산동이나 이창동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그들은 영산포의 맞은편인 지금의 삼영동에 자리 잡았다. 삼영동은 2001년까지 영산포역이 있었던 동네다. 남쪽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금성산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는데 이곳이 역사상 최초의 영산포다.

영산포 사람들은 바다에 강하다

그런데 이곳이 포구로 주목받은 것은 흑산도 주민들이 이주하기 훨씬 전부터였다. 후삼국 시절에 왕건이 함대를 이끌고 나주에 왔을 때 그가 상륙 거점을 마련한 곳은 나주 목포(木浦)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전부터 오다련이란 실력자가 살았고 여기서 오다련의 딸이 왕건과 연을 맺어 훗날 장화왕후가 되고 고려 2대 왕인 혜종을 낳았다. 그 목포가 바로 지금의 삼영동이다. 이후 삼영동은 목포, 남포(南浦), 영산(靈山 또는 榮山)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특히 14세기에 이르면 삼영동에 관한 기록이 봇물처럼 쏟아진다.

흑산도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탓인지 이곳 사람들은 뱃일, 나아가 해전에 능했다. 그들은 일찍이 흑산도에 살 때부터 왜구들을 격퇴한 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 그들이 비록 조정의 명으로 고향을 떠나 삼영동으로 옮겨와 살았지만 여전히 왜구 토벌에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1361년 삼영동 주민들이 왜구를 격퇴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기록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후 삼영동 주민들은 진포해전ㆍ합포해전에도 참전했고 전략 요충지인 예성강 입구의 교동도에서 방위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뱃사람들의 기질을 한껏 발휘해 요즘의 해군이나 해병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우리 역사상 작은 동네 사람들이 이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예는 없었을 것이다.

한편 그 무렵 삼영동은 굴지의 포구로 성장했던 것 같다. 1374년 제주도에서 목호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을 진압하기위해 최영 장군의 함대가 출항한 곳은 나주 영산, 즉 지금의 삼영동이었다. 삼영동은 중국 명나라가 남경에 수도를 두고 있을 때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의 출항지 겸 도착지이기도 했다.

조선 초엽에는 이런 삼영동에 세곡 창고인 영산창을 건립하기도 했다. 영산창이 있던 곳은 현재 부영아파트 옆 언덕이다. 2008년 나주시가 펴낸 <나주시지>를 보면 1930년대 아파트 자리에 화력발전소를 지은 일이 있었는데 당시 그 자리에서 다량의 배편과 볍씨가 발견됐다고 한다.

영산창이 한창 그 이름을 날리던 시절, 삼영동에는 소금 비축 창고도 있었다. 이 창고는 영산고(옛 영산포상고의 후신) 뒷산에 자리 잡았다. 현재도 영산고 일대를 일컬어 염창동이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처럼 삼영동은 바다로부터 5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었지만 바다와 통하던 시절엔 포구이자 물류 기지로 성가가 높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성쇠는 있는 법. 조선 중종 때 영산창은 폐쇄되고 말았다. 나주 삼영동에서 세곡을 실어 나르는 것보다 영광 법성포에서 선적하는 편이 항해 거리를 단축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렇지만 나주 일원의 세곡을 삼영동에서 선적하는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됐던 것 같다. 다만 거듭된 퇴적으로 배의 접안이 어려워지면서 삼영동은 점차 쇠락해 갔던 것 같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이웃한 안창동이 새로운 물류 기지로 부상했다.

안창동은 조선 초엽 중국 사신으로 온 황엄이 제주도에 있던 불상을 강탈해가기 위해 출항하려던 곳이란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래된 포구였다. 그러나 안창동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7세기 제민창의 설치 때부터였다. 제민창은 제주도민의 기근에 대비해 곡식을 비축하던 곳이었다. 창고는 안창동 제창마을 안쪽의 미천서원 자리에 있었다.

전라도 삶에서 출렁이는 바다의 꿈

이후 안창동은 새롭게 떠오르는 포구로 각광을 받았다. 19세기 이곳을 지나간 한 여행자는 안창동을 가리켜 “돛대와 닻줄이 마치 삼밭을 보는 듯하다”고 했다. 1880년대 이곳을 방문했던 일본인도 “팔도의 장삿배들이 여기에 다 모여든다.”고 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이나 일본 포교승 오쿠무라 이오코가 목포에서 배로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왔다가 안창동에 상륙했던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런 안창동마저 20세기 초엽 지금의 영산동과 이창동이 일본인들에 개발되어 영산포란 이름을 갖게 되면서 역사 속으로 저물어갔다.

그럼에도 나주에는 여전히 바다의 기억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그 기억에는 아쉬움도 함께 배어있다. 바닷물이 들어왔던 옛 영산강에 대한 그리움, 많은 이들이 전라도의 삶에서 출렁이는 바다의 이야기에 충분히 귀 기울이지 않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대동문화 92호. 2016. 1,2월호]

조광철(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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