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저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대를 드대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어긔야 내 가는 대 졈그를셰라./ 어긔야 어강됴리/아으 다롱디리

-「정읍사」- (작자·연대 미상의 백제 가요)

초가을 정읍사공원에서 지고지순(至高至純)을 생각한다. 세상 남성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더할 수 없이 높고 순수한 사랑’은 어떤 빛깔의 사랑일까? 보수적인 부류에 속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늘 ‘여자는 기다리고 남성은 떠나 있어야 한다.’는 설정은 이제 고루하고 식상하다. ‘그러는 너는 어떤데?’하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배부른 사랑 타령’을 조소하면서 건조하고 딱딱하게 20대를 보냈다. ‘치열하고 지독한 사랑’으로 푸르른 날을 보낸 이들을 시기질투하며 30대를 보냈다. 그런데 불혹에 이르러 여름을 지나보내면서 문득 내 안의 시기질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아직 이른데 벌써 가을 오는 것일까?

어느 것이 몽환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가? 내장사 정혜루 앞 연못에 비친 풍경.

정읍사의 가을, 새로운 빛깔의 사랑을 꿈꾸다

‘건축학 개론’이라는 영화 포스터에서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라는 구절을 보았다. 역으로 내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시절이 누군가에게 ‘악몽’이었을 수도 있다. 더 비참한 설정이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는 메아리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

30년을 살고도 하루 만에 호적에서 사라지는 사람이 있고 하루를 만나도 평생 주홍글씨로 남는 사랑이 있다. 그것은 이마에 남기도 하고 심장에 새겨지기도 한다.

요즈음 약관은 입시와 취업 준비로 붉지 못하고 푸르다. 그래서인지 때 놓친 ‘치열하고 지독한 사랑'을 이립 넘어 불혹까지 꿈꾸는 사람들이 늘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뽑으면 새 치아가 돋는 사춘기와 달라서 애랑 만난 배비장쯤으로 치부되고 결국 영구치까지 잃어버리기도 한다.

7년 전 서른다섯 살의 나는 사랑을 ‘목숨을 건 귀소본능처럼 평생을 고조되어가고 상승해 가는, 끈질기고 질긴 근원적 본능’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런 사랑 방식에는 ‘분노와 상처’가 같이 간다는 것을 알았다.

내장사 대웅전 지붕 위로 펼쳐지는 기암괴석은 마치 극락정토에 이르는 길인 것 같다.

중종의 트라우마와 내장사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

1539년(중종 34년). 가을단풍이 막 물들어가던 내장산에 큰 불이 났다. 그 불로 백제 무왕 37년(636)때 지어진 천년 고찰 백양사와 영은사는 흔적도 없이 타버렸다.

<중종실록>에는 ‘중종 34년 내장산에서 승도탁란사건(僧徒濁亂事件)이 일어나자 내장사와 영은사가 도둑의 소굴이라 하여 절을 소각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탁란(濁亂)은 ‘세상을 흐리고 어지럽히다.’는 의미로 ‘스님들의 집단적으로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해 2월 중종이 ‘호남 지역 3,000여 명의 스님들을 환속시켜 군적에 올리도록 했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스님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자 중종은 이들과 근거지가 된 내장사를 ‘도적의 무리이며 도적의 소굴’이라 하여 아예 불을 질러 버렸다. 내장산은 실제로 말발굽 모양의 지형이라 능히 1천의 군사로 10만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임진왜란 당시 희묵대사가 산성을 쌓았다고 전해진다.

중종은 역사상 가장 혹독하고 광적인 배불왕이었다. 즉위하자마자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승과를 완전히 폐지하고 선교 양종까지 없애버렸다. 각도의 사찰을 폐사로 만든 뒤 토지를 향교에 속하게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경국대전>에서 승려의 출가 규정을 담은 도승조(度僧條)를 지워버리게 함으로써 승려가 될 수 있는 모든 법적 근거까지 없애 버렸다.

중종은 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터라 늘 왕권이 불안했다. 자신의 위협 세력인 훈구 세력들을 통제하고 대항마로서 사림을 정치경제적으로 성장시켜야 했다. 거기다 막강한 경제력과 유사시에 군사적 위협으로 등장할 수 있는 불교를 다스려야 하는 현실적인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렇듯 조선이 억불 정책을 펴 사찰의 재산을 몰수하고 승려들의 출가를 금지한 것은 유학 진흥을 위한 사상 운동적 측면보다도 국가의 열악한 재정과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요구와 정치적 이해 관계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종의 기대와 달리 오히려 절과 승려는 계속 늘어났다. 이는 새로운 지배 권력으로 등장한 봉건 지배 계급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나 반대 세력들, 부역 기피자 등이 사찰로 들어온 탓이었다. 요즘 이러저런 자중지란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 불교가 명심해야할 대목이다.

