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이 되던 해였다. 여러 학생들이 판소리 선생님 앞에 둘러앉아 선창을 따라부르는 소리에 이끌려 들어갔다가 나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선생님께서는 “아야! 너 어째 우냐?” 하고 물으셨다. 내 대답은 “슬퍼서요.”도, “감동받아서요.”도 아닌 “나도 잘 할 수 있는디….”였다. 방금 눈앞에서 처음 들어본 판소리였지만, 샘이 났었다.

선생님께서는 “음마! 야보소? 아야, 그라믄 너 어디 한번 따라 해볼래?” 하시며 판소리 <춘향가> 중 ‘갈까부다’ 대목의 앞 소절을 부르셨고 나는 선생님을 바로 따라 불렀다. “오매! 이 집 딸 소리 시켜야 쓰겄소. 잘 하겄소 야.” 선생님의 칭찬을 받고 어린 마음에도 이건 운명이라 생각했다. 거짓말처럼 그때부터 판소리가 너무 좋아졌으니까.

그림을 그려도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한손엔 꽃다발, 한손엔 ‘인간문화재’라 쓰여 있는 종이를 들고 내 모습을 그렸고, 화장실에서도 버스에서도 길을 걸을 때도 늘 흥얼흥얼, 초등학교에서 배운 시조에도 판소리 가락을 붙여 부르며 판소리와의 사랑에 푹 빠졌다.

“너는 몸이 악기인께 잘 먹고 몸을 잘 챙겨야 헌다.”

‘애리 목이 넘어갔다.’라는 말이 들려왔다. 나를 세우고 있는 커다란 기둥이 흔들림을 느꼈다. ‘옛 명창들 중에도 목이 넘어가서 소리를 포기한 분들이 계시다던데, 내 목소리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걸까? 악기로 전공을 바꿔볼까?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있으니 교직으로 진로를 정해볼까?’ 갈등이 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소리꾼이 아닌 내 모습은 맘에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의 상태에서라도 소리를 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어떻게든 지금보다는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했다.

“너는 몸이 악기인께 잘 먹고 몸을 잘 챙겨야 헌다.” 하셨던 어머니 말씀을 떠올리며 자극적이고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은 일체 가까이 하지 않고, 목에 좋다 하면 느끼한 올리브 기름도 한 컵 가득 쭉 들이켰다. 공기가 좋지 않은 곳이면 자리를 피하고, 틈나는 대로 수목원을 찾아다니며 기관지가 건강해지길 바랬다. 높은 음이 나오질 않으니 낮은 음을 더 잘 표현할 수 있게 연습하고, 고운 목소리가 나오질 않으니 시김새를 더 구성지게 구사할 수 있는 연습을 했다. “꼭 목 좋은 소리꾼만 있으랴, 구성진 성음으로 사람들 마음을 사로잡으리라.”다짐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내게 놀라운 일이 생겼다

그렇게 참고 독공하던 시절이 지나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창극 <배비장전>의 여주인공 ‘애랑’역에 캐스팅된 것이다. 입단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24살의 나이에 주연을 맡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라 했다. 신예 발굴 차원의 캐스팅이 내게 주어지다니….

꿈같은 일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고 했던가. 첫 주연을 맡은 작품이 끝나기가 무섭게 국립극장의 네 단체가 모두 참여하는 특별 기획 공연 <우루왕>이라는 작품을 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나는 평소 연습 중에 내가 맡은 역할뿐 아니라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의 거의 모든 대사와 노래들을 다 외우고 있었기에, 개인 사정으로 하루 연습을 빠진 여주인공의 역할을 내가 대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날을 계기로 한달 뒤 나는 여주인공인 ‘바리공주’역에 캐스팅되었고, 5년에 걸쳐 콜롬비아, 이스라엘, 네덜란드, 터키 등 세계 곳곳에 순회 공연을 다니게 되었다. 정말 바리공주처럼 공주 대접을 받으며 외국 공연을 다니게 되었다. 크고 작은 공연을 준비하며 지내다보면 한 달이 금새 지나가고 일 년도 금방 지났다.

사람들의 마음 달래는 창작 판소리 세계 개척

지금의 관심사를 다룬 창작 판소리, 판소리 동화, 애니 판소리, 개그 판소리, 국악가요 등 대중에 조금이라도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는 작업들을 기회가 될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도했다. 이렇게 시대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노래하는 것,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위로해주는 것이야말로 소리꾼의 소명이라 생각되었다. 광주 시민들과는 오는 10월 ‘광주 세계 아리랑 축전’의 주제 공연으로 제작되는 ‘빛고을 아리랑’이라는 총체극 형식의 무대 공연 작품에서 여주인공인 ‘아리랑 여인’ 역으로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처음 판소리를 만나던 날부터 소리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 생각했고, 그때부터 늘 꿈을 꾸었다. 아직도 난 꿈을 꾼다. 내 소리로 사람들이 행복해하는 꿈, 그로 인해 나도 행복해지는 꿈. 소리는 혼자서 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봐주는, 그리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훨씬 신이 나고 재미가 있다.

앞으로도 어떤 방식과 어떤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질 수 있을까 하는 끝없는 고민으로 연습을 하고 무대에 설 나의 인생. 그런 나의 인생은 봄 같았으면 한다. 열정적인 여름도 풍성한 결실의 가을도 좋겠지만, 난 그저 봄이고 싶다. 설렘 가득하고, 늘 시작하는 마음으로 거듭 돌아볼 수 있는 봄, 춥고 시린 겨울을 지내고 다시 돌아오는 봄같은 소리꾼이 되고 싶다.

대동문화 72호 [2012 9.10월호]

박애리 국악인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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