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내 가물다가 비가 내린다. 땅 위의 온갖 풀들과 식물들과 나무들이 환호하며 키를 쑥쑥 키운다. 조용한 아침나절 햇볕이 비출 때 분명히 그 키 크는 소리가 들린다. 신록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분명히 들린다.

‘빛과 소리와, 빛깔과 행태가 수놓아져 시라는 비단을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그 속성에서 진실하다.-문병란-’ 아름다운 본질과 진실한 속성을 인생에서도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가 시인이다.

살 재미가 넉넉한 웃음으로 풀면서 웃음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 풍요로운 웃음을 외쳐 부르는 민중적 생명력의 열망을 노래했다.

시로 삶을 위안 받아서 고맙다

노정(蘆汀) 손광은(孫光殷, 1936~ ) 시인이 그런 시인됨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내 시가 걸어온 길은 내 삶의 길이었다. 고정된 지평이 아닌 자유의 지평이었다. 그 때문에 삶에 있어서도 도덕과 자유와 예술은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극히 순간적인 감정이면서 내 전체의 삶을 담아 보이면서도 내 영혼의 영원한 무엇을 찾는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내 삶의 흐름 속에서 시대적 삶의 정수를 찾기도 하고, 인간 영혼의 보편적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삶 자체가 시를 통해서 위안 받고 즐겁기만 하다. 그래서 나는 낙천적이다.”

낙천적이라서 풍류가 넘치고 열정적이며 인정이 넘치고 의리가 있다. 풍류와 신명으로 씩씩하다. 보성 소리의 고장에서 태어난 것도 이유가 됐다. 보성 노동면 금호리에서 1936년 아버지 손성행, 어머니 김조내 사이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보성중학교 시절 이강재 국어 선생님(후에 금호문화재단 고문)의 정서적 일깨움으로 시인이 되려는 마음을 먹었다. 숭일고등학교 시절에는 폭식에 가까울 정도의 독서와 함께 습작에 몰두했다.

1956년 전남대 문리과대학 국문학과에 입학하면서 체계적으로 세계 명작을 읽었다. 고재기(국문학과 교수) 교수의 권유로 대학신문 기자로도 활동했고 이성부 문순태와 ‘육모정’ 동인 활동, 정현웅·박봉우·장백일·주명영 등과 ‘용봉문학회’ 활동에 참여했다.

조선대학교에 재직하고 있던 다형 김현승 시인에게 습작을 보여드렸다. 문병란 시인도 김현승 시인에게 시 쓰기를 배우던 참이었다. 그런데 습작을 보여드리면 말없이 커피만 손수 끓여 주시며 아무 말이 없었다. <현대 문학> 추천에 몇 번이나 좌절을 겪으면서 도전한 끝에 1962년 「제3광장」, 1963년 「산책」, 1964년 「나의 반란」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1966년 <영도> 3집 복간호에 이성부·김현·임보·최하림과 함께 동인으로 영입되었다. 창간 동인들은 박봉우·박성룡·윤삼하·정현웅·주명령·장백일·강태열 시인들이었다. 새로운 현실 인식과 새로운 시의 형식을 모색했다.

벌판의 외침 소리 나를 죽이고 들려왔다

1667년 <원탁> 동인이 창립된 후 지금까지 창간 동인 박홍원·문병란·범대순·진헌성·김현곤·권일송·문도채·황길현과 창간 이후의 동인인 허형만·강인한·김종·이향아·전원범·정재완·조병기·주기운·최봉희·오명규·서춘기·김영박·염창권·강경호·고성만 시인들이 다채로운 시세계를 개척했고 <원탁>은 광주 전남의 시문학사의 원심 역할을 했다.

어느날 밤 파도는/내 방에 들어와 나를 깨웠다./다른 사람들은 일제히/다른 이름들을 하나씩 더 갖고/눈뜨기 시작했다.//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는/거대한 것이/엄청난 사람 같은 것이/내 목을 누르고/내게 말했다.//그냥 이대로 있기냐/그냥 있기냐/다시 태어난 다음에야 볼 수 있는/벌판의 외침 소리 하나/나를 죽이고/끝끝내 들려왔다.-「파도의 말」-

초기시들이 묶여져 나온 <파도의 말>(현대문학사, 1972)의 서문에서 김현승 시인은 손광은 시인의 시의 특징을 ‘생명의 자기 정립에 대한 강렬한 추구’라고 했다. 전라도적인 향토미가 있으면서도 진부하지 않는 실험성이 깃든 시이자, 민족의 생명력이 꿈틀대는 정열이 지적으로 통제되고 있는 시였다.

풀잎이 출렁거리듯/새로운 혁명이 부르는 흔들림,/새로운 파멸의 부정처럼/물살지는 가슴을/실한 머슴은 들여다보면서//「여, 여, 저, 저,」/들고 치고, 살짝 놓고 치고/소리를 만들면서/먼지가 소리를 만들면서/마을을 울리던/도리깨질을 하면서//「여 안 때리고 어데 때리노 복판 때려라 가에 때려라」//도리깨질을 하면서/머슴은 머슴인 아버지를 머슴으로 길들였다. -「보리타작」 중에서-

1967년에 전남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8년부터 2001년까지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지냈다. 1983년 충남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광주광역시 문인협회 초대회장(1987), 한국시문학회(1989), 한국 언어문학회(1996) 회장을 역임했다.

