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 대동문화 사무처장

아침에 일어나보면 어젯밤부터 틀어놓은 선풍기의 날개가 돌고 있다. 선풍기의 뒷목을 짚어보면 뜨끈뜨끈하다. 더위에 잠을 설치는 가족들의 열대야를 밤새 식혀주느라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정지 버튼을 누르며 힘겨운 야간 근무를 쉬게 한다. ‘선풍기야! 고맙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식영정 20영’이라는 시가 있다. 식영정 4선이라고 불렸던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과 호남가단의 선구자인 면앙정 송순 이렇게 5명이 식영정의 아름다운 풍경을 20수씩 읊은 총 100수의 연작시다. 그 중 석천 임억령 선생이 쓴 시 한 편의 제목은 ‘창계의 푸른 물결’이다. ‘옛 골짜기는 석양에 잠기고 푸른 용은 은물결 뿜어낸다. 주머니 속에 넣어둘 수 있다면 더위 속의 사람들에게 부쳐주고 싶네.’ 창계는 식영정 앞을 흐르는 증암천을 말하고 푸른 용은 그 물결이 하얗게 부서지며 세차게 흘러가는 모습이다.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바람을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부쳐주고 싶다는 백성 사랑하는 마음이다.

유난히 가혹했던 올해 폭염을 사람들은 ‘연쇄 살인범’이라고 불렀다.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분들이 많아서다. 기록적인 더위 때문에 피해를 입은 분들 너무 많았다. 쓰레기 더미에서 자연발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정전 사고가 빈발했다. 오죽했으면 쇠뭉치인 외제 자동차들이 불이 붙었겠나.

무더위가 우리 일상 자체를 위협했고 그 위협에 노출된 약자들을 보호할 사회 공동체의 협력이 미약해 ‘폭염 복지’라는 말도 나왔다. 에어컨이 없어 선풍기로 더위를 버티고 선풍기를 켤 전기료 낼 일이 부담되는 저소득층. 폭염은 사회적 약자를 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폭염은 재난이 돼버렸다.

현장에서 일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분들에게 이번 더위는 그야말로 고역 중의 고역이었다. 건설 노동자, 시장 상인, 음식점 주방장, 경찰, 소방관, 사회복지원, 배달원, 응급구조원, 군인, 경비원, 농부 등이 무더위와 싸운 분들이었다. 결국 우리의 삶터를 지키는 최전선에 선 사람들이 우리 대신 땡볕 내리쬐는 극한의 현장에서 팥죽땀을 연신 흘리며 무더위와 싸웠다.

식영정과 같은 문화유산은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숨결이 담긴 사회 공동체의 자산이다. 이 자산을 돌보는 사람들인 ‘문화재 돌봄사업단’도 올 한해 무더위를 견딘 극한 직업의 대표적 사례였다. 광주에는 지정문화재, 비지정문화재 등 가치 있는 지역 문화유산을 지키는 ‘문화재 돌봄사업단’ 관리사 18명이 근무하고 있다.

이분들은 광주 200여 개의 지역의 문화재를 돌보는 일을 한다. 문화재 관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현장 출근 시간을 8시로 앞당겼다. 오전 12시 이전 오전 작업을 끝낸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3시까지는 문화재 주변 일상 관리 등 주변 환경 정리 등의 업무를 한다. 퇴근 전에 사무실로 들어와 돌봄 업무를 평가하고 기록한다.

문화재 상태를 점검하는 모니터링 작업을 먼저 한다. 제초 작업, 소화기 관리, 철물 방청 작업, 배수로 청소 등은 일상적인 관리다. 창호 보수, 마루 대문 보수, 석조 보수, 목공 작업, 기와 보수, 안내판 보수, 도배 작업, 지반 정비, 조경 관리 등은 문화재 경미수리 작업이다.

대부분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관리 작업이고 실내라 하더라도 방치된 문화재에 선풍기나 에어컨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해가 뜨기 전부터 온몸에 땀이 범벅이다. 작업은 더디고 힘에 부친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땀띠가 나고 피부가 벗겨져 아리고 쓰리다. 제초를 하다가 풀독이 올라 얼굴이 부어오른다. 그야말로 사투다.

우리의 삶터를 지키는 일은 일요일이 없다. 일요일 없이 우리 사회를 움직이게 하느라 더위와 맞서 싸운 분들 역시 ‘폭염 복지’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 분들에게 석천 임억령의 시처럼 시원한 바람을 내내 선물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격려 차원의 허약한 위안의 말일 뿐이다.

삶을 위협하고 삶의 터전을 붕괴시킨다는 점에서 폭염은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로 인정돼야 한다. 이 재해에 대비하는 재난안전법 개정을 통해 항구적인 생존권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폭염 복지’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문화지킴이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이승호 기자  agstar1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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