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에서 접한 물리적인 대상을 ‘탁지(종이)’를 이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균제미와 조형적미로 재현을 꾀하는 김일근 작가, 그는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인간의 본질(자아)’에 대한 성찰을 작품 속에서 어떻게 예술적 언어로 변용시킬지에 관한 고민들을 해오고 있다. 이 변용의 과정은 모방·재현에 관한 환영(illusion)의 요소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재현된 사물은 무엇보다도 수공예적인 기술과 질감적인 접근 방식이 흥미롭다. 이것은 종이로 재현된 사물임에도 불구하고 실재 사물보다 더 실재적인 형상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 점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의 작품이 현대미술의 양상에서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어 보인다.

공존-폐지(종이), 가변적 크기, 2012

현실과 복제된 현실 사이의 이중성 부각

20세기 중후반 현대 인문 사회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상품의 가치보다는 상품의 기호학적 가치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다. 이는 모더니즘 이후 전개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소비문화를 지칭한다.

장 보드리야드(Jean Baudrillard, 1929~2007)는 ‘상품과 상품을 사용한 인간의 관계가 상품의 교환가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호학적 가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이며 ‘기호가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성한 소비 사회’라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가 광고, 컴퓨터, 통신, 디지털 등으로 이루어진 복제 기호 이미지를 실재의 그것처럼 인식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 기호 이미지는 실재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된다. 보드리야드는 이 현상을 ‘시뮬라크르’, 실재와 이미지가 하나가 되는 과정 단계를 ’시뮬라시웅(simulation)‘, 그리고 그것의 과정을 거쳐 생겨나는 실재를 ’하이퍼리어리티(hyper-reality)‘라고 명명한다. 그의 이러한 이론은 팝아트 작가들의 작품 활동에 원동력을 제공해주었다.

김일근의 작업은 일상적인 사물을 외형적 특질만을 제거하고 그것의 오리지널(Orginal)과 같은 형태로 재현한다. 이 오리지널을 모방해서 재현된 형상들은 다시 복제된다. 이 복제된 형상은 또 다시 복제되어 수십 개의 복제된 형상을 만들어낸다. 이 복제된 형상은 시지각적으로 구별할 수 없는 동일성을 갖는다.

작품의 또 다른 주체인 관객이 구성하는 회화

이것은 오리지널과 그것을 복재한 이미지가 하나가 되는 시뮬라시웅을 이루고 있으며 더 나아가 실재보다 더 실재적인 하이퍼 리얼리티를 갖게 된다. 그가 2008년 광주 신세계 갤러리에서 열린 <재현된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제9회 광주신세계미술제 수상작가 초대전)은 시뮬라크르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45개의 가방을 균제미와 조형미로 설치한 <줄을 서시오> 작품은 검정 질감을 가진 1개의 가방과 종이 질감을 가진 44개의 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황을 짐작해보면, 전자는 오리지널을 지칭하고 후자는 시뮬라크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12년 10월 광주은암미술관에서 열린 <수다떨기 그리고 확장하기> 대동문화재단 레지던스 교류전에서 선보인 <공전>의 작품은 28개의 마스크가 설치되어 있다. 이 각각의 마스크 역시 시지각적으로 동일하다. 이 상황적 내러티브가 작가의 의도적 혹은 유연적인 것이든 중요한 것은 어떤 예술적인 담론을 제공해준다는 점이다.

예술의 사회성 면에서, 김일근은 미술관 속에 작품을 던져놓을 뿐이다. 그 이후에 파생된 작품의 담론들은 비평가, 관람객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나는 작품의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기에 관객들에게 그 어떠한 나의 의도와 목적,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하고 싶지 않다. 작품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각가 주관의 심미적인 상태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 역시 다르다. 관객들에게 혼돈과 한정된 상상을 하도록 유도하는 장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아름다움의 발견은 보고 느끼는 자의 몫으로 하고 싶다. 보는 사람 또한 작품을 만드는 또 다른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일근의 작가 노트 중에서-

일상의 재현으로 관객에게 즐거움 제공

포스트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1917년에 제작된 마르셀 뒤샹의(Marcel Duchamp,1887~1968) <샘>, 그리고 1964년에 맨하탄의 스테이블 갤러리(the Stable allery)전시된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의 <브리로 박스(Brillo Box)>는 기성품 그 자체를 전시했다.

소비문화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복제된 기성품은 작가의 수공예적인 기술을 박탈시켰다. 워홀은 스튜디오에 수십 명의 아트워커(artworker)를 두고 실크 스크린 프린터 영화 등을 제작하게 했다. 네오 팝아트 작가인 제프쿤스(Jeff Koons)는 예술 공장장으로서 300명이 이르는 아트 워커를 두고 작품 제작을 하고 있다. 최근엔 우리나라에서 그의 작품을 300억에 구입한 업체가 있기도 했다.

이것은 뭘 의미할까? 미술 작품은 수공예적인 실재 산물이 아니라 실재가 더 실재 같은 복사 기호 이미지가 미술 작품의 산물이며, 더 이상 조각가나 화가들은 자연의 외관을 정복하는 정교한 솜씨가 불필요해졌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김일근은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 “마르셀 뒤샹의 작품에서는 작가가 직접 만들지 않은 기성품을 그대로 선택하여 제시하였다”면서 “기성품을 모델로 하되 그것을 내가 직접 만들어 재현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와는 많이 다르다는 언명을 하고 있다. 그는 “재료를 두꺼운 종이 재질로 통일시켜 제작한 일상의 사물들은 매우 정교하게 재현” 한다. 또한, “종이를 정교하게 자르고 붙이는 작업을 더해가며 재현된 작품 그 자체로 관객들에게 볼거리와 재미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 작업 과정에서 생겨나는 시지각적 공감성, 균제성, 조형성은 모던니즘적인 형식의 일부분을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작가의 작업은 수공예적인 기술 획득과 예술가의 창의성이 결합되어야만 작품을 이루어낼 수 있다. 광주 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인 김민경은 그를“먼저 작가의 섬세한 솜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뛰어난 손놀림으로 정교한 재현을 이루어낸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것에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우선 대상 하나하나의 조형성에 주목하고 그것을 독자적인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 사실적인 묘사 재현된 현실만으로도 관객은 예사롭지 않는 볼거리를 제공받는다.”라고 묘사했다.

이러한 김일근의 작업은 일상사물의 기성품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지만 제작 과정에서 본래의 예술가들이 가지고 있는 수공예적인 수고를 버리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이점에서 현대미술 작품이 소비문화의 복재된 이미지로 판치는 형국에 시사한 바가 크다 하겠다.

대동문화 73호 [2012 11.12월호]

오윤철 예술철학 박사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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