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충장서점이 폐업한다는 충격적 뉴스는 많은 시민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런데 최근 불행 중 다행으로 점포 공간을 축소하여 다시 개점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시민 모두가 반가움과 함께 이렇게 되기까지의 서점가의 현실에 다시 한 번 한숨을 지었다. 앞서 광주의 대표 서점이었던 삼복서점, 나라서점 등이 줄줄이 폐업하면서 문화도시 예향 광주의 체면을 무색하게 했다. 폐업 원인이 독서 인구 감소와 인터넷 서점 등으로 급격한 매출 저하가 아니겠는가.

아시아문화 중심도시를 표방하는 광주가 광역도시 중 독서 인구가 가장 적다고 하니 문화계의 광주시민으로서 부끄럽게 여겨진다. 책은 인문학의 가장 기초이고, 문화와 예향의 뿌리인 셈인데 말이다. 필자는 이럴 즈음 옛 글에서 선현들의 독서에 대한 낙수(落穗)를 찾아 읽어보았다.

즐거움 중에 독서만한 것이 있겠는가

조선 세조 때 정승이었던 김수온은 대단한 책벌레이자 책광(冊狂)이었다. 하루는 신숙주가 임금에게 하사 받아 가보로 아끼던 <고문선(古文選)>이란 책을 김수온에게 빌려 주었다. 그런데 수개월이 넘도록 김수온이 책을 돌려주지 않자 신숙주가 그의 집을 찾아갔더니 김수온은 책의 낱장을 모조리 찢어 천정과 방벽에 도배질을 해두고 있었다. 경악을 한 신숙주가 “이게 무슨 짓이냐?”며 이유를 묻자, 그는 태연스레 “밥 먹으면서 읽고, 누워서도 읽어 외우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옛날 말에 이런 지독한 책벌레를‘서음(書淫)’이라 했다. 음주가무 곧 주색(酒色)에 빠진 것처럼 독서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식도락(食道樂), 주색락(酒色樂) 등 취향에 따른 기호(嗜好)도 다양하지만 독서락(讀書樂)이야말로 선비들의 지극한 낙이었다. 때문에 최고의 즐거움은 독서만한 것이 없다 하여 ‘막여독서(莫如讀書)’라 하지 않았던가.

독서가 없으면 향기로운 삶도 없다

그러나 책을 읽는 데도 원칙이 있다. 요새는 옛날과 달라 헤아릴 수 없는 책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어떤 책이 좋은지 헷갈릴 때가 많다. 베스트셀러, 만인의 필독서, 추천 또는 권장 도서라 해서 무작정 읽을 수는 없다.

요즘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 갈수록 많다. SNS 등 미디어의 영향도 한 원인이겠지만 매사 무언가에 쫒기는 삶이 마음의 여유를 빼앗고 한 페이지 한권의 책을 읽어낼 인내는 사라진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곧 인문학의 죽음, 인간 정서의 고갈이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귀착된 것이다.

인문 교양도서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자신의 상황에 적실(的實)한 해법 같은 안성맞춤인 좋은 책을 발견하여 읽을 때면 짜릿한 흥분은 물론 오감에 감전과 경련을 일게 할 만큼 오르가즘을 느끼게 한다. 바로 이것이 독서의 지락(至樂)이요, 독서의 매력인 것이다.

엘리어트는 <장 자크 루소>를 읽었을 때의 감격을 ‘감전(感電)’에 의한 경련으로 비유했고,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발견했을 때 오줌을 찔끔 했을 만큼, 신경의 경련을 느꼈다고 했다. 독서락에 빠진 사람은 눈동자에 정채(精彩)가 생겨 저절로 총명(聰明)해진다. 총명(聰明)이라는 한자말은‘귀 밝을 총(聰)’과 ‘눈 밝을 명(明)’자를 쓴다. 독서로 지혜가 생겨 귀 밝아지고 눈 밝아진 사람이 ‘총명한 사람’이다.

썩은 동태 눈이 되고 싶은가?

실제로 눈동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 주는 거울이다. 총기(聰氣)가 없는 눈을 흔히 ‘썩은 동태 눈’에 비유한다. 진나라에 대학자 황산곡(黃山谷)은 사흘만 책을 읽지 않아도 거울보기가 부끄러웠노라고 회고한다.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아도 눈동자가 생기 없이 시들해지고 용모는 초췌하여 추해 보이는 모습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옛글에 ‘삼일만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속에 가시가 생겨난다(三日不讀書 口中生荊棘)’라 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람 매력의 포인트는 눈동자에 있다. 눈동자의 정채는 성형 수술이나 화장으로 위장할 수 없고, 오직 독서와 수양을 통한 인문학적 교양이 그 사람의 몸에 배었을 때만이 비로소 가능하다. 인문적 교양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라 한다. 곧 가슴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을 품고, ‘권(書卷)의 기(氣)’라고 하는 사고의 깊이와 ‘문자의 향(香)’이라 일컫는 감성의 향기가 사람의 가슴속에 무르녹아 깃들어 있는 사람. 그 온축된 결정체가 눈동자에 그대로 투영되어 기품이 우러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그런 사람을 매력적인 사람이라 한다.

책 읽기 좋은 등화가친의 계절에 오히려 독서 인구가 줄어든다고 하니 서점이 없어진다는 소식만큼이나 씁쓸하다. 현대인들에게 독서의 즐거움보다도 단풍놀이 여행이 더 몸과 마음을 들뜨게 할 것이다. 그러나 궁합에 꼭 맞는 좋은 책, 찌르르 감전(感電)을 느낄 만한 책을 찾아 탐닉(耽溺)하는 속에 마음을 살찌우고 얼굴을 매력 있게 하기에는 참 좋은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

잠시 책 속에서 영양을 섭취하고, 옛 사람들의 지극하고 사려 깊은 아름다운 풍속에서 오늘을 반추해보는 것도 가을을 알차게 보내는 여유가 아닐까 싶다.

대동문화 73호 [2012 11.12월호]

조상열 대동문화재단 대표  -08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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