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서 김인후, 퇴계 이황은 우리 역사에서 이름만 들어도 다 안다. 그러나 당대를 함께 했던 미암 유희춘(1513, 중종 8년~1577, 선조 10년)의 이름은 생소하다. 담양의 모현관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미암일기’하면 그때서야 아하, 표정이 사뭇 밝아진다. 그렇다. 미암일기(보물 제260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5호)를 보관했던 바로 그 건물이 모현관이다.

보물 260호 미암일기를 간직한 모현관 전경

십시일반 청석(靑石)으로 지어진 모현관

모현관은 1957년 광주에서 운반된 청석(靑石)으로 지어졌다. 건물 전체가 청자인 듯 옅은 푸른색을 띄고 있다. 이렇게 청석으로 지어진 건물로는 전남대학교 구 박물관과 기독병원 굴뚝이 있다. 모현관의 글씨는 의재 허백련 선생의 썼다. 흰바탕에 백련서라는 글씨가 함께 남아있다. 건물 자체가 풍기는 느낌은 매우 서구적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 모현관을 짓기 위해서 당시의 교육부장관, 서울대와 연고대 등의 교육계, 각 도경의 임원 등의 헌사금이 사용됐다는 십시일반 모금 자료가 나오기도 했다.

모현관,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현자가 매우 특이하다. 어질 현(贒)은 어질 현인데, 신하 신과 충성할 충자가 조개 패 위에 써져있다. 이는 미암 유희춘 선생의 어질고 현명함을 존경하는 의미가 있다고 풀이된다.

모현관은 인공연못을 파고 그 가운데 세워졌다. 연못 가운데의 정자는 많이 보았지만 문서 소장고는 특이하다. 미암 박물관의 노기춘 박사는 “당시에 가장 무서웠던 것은 불이었기에, 인공호수를 파고 그 가운데 미암일기를 보관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인공호수의 물이 많아서 가뭄을 해갈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지금보다 훨씬 컸던 모양이다.

인공호수에 비친 모현관의 자태가 참으로 빼어나다. 노기춘 박사는 한마디 더 보탠다. “참으로 사계절 아름다운 정원입니다. 물안개 낀 봄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요, 호수가 어는 겨울에 눈 덮인 모현관은 절경입니다. 특히 상사화가 만발한 초가을에서 꽃 같은 낙엽이 지는 가을은 한번 보고나면 눈에 선하지요. 저 언덕에 있는 연계정에 올라 모현관을 꼭 바라보고 가십시오.” 그의 말대로 연계정에 올랐다.

연계는 미암의 별호로 500년의 세월 이 언덕에서 시인문객을 받았다. 인터넷 검색창에서도 ‘담양 10경’ 중에 연계정을 강추하고 있다. 이는 모현관을 중심으로 미암박물관, 선산 유씨 종가의 미암사당(전라남도 민속자료 제36호) 등 누정문화 속에서 우리의 문화원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우 특이한 사실로 미암사당에는 백학도, 등룡도, 봉황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희귀한 경우다. 유교적 사당에 벽화를 그리지 않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미암일기(전시 부분)

기록의 대가, 미암일기가 없었다면 선조실록이 없다.

잠시 조선 전기로 가보자. 미암은 1513년(중종 8년)에 태어나 1577년(선조 10년)까지 64세를 살았다. 미암은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어 훗날 인종을 모시게 된다. 하지만 인종의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조정에는 파란이 일어났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과정에서 을사사화가 발생하고 이후 ‘양제역 벽서사건(정미사화)’이 또 한 번 사림을 탄압하게 된다.

이 때 주모자가 된 미암도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됐지만, 고향인 해남과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지가 바뀐다. 그렇게 19년을 그곳에서 보낸다. 미암의 부인(송덕봉)은 2천리 길을 걸어, 그 험하다는 마천령을 넘어 미암을 찾아간다. 그때 남긴 시가 지금도 전한다.

꿈에 그리던 미암을 찾았지만 이미 미암은 몸종과 더불어 네 명의 자식을 두고 있었다는 것. 더구나 기막힌 일은 그런 세세한 일조차 서로 편지로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지금의 문화로 이해하기 힘들다.

마천령 위에서

걷고 또 걸어 마침내 마천령에 이르니

동해가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구나

부인의 몸으로 만 리 길을 어이 왔는고

삼종의 의리 무겁고 이 한 몸 가벼워서지

(송덕봉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된 미암을 만나러 가다가 마천령에서 지은 시)

미암의 부인 송덕봉(조선의 4대 여류시인)의 시 ‘마천령 위에서’

미암일기가 없었다면 선조실록이 없었다고 할 만큼 미암일기는 소중한 자료가 됐다. 임진왜란 때 불탄 선조실록을 복원하는데 절반이상을 미암일기에서 인용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 가정사까지 미암일기는 고위관리가 기록한 신뢰할 수 있는 조선의 실상이었다. 모현관에 보관된 문서 중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고문서가 8건이나 된다. 김해 김씨, 울산 김씨의 분급기는 조선의 재산 상속 관계를 증명하는 문서이기도 하다. 당쟁과 전쟁의 틈에서 미암은 당파에 흔들림 없이 관리로서 학자로서 맡은바 임무에 충실했다. 그래서 기록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은 모현관에 대하여 “모현관은 교육계와 국민 성금으로 지어졌고, 미암 유희춘 선생의 일기와 고문서를 보관한 유물관이다. 청석으로 지어진 석조건물이며, 미암 사당과 연계정 등 전통유산과 현대를 연결하는 구실을 했다. 이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된다.”고 언급했다.

미암과 하서의 우정, 명의 허준과의 관계

담양 10경의 연계정. 가을풍경이 곱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의 명의 허준은 미암의 주치의였다. 미암과 하서는 어린시절부터 신재 최산두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다. 하루는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한 하서가 전염병으로 몸져누웠다. 미암은 한걸음에 달려와 하서를 가마에 싣고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 허준의 탕약으로 쾌차를 하게 된 하서는 미암과 평생의 벗이 됐다.

이후 하서는 자신의 딸과 미암의 아들을 결혼시켜 사돈이 된다. 미암이 종성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도 자주 안부편지를 주고받으며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갔다. 결국 하서는 미암의 해배를 보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런저런 사념에 빠져 모현관 주변을 맴돌다. 벌써 몇 바퀴를 돌았는지, 그러나 수십 바퀴를 맴돌아도 모현관을 참 아름답다, 고맙다, 훌륭하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모현관이 없었다면 아름다운 사연들도 없었으리라. 당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그 때의 현실이 죽고 싶도록 어둡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구나. 이토록 훌륭한 사료,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남겨준 모현관 앞에서 오랫동안 기도하듯 서있었다.

집에 돌아 온 후로도 모현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상의 번잡함을 막아주던 득인산, 한적한 시골길에 피어 흔들리던 뭇 가을꽃들. 한번 보았던 마을, 그 풍경이 사진에 박힌 듯 선명하기만 하다.

미암박물관, 조선시대로 가는 타임머신.

<대동문화 103호. 2017. 11~12월호>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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