이 시기는 70년대 유신 치하, 80년대 민주화의 시대였다. 격동기의 방황과 고뇌 속에서 시집 발간은 더뎠고, 첫 시집 이후 24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이 나오게 된다. 신명이 나지 않는 시대였다. <고향 앞에서 서서>(문학세계사, 1996)는 시대사의 현실이 너무 극명해서 시의 빛깔이 바랠 때의 고뇌를 ‘고향 의식’에 담은 시이다. ‘귀거래사’였다.

나는 고향 앞에 서서/무엇으로 우뚝 서랴/아흔아홉 굽이 봇재 바람에 마음을 열어/무엇을 다짐하랴//가슴 헤집는/세월을 뒤적이고 비비 꼬면서/옷섶품으로 스며드는 산바람 되랴./강바람 되랴./들꽃이 되랴. 풀꽃이 되라./고향을 떠난 나그네 되랴.//봇재를 넘어/저만큼 가까이 마음을 보내/수천 년 부르고 이끄는 사람이 되랴./정든 땅에 돌아와 씨 뿌리듯/내 마음 여기 심어 놓고/나는 고향 앞에 무엇으로 우뚝 서랴. -「고향 앞에 서서」-

교단을 떠나며서 발표한 시들을 묶은 <그림자의 빛깔>(시와 사람사, 2001)에서는 훨씬 인간미가 깊어진 관조의 시선들이 읽혀진다.

귓속말로 흘러온 이야기. 아래로 아래로 이야기 나누다가/세월을 뒤적이고 매듭매듭 물이 되고 꽃이 되고/산이 되고 산맥을 이루는 꽃.//내가 다시 찾아와 당신 곁에 있으면/보고 듣는 말씀이 숨결 되어 번지네./맑은 숨결 번지네, 얕푸른 푸른 숨소리 저 하늘 자락에 번지네./강물 소리같이 산물 소리같이 맑은 미소 번지네./산 속으로 번지네, 물 속으로 번지네. -「연꽃 앞에 서서」-

김동근 평론가(전남대학교)가 ‘천성(天聲)의 시인’이라고 평가하면서 손광은 시인의 모든 시들에서 두드러지는 모티프가 바로 ‘소리’라고 했다. 판소리 가락 같은 율동감 속에 존재론적 고뇌와 열망을 서정적으로 녹여낸 ‘소리’와 ‘율동’과 ‘대화’의 시세계라는 것이다.

손광은 시인은 2013년 다형 김현승 탄생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민족 신명과 역동성, 인간미로 녹여낸 시세계

그것은 판소리의 리듬과 풍류이며, 동양화의 발묵과 같은 토속적 은근함이다. 서정적 향수과 신명의 열정이 녹아든 한 판의 역동적인 굿이자 판놀음이다. 거기서 민족적 생명력이 움터 돋아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 소리를 포착해낸 언어, 그것이 손광은 시인의 시이다.

<땅을 딛고 해가 뜬다-시, 화, 헌시, 금석문 기행>(도서출판 한림, 2007)에서는 전국 곳곳의 예술계 인사, 우국지사, 유적지, 관광지 기념탑 등에 새겨진 시들과, 문인화와 서양화와 어우러진 시화전 작품, 역사적 현장과 인물들에 바치는 헌시 등이 엮어진다.

<민속의 숨결 신명을 풀어라-민속시집>(도서출판 한림, 2010)에서는 신명나는 생명의 율동을 민속 음악과 굿과 놀이로 풀어헤친다. 낙천적인 즐거움과 흘러야하는 민중적 맥박의 흥겨움이 흐르는 시편들이다.

고를 대고 맞대고/다시 대고 맞대는 앙가슴 숨소리/가득가득 나가고 징 소리 북 소리/바람 치고 북 치고 하늘 치고 북 치고/얼룩진 마음까지 가득 씻어 나갔다./소구 장구 옆으로 돌고/벅구잡이 밖으로 돌아/살 재미가 넉넉한 웃음으로 풀면서/웃음의 뿌리가 보일 때까지/풍요로운 웃음을 외쳐 불렀다.

-「고싸움 놀이」-

시인은 전남의 문학계 어른이다. 1970년 서울예총회관에서 영랑·용아 시비 건립 시화전을 열어 광주공원에 이 두 시인의 시비가 건립된 기폭제를 마련했다. 스승인 김현승 시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기념사업회를 조직해 2013년 ‘다형 김현승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신과 인간 사이의 고뇌 속에서 인간 삶의 고결한 가치를 추구했던 휴머니즘의 금자탑을 쌓은 김현승 시인은 박홍원, 문병란, 이성부, 문순태, 조태일, 김준태, 양성우 등 기라서 같은 지상의 별들을 키우고 있고 그래서 광주 문학은 아직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 광주 문학의 좌표 위에 손광은 시인이 우직하게 버티고 있다.

대동문화 71호 [2012 7.8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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