기다리는 마음. 떠나간 남편을 그리다 돌이 된 백제 여인의 망부석.

붉기 전 단풍 풍경이 제대로다

제대로 된 풍경을 보고 싶다면 축제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에 가야 한다. 아니면 축제가 끝나고 일주일 뒤에 가야한다. 축제가 시작되면 풍경은 인파에 묻혀 버린다. 여행의 선물인 사색은 하루 종일 ‘웽웽’ 거리는 확성기와 자연색을 조작하는 조명에 묻혀버린다. 국정 불명의 다국적 냄새들은 또 어떤가? 청명한 자연 속에서 두통을 경험하다니…, 끔찍한 일이다.

내장산 단풍은 10월 중순에 시작해 11월초에나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보는 늘 단풍의 60%~80%에 맞추어져 있다. 오색이 교차하는 풍광을 바란다면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가고 온통 불타고 있는 산하를 기대하고 있다면 일주일만 더 기다렸다 가면 틀림없다. 늘 애매한 풍광은 축제 때 있다.

나는 가끔 내장산 애기단풍이 유난히 붉은 것은 산이 미리 불을 보여 인간의 이기심을 경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장산이 품은 내장사는 승도탁란사건과 정유재란, 한국전쟁 등 세 번에 걸쳐 불태워진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굳이 대한 8경과 애기단풍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름처럼 내장산은 산 안에 품은 것이 끝없다. 선봉을 주봉으로 하여 까치봉, 연지봉, 망해봉, 불출봉, 서래봉, 월영봉, 연지봉 등 9개의 봉우리가 말발굽처럼 드리워진 특이한 자연경관과 두 발굽으로 흐르는 금산, 원숙 두 계곡이 장관이다. 그곳에 자리잡은 벽련암, 원적암, 도덕암은 특히 천하 절경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신발을 신고 들어오세요.’ 내장사에는 국내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법당이 있다. 세상의 모든 고통소리와 기도소리를 들어주고 사람의 다친 마음을 치유해 준다는 아바로키테슈바라 즉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턱이 낮아지자 마음은 편안해졌다. 대웅전은 건너뛰었지만 관음전은 들렀다.

‘신발을 신고 들어오세요.’ 내장사의 관음전은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법당이다.

붉기 전 단풍 풍경이 제대로다

내장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몇 곳이 있다. 그 첫 번째는 가을 정혜루와 그 앞 호수에 비친 4계절 풍광이다. 또한 명부전에서 깨금발을 딛고 대웅전 지붕 너머로 내다보이는 기암괴석도 볼만하다. 조금 걸어 내려가면 부도전 담벼락에서 자라는 백일홍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길가에 내장산을 축소해 놓은 듯 산 모양으로 솟은 기암도 좋다. 산을 송두리째 담고 하늘까지 담은 우화정 주변 풍광도 뺄 수가 없다. 케이블카 빼놓고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다.

내장사에 난데없이 한줄기 철 이른 단풍이 들었다. ‘버드나무에 이는 바람처럼 잔잔하고 은은한 사랑, 여름 보리 잎에 이는 풀피리처럼 경쾌하고 산뜻한 사랑, 가을 단풍처럼 얼굴 붉히는 쑥스러운 사랑, 매서운 북풍에도 식지 않는 아랫목 같은 포근하고 따듯한 사랑, 그리고 폭풍처럼 태풍처럼 지독하고 치열한 사랑.’

가을날 나는 어떤 빛깔의 사랑을 해야 하는가 묻기 시작했다. 사랑도 가을도 접촉사고처럼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접촉사고로 터져 나온 것일 뿐, 이미 사랑도 가을도 우리 안에 자라고 있었다. 세상의 우연 뒤에는 늘 그러할 수밖에 없는 필연이 숨어있다. 이제 영원히 지지 않을 듯 ‘지독하고 치열했던’ 여름날은 가고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이 같이 편안한’ 가을이 온다.

대동문화72호 [2012 9.10월호]

김대호 소설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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