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죽었지만 풀빛은 영원하고
기억은 희미해도 봄은 언제나 새롭지

무덤가 양지쪽에 초록이 돋고 있다. 곧 진달래가 피겠다. 뻐꾸기도 울겠다.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봄은 언제나 새봄이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입구. '국토서시'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3월은 꽃과 초록을 들고 평화스럽게 오지만 분명 한번쯤의 거친 변화가 들어있다. 다시 한 번 세상을 꽁꽁 얼리는 꽃샘추위가 숨어있기 때문이다. 역경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일찍 싹을 틔운 식물이 동해를 입어 죽을 때 결코 죽지 않는 것이 풀이다. 가을풀은 죽었지만 봄풀은 절대 죽지 않는다.

봄비가 제법 거칠게 내리는 날 '비 내리는 호남선'을 따라 남으로 달렸다. 창평을 지나 곡성, 섬진강 줄기를 따라 봄을 마주하며 나아갔다.

광주에서 약 80km, 한 시간 반 정도의 거리에 태안사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됐다는 천년고찰이다. 이 절의 대처승을 아버지로 조태일 시인이 태어났다. 구비구비 깊은 산골이다. 미루어 짐작하면 1940년대는 더 깊은 산골이 아니었을까. 꽃이 피면 봄이고 눈 내리면 겨울인 지리산자락의 태안사. 조태일 시인이 온전히 유년을 보낸 곳을 찾았다. 숨 같은 바람이 비에 섞여 내렸다.

겨울의 마지막과 봄의 초입, 봄비에 젖은 대지가 핏줄을 드러내고 흘렀다. 겨우내 묵었던 한숨들이 나왔다. 생명의 숨과 같이. 창밖의 풍경이 혼자보기 아깝다. 잠든 동행을 깨우려다 그만둔다. 나는 봄 풍경에 취했지만 잠든 생명은 봄꿈에 취했으니 서로 잘 됐다.

태안사 입구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이 있다. 2003년 곡성군이 조태일의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이 안마당에 있는 직사각형의 우물이다. 수천의 빗방울이 떨어지며 동그라미를 만든다.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처럼 우물가에 서자 형체만이 슬픈 듯 흔들렸다. 시심은 봄처럼 피어나지만 시인의 삶은 대체적으로 슬프다.

해방세대의 대표작가로 ‘작가회의’ 창립
대한민국의 문학 지평을 확장

조태일 시인(1941-1999)

조태일 시인은 1962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다시 포도에서'가 당선된 후 1964년 경향신문에 '아침 선박'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 월간지 '시인'지를 창간했으며 '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회'를 창립하여 초대 부이사장을 역임했다. 광주대학교 초대 예술대학장을 지냈다. 생전에 편운문학상과 성운문학상을 수상했고 1999년 지병인 간암으로 작고한 후 보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1965년 제1시집 '아침 선박', 1970년 제2시집 '식칼론', 1975년 '국토', 1983년 제4시집 '가거도', 1991년 제6시집 '자유가 시인더라', 1995년 제7시집 '풀꽃은 꺾이지 않는다', 1999년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를 간행했다. 1991년 시선집 '다시 산하에게', 2004년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가 있고 1994년 이론서 '시 창작을 위한 시론', 1999년 '알기쉬운 시 창작 강의'를 출간했다. 2009년에는 전4권의 '조태일 전집'이 문학과비평사에서 간행했다.

해방세대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개화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한민국의 시인으로 이름을 남긴 조태일 시인. 한 시인의 일생을 산자가 고스란히 본다는 것은 묘한 기분을 안겨준다. 대처승의 넷째 아들로, 7남매를 둔 청상과부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어땠을까. 일본이 패망하고 격변기를 살아오며 지리산이라는 지역을 탯자리 고향으로 살았다. 엄청난 격변기를 겪어가면서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작가로써 작품 활동했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쓴 치열한 삶이었으리라. 더구나 그의 마음에 깃든 지리산과 섬진강의 서정은 물질문명에 반하는 순수함이었으리니.

희귀시집 등 3천여 권의 시집전시관, 2천여 점의 애장품 등

개화기에서부터 한국문학의 역사를 볼 수 있어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시집 '백팔번뇌',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 등 희귀본 전시

조태일 문학관은 아담했다. 그의 문학관에서 느낀 소감은 시인이기 전에 동시대의 형님과 같은 느낌이다. 지금 생존해 있다면 75세, 아직도 청청하게 작품을 쓸 수 있는 나이가 아닌가. 광주서중과 광주고, 경희대를 졸업했으며 ROTC장교로 복무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시인의 책상, 시인의 필기구, 시인의 신발과 지팡이, 애연가답게 몇 개의 담배파이프, 그리고 사진과 시화들이 걸려있었다.

개화기의 한국 시인들. 1930년대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문단을 연표를 통하여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역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의 사진과 텅 빈 한 장의 액자에는 주인이 없었다. 언젠가 누군가가 저 자리의 주인공이 되리라. 조태일 시인도 목숨을 다하고 떠나며 대한민국 문학의 풀뿌리가 되었구나.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에는 조태일 시인의 유품과 시인을 기리는 문학작품 등 2,000여점과 시집전시관에는 해방 이후 발견된 최남선 시인의 '백팔번뇌'. '오뇌의 무도' 등 희귀본과 근대시집 3천여 권이 전시되어 있다. 제목만 보아도 우리 문학의 초창기를 엿볼 수 있었다.

부지면적 약 1천 800평의 면적에 조태일 시문학기념관은 지상 1층과 지하 1층, 시집전시관 역시 지상 1층과 지하 1층으로 지어졌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연중 개방되며 하절기는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동절기는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운영한다. 창작실은 4~5인실이 있으며 사용료는 10,000원 으로 냉난방 시설과 숙박이 가능하다. 세미나실도 1실 준비되어 있다.

타협하지 않는 굵고 짧은 삶
한국사의 대표적인 저항시인

국내 최대의 대바라 등 보물 5점과 전라남도 문화재 3점이 있는 천년고찰 태안사

조태일 문학관 인근에 태안사가 있어 산책하기 좋았다. 봉황이 먹고 산다는 오동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동리산(271m).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였으며, 한국전쟁과 여순사건의 접전지로 애환이 서린 절이다.

봄비에 젖은 개울이 철철철 물소리를 내며 흐른다. 여기저기 피비린내가 났다. 봄은 살을 가르고 피를 터트리며 온다. 봄은 절대 혼자오지 않는다. 봄은 온순히 온다. 봄은 험상궂게 온다. 봄은 먼저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우는 사람이 임자다. 작년의 그 봄이 오지만 봄은 헌 봄이 아니라 늘 새로운 봄이다.

조태일 시인은 70년대, 80년대 험악한 세상에 타협하지 않고 자유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한국사의 대표적 저항시인이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굵고 짧은 삶, 서정을 품고 격렬한 민주화 운동을 펼치는 이중고 속에서 시인은 오직 현실을 부여잡고 살았다.

한 사람의 일생은 역사가 기록하는 법이다. 박석무 이사장, 고은 시인 등이 주축이 된 (사)조태일시인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문학축전 등이 열리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조용한 산사, 아직은 미미하지만 봄비가 그치면 벙글어질 봄빛이 봄바람에 간질거렸다. 조태일 시인이 평생토록 염원했던 "국토의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남북통일에 대한 염원이 새록새록 일어났다.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휴전선 너머에도 이 봄빛이 타오를 터다.

조태일 시문학기념관

전라남도 곡성군 죽곡면 태안로 622-38 T. 061-362-5868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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